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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ug 19. 2019

멸치는 미안함이었다.

멸치볶음만 싸준 이유

   한 번도 깁스를 해 본 적이 없다.


  살아오면서 한 번쯤 겪는다는 골절 혹은 뼈에 금이 가는 사건이 나에겐 일어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강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 반에서 쉬는 시간 점심시간을 가리지 않고 시간만 나면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축구, 야구부터 말뚝박기, 철봉 등 갖가지 놀이에 여념 없던 아이들은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  반에서 한 두 명씩은 깁스를 한 친구가 있었다.

 

   친구가 팔다리에 깁스를 하고 팔걸이나 목발을 짚고 학교에 나타나면 며칠씩 못 씻어 간지럽다며 연필이나 샤프를 쑤넣고 긁 달라는 모습 볼 때마다 어떤 기분일까 궁금다. 그들의 깁스는 친구들의 낙서장이 되었고 팔걸이와 목발은 장난감이 되곤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에겐 하얀 로보캅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사고가 생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유년 시절부터 유난히도 별나다는 소릴 많이 들었다.

   설날 때였을 것이다. 할머니 집의 외양간에 여물을 먹고 있는 소의 콧구멍을 쇠 꼬챙이로 쑤셨다가 놀란 소가 외양간 우리를 부수고 나와 나를 받아쳤다. 나는 마당으로 튕겨져 나갔고 그 강한 충격에도 찰과상만 입었을 뿐 크게 다치지 않았다. 다만 전 가족이 도망간 소를 찾느라 마을 주변의 산과 들을 뒤지며 엄동설한()에 생고생을 했다. 추석 땐 가을걷이가 끝나고 쌓아둔 볏단에서 불장난을 하다 할머니 집을 홀라당 태워먹을 뻔했다. 명절날 동네 이웃들이 모두 달려들어 양동이로 물을 퍼 나르며 불을 끄느라 난리도 아녔다고 한다. 그 이후로 할머닌 명절 때마다 나를 보시면 때리듯이 엉덩이를 토닥이시며 "이노무 사고뭉치 똥 강아지 왔나~"라고 부르셨다.


   또 한 번은 집 계단에서 무슨 놀이였는지 기억이 가물하지만 영웅 행세를 따라 하다 굴러 떨어져 계단의 미끄럼 방지를 위해 만들어진 쇠 모서리에 머리를 찍었다. 눈 주변에서 피가 철철흘려내렸다. 어머니는 병원으로 나를 둘러업고 뛰면서 실명(失明)한 줄 알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눈가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남았지만 다행히 눈과 뼈는 멀쩡했다. 나의 단단한 두개골이 안구를 보호해 줬다. 어릴 시절 수도 없이 떨어지고 부딪치고 찢어지고 몸이 성할 날이 없었지만 뼈 하나만은 멀쩡했다.

  

   분명 멸치 때문이다. 어린 시절 지겹도록 먹었던 수천 아니 수만 마리의 멸치의 숭고한 희생 덕분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면 떠오르는 반찬은 오로지 멸치볶음이다.

   

   어린 시절 형편이 좋지 않아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는 나와 동생의 도시락 반찬의 다양성을 보장해 줄 여유가 없으셨던 모양이다. 유난히도 멸치가 많이 나는 경상도 남단의 항구 도시 부산이라서 였을까?   

   엌 한 귀퉁이엔 항상 마대자루 가득 마른 멸치가 쌓여 있었다. 석들은 대량으로 볶아져 냉장고에 자리 잡고 일주일 내내 도시락과 밥상에 올랐다. 김치는 빠져도 멸치는 빠지지 않았다.


  작지도 그렇다고 너무 크지도 않은 4~5cm 정도의 뼈가 씹히는 식감이 느껴지는 마른 멸치에 편 마늘을 썰어 넣고 간장과 물엿으로 캐러멜 비슷한 양념을 하고 끔씩 꽈리고추나 땅콩 등의 특별 게스트도 첨가되어 반들반들하게 볶아진다. 지막은 깨소금을 흩뿌려 고소함을 더한다.


"아놔~ 또야?"


   어머니가 멸치를 볶는 날이면 집안 가득 나와 나의 동생의 푸념과 함께 고소하지만 지겨운 향이 퍼진다.  그렇게 간장 캐러멜에 서로 엉켜 붙은 멸치들은 항상 나의 도시락 속에 드러누워 나를 노려본다.

  초등학교 시절 키가 유난히도 작아 반에서 항상 1, 2번을(당시 반에서 키 순서로 학생 번호를 매겼다) 다투는 나였기에 친구들은 조그만 나와 도시락 반찬이 잘 어울렸는지 멸치라는 별명까지 지어줬다.


"미안한데... 엄마가 정신이 없어서 멸치를 못 볶았어"


   이런 날은 마른 멸치 코팅 없이 그대로 누워있고 칸막이로 나눠진 반찬통 옆 칸엔 은박지 고추장이 있다. 친구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멸치를 고추장에 찍 내 얼굴에 .

마른 멸치와 고추장

"여기 고추장 멸치 하나 더 있네! 하하!"


   멸치가 싫었다. 맛도 지겨웠지만 나랑 비슷한 녀석 때문에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는 게 더 싫었다. 녀석들의 놀림에 이기지도 못할 주먹다짐을 하고 엉망이 된 얼굴로 집에 돌아오면 나를 혼내시는 어머니가 때린 친구들보다 더 미웠다.

   멸치를 싸주면 학교 안 가겠다고 떼를 쓰다 어머니의 매질에 어쩔 수 없이 울면서 들고 가던 멸치 반찬을 등굣길 하수구에 버렸던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뼈 녹는다 그만 마셔라! 우째 니 애미랑 똑같노!"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생전에 하셨던 말씀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어릴 때 내가 콜라만 보면 그렇게 환장을 했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 머니가 나를 임신하셨을 때 유난히도 콜라를 찾았다고 한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땐 그게 그렇게 댕겼다고 한다. 그때 마신 콜라가 뱃속에 있던 나에게 해가 되진 않았을까 남몰래 많이 걱정했다고 한다.


    때부터 어머니의 멸치 사랑이 시작되었다. 시장에 가면 멸치부터 챙기셨고 집안엔 멸치가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학교 우유 급식비가 없어 보충하지 못했던 칼슘은 이미 자연산 멸치들이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 유지방이 모자라 키는 크지 않았어도 뼈는 강철이 되어가고 있.


  멸치볶음은 그런 어머니의 걱정과 미안함이 만들어낸 반찬이었다.


  그렇게 유년시절 멸치볶음은 어쩔 수 없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당시에 희생되어 나의 뼈가 되어준 멸치들 덕분인지 웬만해선 뼈가 끄떡도 하지 않는다. 스키장에서 부딪치고 산에서 구르고 자전거에서 떨어졌을 때 그 엄청난 통증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가면 뼈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나랑 부딪친 사람은 어김없이 어딘가 한 곳이 부러지거나 금이 갔다.


   요즘은 식당에서 멸치 볶음 반찬이 나오면 너무 반갑다. 식사 나오기 전에 멸치볶음부터 먹어치운다. 그 맛이 아니다. 옛날 어머니가 해줬던 멸치 볶음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영화 '올드보이' 속의 만두처?!


   이번 주말엔 멸치를 사서 볶아봐야겠다. 어머니의 그 멸치볶음을 추억하며... 지겹도록 먹었지만 또다시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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