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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목수 Jul 21. 2019

평범한 삶이 꿈인 아이들

 왕복 8시간 출퇴근 길을 참으며 일 해온 파이살과 리즈키

                                                                                                                                               

 작년 우리 직업학교 체육대회 풋살 시합에 뛰던 파이살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주황색 스니커즈를 신고 풋살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모습이 흡사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파이살은 파푸아 섬 출신이다. 파푸아 원주민 특유의 곱슬머리가 매력적이라서 누가 봐도 파푸아섬 출신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파이살은 고아원에서 지내다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우리 직업학교의 가구반으로 왔다. 수업도 열심이고, 여자 친구랑 연애도 열심인 아주 이쁜 구석이 있는 학생이었다.


 한 번은 파이살이 폭력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다. 왜 싸웠냐고 물었더니 다른 반 학생이 자기 여자 친구에게 자꾸 치근덕거려서 시비가 붙었다고 했다. 분명히 자기 여자 친구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을 했는데, 바로 다음 날 그 친구가 파이살 여자 친구의 어깨를 일부러 탁 치고 지나가서 참을 수 없었단다. 여자 친구 때문에 다른 학생이랑 싸우다니, 이렇게 낭만적인 사건은 정말 오랜만이다. 파이살에게 다시는 다른 학생들과 싸우면 안 된다고 혼을 냈지만, 돌아서서는 '아 이 녀석 좀 멋있는데?'라며 혼자 속으로 웃었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두고 싸우는 일을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직접 목격한 적이 언제인가?


 우리 가구반에서는 1년 동안 목공 기술을 배우고 졸업하기 전에 현장 실습을 나가는데, 파이살은 SMK52라는 공업고등학교 가구과에 파견이 되었다. 인턴기간 동안 차비와 점심 밥값이 없어서 우리 NGO에서 밥값과 차비를 줘서 현장실습을 다니게 했다. SMK52 가구반의 선생님은 파이살이 아주 성실하고 맡은 일도 잘한다며 내년에도 또 다른 학생을 인턴으로 보내 달라 했다.


리즈키 (좌) , 파이살 (우)


 현장실습 예기가 나와서 말인데, 현장실습을 아주 제대로 말아먹은 녀석이 있으니, 바로 리즈키다. 리즈키는 한국 건설회사인 한스자야의 창고관리 보조로 실습을 보냈다. 건설회사 창고는 여러 가지 자재가 드나드는 현장의 베이스캠프이기 때문에 한두 달 머물면서 착실하게 일하다 보면 견문이 절로 넓어질 것이었다. 품 안의 자식 떠나보내는 심정으로 자카르타에서 2시간 거리의 찌깜펙이라는 지방 소도시 건설회사 창고로 실습을 보냈다. 실습 떠나는 날 아침에 리즈키와 함께 한스자야 박 부장님을 찾아뵙고 우리 학생들을 실습생으로 받아줘서 감사하다며 같이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 녀석, 건설회사의 자재창고가 너무 시골이라 답답하다면서 이틀 만에 학교로 도망치듯 돌아와 버렸다.


 어렵게 부탁해서 마련한 실습 기회인데, 그렇게 쉽게 날려버려 얼마나 속상하던지. 박 부장님을 만나 우리 학생이 결례를 일으켜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혹시 내년에도 현장 실습생을 다시 받아주실 수 있냐고 염치 불고한 부탁도 잊지 않았다. 어쨌든 아무리 속상해도 우리 학생인데 현장실습을 못 마쳤다고 졸업도 안 시킨 채 쫓아낼 수는 없었다. 현지 가구회사를 급하게 섭외해서 현장실습을 다시 내보냈다. '모렐리'라고 하는 상업 가구 회사였다. 리즈키는 다행히 모렐리에서는 두 달 간의 현장실습을 무사히 마쳤다. 리즈키의 현장실습 기간 동안 차비와 점심 값 역시 매주 우리 프로젝트에서 지원했다.


