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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ug 14. 2019

남녀 전쟁

남자로 혹은 여자로 산다는 건


   인류가 여태껏 풀지 못하는 3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인문/철학), 둘째는 양자역학 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과학), 셋째는 외환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경제)

  난 과학자도 아니고 경제학자도 아니다. 마지막 두 난제에 대해서는 얘기하기엔 배경지식이 턱없이 부족하다. 최근 읽은 책들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키는 내용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Adam & Eve

  성경의 창세기 편에 보면 태초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얘기가 나온다. 하나님은 남자인 아담을 만들고 의 몸에서 갈빗대 하나 빼어내어 여자인 하와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나에서 둘로 나누어졌다. 남자로부터 여자가 만들어졌다. 하나님이 만든 남자와 여자는 에덴동산에서 자의식(죄의식) 없이 풍요롭게 살아간다. 하지만 뱀의 꼬임에 넘어간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한 나무(선악을 구분하는) 열매를 따서 아담과 나눠먹은 죄로 죄의식(선악)을 알게 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그 죄로 남자에게는 평생 땀을 흘려야 양식을 얻을 수 있는 노동의 고통을 주었고 여자에게는 그런 남자에게 순종하며 잉태와 출산의 고통을 내렸다.


  남녀의 애증관계는 그렇게 태초부터 시작되었다. 둘은 서로를 갈구하고 또 미워하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남자로부터 나온 여자, 죄를 지은 여자, 같이 죄를 짓는 남자, 벌을 받아 고통 속에서 일을 해야 하는 남자, 남자에게 순종하고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하는 여자. 창세기에 이 내용이 남녀의 삶을 아주 간단명료하게 요약해 보여주는 것 같다.

    과거 남녀 하늘이 내린 벌(원죄)에 복종하며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 지지고 볶든 어떻게든 부부가 붙어서 살아온 걸 보면 말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말을 비웃기라고 하듯 그 벌을 받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것 같돈 버는 방식의 변화로 남자는 땀 흘려 일하지 않으려 한다. 쉽고 빠르게 일해서 더 많은 수확과 돈을 얻고자 한다. 과학의 발전을 이용해 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 그 도전의 대가는 인간과 인간을 멀어지게 하고 의 터전인 지구의 변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남자를 지배하는 한 가지 성욕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기보단 남자를 이용하고 지배하려 한다. 출산을 거부하고 성을 무기로 물질적으로 풍족한 남자 유혹하고 이용한다. 유혹에 넘어온 남자를 지속적으로 조정하려 든다. 남자도 더 이상 여자와 가정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여자를 성적 욕구 해소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매춘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남자의 강력한 성욕이 혹독한 노동의 고통을 불러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이제 한 여자의 몸과 마음을 얻기 위해 평생을 바치려 하지 않는다. 여자도 남자보단 돈과 물질을 더 신용한다. 지위와 재력이 있는 남자를 선호하는 건 그 이유일 것이다. 


  이 둘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진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과 자녀를 위한 헌신을 요구한다. 남자는 그들에게 부응해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기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한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노동이 반드시 더 많은 풍요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 많은 돈과 물질을 차지하기 위해 사악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편법과 속임수가 만연한다. 대체적으로 가정을 지키기 위한 사명(使命) 혹은 명분 때문인지 가정을 가진 수컷들은 물질(돈)을 위해 더 잔인해질 수 있다. 피해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남자는 여자와 합을 이뤄 가정을 이루면 더 큰 노동의 고통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태초의  원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하기 시작하는 듯하다. 과거의 가정이 남자에게 안정을 가져오는 존재였다면 지금가정 부담을 가져오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사회에서 인정받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자에게도 가정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건 매한가지이다. 기러기 아빠, 주말부부, 이혼, 비혼, 졸혼 등으로 가정의 해체가 만연한 사회 현실 속에서 가정을 일구고 자녀를 양육하는 일은 마치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처럼 여겨진다.


