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쿄짱상 Aug 30. 2021

퇴사 후 #8. 도쿄 카페에서

도시락을 싸고 엄마가 되었다.

카페라고 모두 다 같은 카페가 아니다!


혼자 멍 때리거나 생각을 정리하거나 글을 쓰기 좋은 카페의 조건을 오늘 알아 채린 것 같습니다.

아침 8시 걸어서 15분 거리의 동네 카페, 습하고 더운 날씨에도 꾸역꾸역 걸어서 이곳을 찾아가게 되는 이유는 단지 커피 맛이 좋아서가 아니라, 바로 이 장소가 갖는 힘 때문입니다.  

카페의 큰 창은 흔한 일본 드라마의 배경에 나왔을 법한 장면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철제 의자의 카운터 석이라 안락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두 시간은 시간가는 줄 모르게 편안하답니다.  


큰 창으로 파란 하늘이 올려다 보이고,

하늘에는 구름이 찬찬히 흐르고, 유심히 그 변화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강인지 바다인지 늘 헷갈리는 도쿄만의 물살이 찰랑찰랑 거리고, 그 위에 걸쳐진 아치형 다리 위를 걷는 도쿄 사람들.


다들 일터를 향해 바지런히 걷고 있는 모습과 카페에서 한갓지게 앉아 있는 저의 모습과 간극을 느끼며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에스프레소가 진한 카페라테 한 모금하며 눈앞에서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게 됩니다.


춤추는 바람을 느끼는 나뭇 잎새를 조용히 엿볼 수 있는 이 카페. 특별할 것 없는 자연과 일상이지만, 이곳의 풍경은 한없이 풍요롭고 완벽하게 느껴집니다.


하늘, 구름, 바람, 바다, 나무 그리고 도시가 한 컷에 담겨 있는 살아있는 필름 사진 같다고나 할까요?


시스템 에어컨 덕분에 적당히 시원하고, 특히나 흐르는 음악이 좋은데요, 제목을 알지는 못하는 그르부 있는 팝들은 매우 세련되어 이 카페의 이름인 'BROOKLYN'처럼 정말 미국 브루클린 카페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정작 가본 적은 없는 미국 브루클린인지라 그곳이 세련된 도시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사실 오늘 이렇게 일상의 카페가 완벽한 공간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도 긴 방학 끝에 아이가 등교를 해서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실은 이 등교와 동시에 저의 새벽 노동은 시작되었습니다. 7시 10분에 스쿨버스를 태워 보내야 하니, 늦어도 6시에는 일어나서 아이 아침밥과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죠. 밥도 새로 짓고, 늘 고민되는 도시락 반찬은 오늘도 어떻게든 4칸이나 되는 보온도시락 반찬통을 채워야 합니다.


오늘은 우선 김치와 삶은 메추리알로 두 칸을 채웠습니다. 고맙게도 음식 중에 김치를 제일 좋아하는 아이라 한 칸은 늘 김치로 고민없이 채울 수 있어요. 그래도 아이가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배추김치를 자르고 식감이 좋은 부분으로 12조각을 세심하게 골라 담았습니다. 메추리알은 장조림이라도 했어야 하나? 허얗게 민둥한 메추리알을 채워 넣고 보니 왠지 무성의해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그냥 삶아서 까는 데만 해도 손이 한참이나 갔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합니다. 


나머지 두 칸은 햄과 인스턴트 냉동식품, 냉동 함바그를 전자레인지에 1분 찡해서 마지막 한 칸에 담았는데요, 늘 이런 식으로 준비를 하는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걸로 성장기 아이 반찬통을 채워도 되나 싶어서 햄은  특별히 양파와 함께 볶아 담아냈습니다.

 

그래도 뭔가 아쉬워서 한국 마트에서 사 온 도시락용 양반김도 한통 챙겨 넣었습니다. 염분은 더 추가되었지만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이 도시락은 엄마의 정성이 가득한 도시락이라고 말하기 조금 민망함이 있지만 오늘도 할 일을 한 것으로.




맞벌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혼자서 잘 자라 주었습니다. 회사 어린이집에서 풀타임으로 봐주고, 집 앞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는 급식을 먹고 방과 후에는 혼자 간식을 사 먹으며 동네 학원을 알아서 돌았던 독립심이  강요된 삶이었고, 우리 가족은 그것을 당연시 여겼습니다.


그렇게 아이를 십여 년을 키우다 퇴사 후 일본에 오고 집에 있는 엄마가 처음 되어 보았습니다. 집에 있는 엄마의 역할을 받아들이기까지 저에게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처음이 바로 '도시락'입니다. 일본에 오고 난 후 고민 없이 당연히 학교 급식을 신청했습니다. 대부분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는 이야기는 학교 엄마들에게 들었지만 제 귀에는 들어오지 않더군요.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면서 스무 명쯤 되는 한 반에서 급식은 먹는 아이는 우리 아이를 포함해서 단 둘 뿐이고, 거기에 급식은 차갑고 맛이 없어서 거의 남겨서 버린다는 전언, 그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저도 엄마표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보온 도시락을 들고간 그 첫날 어찌나 싹싹 비워먹고 오던지 빈 도시락을 설거지하면서 제 마음이 복잡했었더랬지요.


아마도 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를 위해 밥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직장 출근 준비를 하면서 화장을 하고 옷을 골라 입고 향수로 마무리하던 퇴사 전의 나를 그렇게 놓아주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초라한 듯, 억울한 듯 허무했던 마음의 빈자리에 이제는 아이를 바라보며 준비하는 보온 도시락 덕분에 제 마음에도 적당한 온기가 서리기 시작합니다. 퇴사 후 아침에는 소중한 내 아이를 위해 밥을 챙겨 학교에 보내고, 이 후의 시간에 완벽한 카페에서 지금까지와 또 다른 모습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는 오늘...


오늘은 왠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퇴사 후 #7. 나도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