 리즈키는 북자카르타 빈민촌에서 자랐는데, 가구반을 졸업하기 몇 주 전 집에 불이 나서 그나마 없는 세간이 홀랑 다 타버렸단다. 가정조사 페이퍼에 부모님 수입이 한 달에 12만 원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 속상했었다. 안그래도 가난한데 그나마 있던 보금자리마저도 사라졌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2017년도 Dream Center Project 가구반 졸업 작품 전시회


 우리 NGO 프로젝트에서는 직접 가르친 학생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함께 운영한다. 학교에서 배운 기술을 활용하여 함께 가구를 만들어 수익을 내고, 수익금은 다시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데 사용하는 '지속 가능한 NGO 자립 모델'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화재 사고 후 리즈키 가족은 자카르타에 머물 곳을 구할 수가 없어서 데폭이라는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리즈키는 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리 NGO 가구공장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리즈키 가족이 새로 둥지를 튼 시골마을에서 동부 자카르타에 있는 우리 NGO 가구공장까지는 무려 4시간이나 걸린단다. 출근 시간이 아침 8시였기 때문에 리즈키는 새벽 4시에 집에서 출발한다 했다. 앙콧(봉고차 버스)을 타고,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전철역에서 공장까지 다시 또 한참을 걸어서 출근을 했다. 이제 막 시작한 보잘껏 없는 가구 공장이 제 일터라며 매일 힘들게 찾아와서는 열심히 일하고, 저녁이 되면 다시 또 그 먼길을 되돌아 집으로 갔다.


 출퇴근만 왕복 8시간이 걸리는 직장을 매일 같이 출퇴근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출근길 편도만 4시간이라니, 나라면 아마 3일도 못 버티고 때려치웠을 것이다. 공장에서 같이 일하기 시작한 초기에 나는 이 녀석 출근 시간이 4시간이나 걸리는 줄 몰랐다. 어쩌다 한 번 지각을 하면,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주의를 주면서 다음부터 늦지 말라고 꾸짖었다. 4시간 거리에서 오다 보면 중간에 예기치 못한 일로 일이십 분 늦을 수도 있는데 나는 리즈키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갑작스러운 교통체증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자카르타가 아닌가?! 리즈키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엄청난 끈기를 가지고 불평 없이 성실하게 일했다. 나는 리즈키의 선생이지만 나의 학생인 리즈키가 존경스러웠다.


 지금 리즈키가 공장에서 받는 월급은 그의 부모님 수입보다 많다. 공장에서 일을 한지 몇 개월 뒤, 리즈키네 가족은 조금 더 깨끗하고, 공장과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리즈키의 월급으로 가족들이 외진 시골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출근에 4시간이 걸렸었는데 지금은 3시간밖에 안 걸린다며 좋아하는 리즈키를 보며 마음 한편이 짜르르하게 저려왔다. 3시간도 멀잖아?! 이제 갓 18살이 된 아이가 벌써 가족을 책임지고 있다. 리즈키는 여동생이 한 명 있고, 리즈키의 어머니는 지병이 있으셔서 병원비도 많이 든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리즈키가 우리 공장에서 함께 일하면서 리즈키의 가족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보였다. 일하는 태도가 밝고, 학생 때 보다 훨씬 쾌활해졌다.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리즈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고향이 파푸아 섬인 파이살은 사정이 좀 다르다. 파푸아 섬은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한참을 날아가야 한다. 서울과 필리핀만큼이나 멀고, 그래서 비행기 값도 상당히 비싸다. 파이살은 어떤 이유에선지 10살 무렵에 자카르타로 건너와서는 지금까지 이 곳에서 살고 있다. 집을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고향집에 가보지 못했단다. 파이살에게 엄마가 보고 싶지 않냐고? 파푸아 섬에 언제 한 번 안 갈 거냐고 물으니, '나중에, 나중에' 라고만 대답한다.


자카르타에서 혼자서 자란 파이살은 최근에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았다. 이제 자카르타에도 그의 가족이 생긴 것이다! 이토록 험난한 자카르타에서 적은 월급이나마 꾸준히 모아서 가정도 이루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성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리즈키와 마찬가지로 파이살에게도 나는 항상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이 친구들로부터 나는 많은 점을 느끼고 배운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 뉴욕 현대미술관


 이 곳 자카르타의 시간은 '기억의 지속'이라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뭔가 초현실적으로 흘러간다. 삶은 지긋하게 늘어지고 의식은 자꾸만 갈피를 잃고 방황한다. 그래도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고 나는 한 해 한 해 열심히 늙어간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 곳에서 나는 살아간다기보다는 버티고 있는 중이다.

힘들지만 그래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다고 믿기에 그나마 견디고 있는지 모른다.


삶에 속도보다는 제대로 된 방향이 중요하다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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