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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Sep 06. 2019

콜라 한 캔의 소확행

노동의 가치

  콜라를 아하진 않았다. 내가 호주에 오기 전까진...


   30대의 마지막 , 시드니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전까지 아시아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자고 깨고를 여러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오세아니아의 광활한 대륙을 눈 안에 넣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10시간이 넘는 비행은 정말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다주는 걸 실감 나게 해 주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회사생활을 내려놓고 떠난 나의 중년 워킹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감상 숨만 쉬어도 새어나가는 시드니의 묵직한 생활비(주거비, 학비 등)의 압박 속에 금세 사라졌다.  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처음 자리 잡은 셰어하우스의 집주인의 소개를 받아 지붕 목수 일을 시작하였다.


   사무직 회사원으로 10년 넘게 책상 앞 사수해온 나에게 지붕 목수일은 새로운 도전이자 시련의 시작이었다.


  처음 작업용 워커와 형광색 작업복(호주 건설 및 안전 노동자 복장 규정은 형광색 혹은 주황색 작업복을 착용)을 입고 망치, 삼각자, 줄자 등 손 연장 등이 담긴 공구 벨트를 차고 건축현장을 들어서던 내 모습은 10년 전 신입사원으로 구두에 정장을 차려입고 크로스 서류가방을 메고 회사에 출근하던 모습과 복장만 바뀌었을 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은  한 가지였다.

호주의 뜨거운 태양

   12월 시드니의 태양은 대지의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듯이 맹렬했다. 한 여름의 따가운 복사 광선 아래서 어깨를 짓누르는 목재(Timber)를 지붕 위로 수도 없이 날라 올리던 나의 머릿속엔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아닌 타들어가는 피부의 따가움과 짓눌린 근육의 통증만이 느껴졌다. 과거의 상처와 미래의 걱정은 사라지고 현재의 이 순간만 느끼고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단 한 가지 간절한 기다림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콜라 가져와라~"

"예~~ 옙!"


    나는 쏜살같이 지붕 밑으로 내려간다. 지붕 아래 놓아둔 아이스박스 속의 냉기를 한껏 머금은 이슬 맺힌 375ml의 빨간색 원통 캔과 마주한다. 얼굴에 화색이 돈다.


"피시 시시이 이익 톡!, 벌컥벌컥~ 커억!"


   태어나서 처음 마셔보는 맛이다. 맛이라는 단어보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톡 쏘는 기포를 머금은 시커먼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순간 기포 알갱이들이 쏘아대는 청량한 맛은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맛볼 수 없었다. 호주의 강렬한 태양 땀으로 범벅된 얼굴 그리고 짓눌린 근육의 통증 이 세 가지 레시피가 갖춰졌을 때만 맛볼 수 있다. 그때 그늘 아래 두 팔 벌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과거 그 광활한 미국 대륙의 건설 시기 때 노동자들이 느꼈을 맛일 것이다. 그 향수 같은 맛과 느낌이 지금의 거대 기업을 만들지 않았을까? 요즘 같은 웰빙시대에 설탕 농축액을 누가 선호하겠냐 하겠지만 카콜라는 음료를 파는 회사가 아니라 향수를 파는 회사라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과거의 뇌리에 각인된 느낌과 맛은 세월에 가도 잘 잊히지 않는다. 


"힘들지 않아요?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이런 목수일을 하는 게... 그것도 타국에서"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콜라맛도 느껴보는걸요"

"예?..."

  

   주일에 나가는 교회의 목사가 물어온 물음에 예상치도 못했던 나의 답변이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한여름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손가락만 두들기면서도 불평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일하면서 콜라 한 캔에 세상을 다 가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호주에서 찾은 소확행이다.


    힘든 노동 뒤에 먹는 점심은 언제나 소화불량에 시달리던 나에게 소화와 식욕을 촉진시켜주었다. 몸속에 흡수된 칼로리는 모두 에너지로 전환되어 오후의 노동을 위해 소모되었고 나의 몸은 지방을 축적하지 않았다. 노동의 고통은 나의 몸에 노폐물과 배출과 칼로리 소모를 돕고 있었다. 지친 몸은 숙면을 유도했고 불면증도 사라졌다.

 

   땀 흘리는 노동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집짓는 목수

   정신 노동자(화이트 컬러)로 살아왔던 나는 육체노동(블루 컬러)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은 지적 노동의 가치를 육체노동의 가치보다 더 높게 생각한다. 아직 머릿속 깊은 곳엔 조선시대 선비정신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못 배우면 저런 일 하는 거야~ 알겠니?"


   어릴 적 어른들이 자주 하던 말이다.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린 부모들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다 공부만 하면 일은 누가 하는가?

 고학력 백수가 넘쳐난다. 기술직의 숙련공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체하고 있다.

   한국에는 장인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박사, 석사들이 넘쳐나화이트 컬러만 선호한 결과이다. 수요는 줄고 공급만 넘쳐난다.


  여기 호주도 백인들은 힘들과 더럽고 어려운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일들은 모두 이민자들 차지다. 오랜 세월 이민자들은 그 분야에서 전문가 집단이 되어 이제는 지역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과시한다.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고 굳건히 지키며 다른 민족이나 나라의 진입을 차단한다.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들이 차별받고 핍박받고 있다. 무시하지 마라. 그들이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가 지나면 토종이라던 한국인들을 이 땅에서 밀어낼지도 모른다.


    블루 컬러에 대한 인식과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은 계속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뒤늦게 셔츠와 구두를 벗고 헬멧과 워커를 신은 사람들이 호주에서 땀 흘리고 있다. 그들은 졸업장이 나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난의 대물림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래서 내가 공부 안 한다 그랬잖아!"


  얼마 전 보았던 '어쩌다 어른'영상이 떠오른다.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대학에 유학까지 자식 교육에 재산을 쏟아붓고 사회에 나오니 일할 곳이 없다. 공부할 돈으로 포클레인을 샀으면 더 나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한국은 노인빈곤율, 자살률 모두 OECD 국가 중 1등이다. 가난이 못 배워서라고 생각했던 부모들의 자식 교육에 대한 열망이 그들의 노후까지 망쳐버린 것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니 행동도 바뀌지 않고 삶도 그대로 인 것이 아닐까? 세상만 덧없이 변해간다.


   땀 흘리며 마시는 한 캔의 콜라가 모니터 앞에 앉아 받는 전자파와 늘어가는 뱃살보다 덜 해롭다.

노동과 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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