   남녀평등을 끊임없이 외치는 세상 속에서 아직도 한국은 남자는 집을 마련해야 하고 생계의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관습이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직장을 구하기도 힘든 현실에서 평생 벌어도 마련하기 힘든 내 집을 부모님 손을 벌려 마련해야만 결혼을 할 수 있고 그런 아들을 둔 부모가 죄인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오죽하면 아들 셋, 아니 둘만 낳아도 죄인이라는 소리가 나오겠는가? 남아선호 사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으세요?"
 "아니요~ 전 그냥 여자로 태어날래요 적어도 한국에서는..."


    과거 소개팅에서 습관처럼 물어봤던 질문이 하나 있다. 수많은 여자 중에 단 한 명도 한국에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대답한 여자는 없었다. 그 말은 여자들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들의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녀들은 어머니로부터 교육받아 왔을 것이다. 


 "엄마처럼 살면 안 돼! 능력 있는 남자 만나 손에 물 안 묻히고 살아라."라고?!

   그럼 남자는 어떻게 교육받았겠는가? 열심히 공부해서 돈 벌고 출세해야 예쁜 여자 얻는다고 교육받지 않았던가? 그것이 남자에게 황금만능주의, 여자에게는 외모지상주의 이념을 심어 주었다.


  "Why Korean girls look so pretty(or beautiful)?" (한국 여자들은 왜 그렇게 예뻐?)

   여기 낯선 이국 땅에서 타국 남성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들의 눈에는 한국 여자가 유독 예뻐보이나 보다. 한국에선 여자의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말로 그들의 질문에 답하곤 했다. 그러면 그들은 "남자는?" 하고 묻는다. 나는 남자는 돈이지 하고 웃으며 대답한다.


  모든 남자가 돈 잘 벌고 출세할 수는 없다. 모든 여자가 예쁠 수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없어도 있어 보이려 하는 남자들의 허세가 늘어가고 외모를 바꾸는 여자들의 마술 같은 화장법과 성형술이 판을 친다. 한국의 드라마도 거기에 기름을 부어온 것 같다. 과거 한국 멜로드라마의 주요 스토리는 항상 부유한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신데렐라형이 주된 내용이었다. 나중에는 돈 많은 왕자도 식상하다고 느꼈는지, 귀신과 외계인과 사랑하는 판타지 러브로 발전한다.

Woman prefer money more than love

   대부분 여심을 자극하기 위한 소재들 뿐이다. 물론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주요 시청자인 여자들의 구미에 맞춰야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드라마의 작가들 또한 대부분이 여자인걸 보면 쿵짝이 잘 맞아떨어진 듯 보인다. 어차피 남자들은 야근에 회식에 저녁시간 TV 앞에 앉아 시청률을 올려줄 리 만무하다. 방송국은 안방마님들만 잘 사수하면 되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드라마가 오랜 기간 한국 여자들의 정신을 지배해왔다. 여자들에겐 그것이 일상의 탈출구였을지 모르지만 뇌는 계속 반복되면 현실과 구분이 힘들어진다. 남자들이 피곤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온라인 게임에 빠지는 거랑 다를 바가 무엇인가? 덕분에 한국 드라마가 해외에서 불나게 팔려 국위선양을 했다. 그 말은 기존에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류의 드라마가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의 온라인 게임 또한 수출 역군이 되고 있는 것 사실이다. 비현실적인 드라마가 한국의 남녀 역할에 대한 인식과 생각을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간 것은 아닐까?

Appearance is the most important than ever for woman

   한국 사회는 남자는 돈, 여자는 외모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듯 보인다.  그런 시스템 속에서 남녀의 결합은 참담하다. 한국의 이혼율과 혼인율 그리고 출산율이 증명하고 있다. 남녀 간의 신뢰가 깨진 사회는 남혐과 여혐으로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공생의 관계에서 기생으로 전락하다 못해 적대관계로 악화되었다. 동서로 갈라 여야로 갈라 이제는 남녀로까지 갈라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계속된다. 앞에선 사회통합과 소통을 외치면서 뒤에서는 서로를 물어뜯기 바쁘다.

  
  과연 이런 엇갈림의 끝은 무엇일까? 태초에 저지른 죄의 대가를 묵묵히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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