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유난히도 바퀴벌레가 많은 집에 살았다. 오래된 1층의 단독주택은 우리 네 가족의 첫 보금자리가 되었다. 오랜 부모님의 맞벌이와 전세살이 끝에 마련한 집었다. 더욱이 그 집은 전세로 집주인 눈치를 보며 살던 집이라 더욱 의미가 컸다.
그 집이 싫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조그만 마당에 작은 화단이 있고 집 앞을 돌아 뒤로 가면 집 뒷문과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뒷마당에는 콘크리트로 둥글게 턱이 둘러져 있다. 그 안에는 우물과 물을 퍼올리는 손펌프가 있었다. 나중에 우물은 허물고 콘크리트로 그 자리를 메워 버렸다.
대리석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면 몇십 년은 되어 보이는 낡은 빛바랜 나무마루가 깔려있는 거실과 마주한다. 거실을 중심으로 삼면으로 큰 방과 중간방 그리고 작은방이 연결돼 있다. 작은방은 다시 다락방과 부엌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작은방 한쪽 구석에 난 미닫이문을 열고 계단을 몇 칸 내려가면 반지하 형태의 부엌이 나온다. 그리고 부엌 옆에는 화장실이 달려 있는 독특한 형태의 집이었다.
땅거미가 내리고 어둠이 찾아오면 부엌은 공포의 공간으로 변신한다. 반지하 공간의 부엌은 항상 습한 공기와 냄새로 곳곳에 곰팡이 얼룩이 벽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밤이 되면 야생 곤충 서식지로 변신한다.
"엄마~ 나 화장실..." "혼자가! 다 큰 녀석이" "무서워..."
화장실을 가려면 부엌을 지나가야 한다. 공포체험을 떠날 시간이다. 톰 소여의 모험이 기억난다. 아니 파브르 곤충기가 적절한가?! 방광의 압박을 참다못한 나는 큰 맘을 먹고 방(중간방)을 나선다. '삐걱삐걱' 밟을 때 소리가 나는 거실 마루를 지나 작은방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샤삭!"
부엌에서 원정 나온 두 마리의 척후병들이 보인다. 무시한다. 아랫배에 가중되는 수압 때문에 온몸의 신경이 그곳으로 집중된다. 빠른 속도로 방을 가로질러 부엌의 미닫이문을 소리 없이 조심히 연다. 적들이 나의 침입을 사전에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고 싶다. 지금 적진을 신속하게 돌파해서 배설의 미션만 달성하고 복귀하는 것이 급선무다.
"탁!" "띠딩디디~띵"
백열등이 몇 번을 깜빡이더니 잠에서 깨어 습지의 어둠을 밝힌다.
"샤샤삭! 샤삭! 샤삭!..."
수많은 검은 위장을 한 적군들이 한순간에 민첩하게 움직이다. 그리곤 순간 얼음 땡이 된다. 한 녀석은 많이 놀랐는지 부엌 천정 모서리에서 반대편 벽을 향해 긴급 야간비행을 실시하다 방향을 잃고 벽에 부딪치고는 폭격당한 전투기 마냥 벽을 타고 힘없이 떨어진다.
cockroachs
싱크대 개수구, 벽지, 식탁, 바닥 할 것 없이 다수의 경계병들이 활동 중이다. 간간이 꼽등이와 계절에 따라 귀뚜라미도 보인다. 위치가 파악되면 이제 이동할 시간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소리 없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가 시작된다. 까치발로 한 발 한 발소리 없이 움직이지만 그들의 레이더(더듬이)를 속일 순 없다. 한 발 샤샥, 한 발 샤삭 적들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보폭을 넓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화장실 문을 연다.
"끼익" "샤샤삭! 샤삭! 샤삭!" 다시 한번 대이동이 벌어지고 녀석들은 적진으로 숨어버린다. 그리고 난 화장실로 숨어버린다. 미션은 성공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야 한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찍었던 엄홍길 대장의 마음이 그러했을까? 정상을 찍었을 때 희열은 다시 돌아가야 할 난감함으로 바뀐다. 깊은 탄성과 함께 시원하게 내뿜으며 배설의 희열을 만끽한 후의 나와 대장님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자고로 등산보단 하산이 중요하다. 출정이 있으면 복귀를 해야 끝나는 것이다.
왔던 순서와 반대로 복귀 작전이 시작된다. 배출되었던 수분이 갈증이 되어 돌아온다. 냉장고가 몇 발짝 앞에 보인다. 영화 속에선 항상 이런 유혹이 일을 그르치며 극은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마련이다. 이 늦은 밤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니고 찍는 건 더욱 싫다. 예상치 않은 적들의 습격을 당하고 싶진 않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건조해진 식도를 달래며 복귀한다. 불을 끄고 미닫이문을 닫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다. 수년간을 야간 미션을 수행하며 살아왔다. 물론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살육전을 치르고 복귀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면 아침에 전장(부엌)에 터지고 널브러진 적들의 잔해를 치우는 일이 고달팠다. 그래도 이런 전면전은 그나마 다행이다.
한 번은 손님이 와서 내방을 내어주고 작은방에서 잠을 자는 날이었다. "우르르 쾅쾅 쾅 우르르 우르릉" "아~악! 지~진이야!"
나의 비명 소리에 온 가족이 깨어났다. 안방에 자고 있던 엄마가 작은방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작은방 불을 꼈다. 나는 방바닥에서 한쪽 귀를 부여잡고 떼굴떼굴 뒹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엉엉엉! 엄마~ 귓속에 지진이 났어!"
귀속에서 알 수 없는 진동이 뇌 속까지 울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나의 고막을 사정없이 긁고 있는 느낌이었다. 견디기 힘든 소음과 통증으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나를 무르팍에 가로 눕히시고는 귓속을 들여다보셨다. 잘 안 보이는지 손전등을 가져와 비춰본다.
"안 보이네 어쩌지? 벌레가 깊숙이 들어갔나 보다 새벽이라 병원도 문을 닫았는데..." "아아아~ 엄마 너무 아파~"
엄마는 황급히 부엌으로 가시더니 참기름 통을 들고 오셨다. 참기름을 나의 귀속으로 조금씩 부어 넣으셨다. 끈적 미끈한 것이 좋지 않은 기분과 함께 밀려들어온다. 귀속에서의 진동과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지진이 멈췄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서야 자 다시 잠들 수 있었다.
"어~휴! 살다 살다 이런 일도 있네"
며칠 뒤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의사는 알 수 없다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귀속으로 길다란 뭔가를 집어넣더니 휘젓는다. 귀속에 말라붙어 있던 작은 바퀴벌레가 으스러지고 부서진 사체 조각이 되어 끌려 나왔다.
바퀴벌레는 앞으로만 갈 수 있다고 한다. 전진밖에 모르는 것이다. 뒤에서 들어오는 손가락과 면봉을 공격을 피해 나의 고막을 뚫고 가려 발버둥 쳤을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친다. 그 사건 이후 한동안 나는 잠자리에 들 때 귀에 휴지를 쑤셔 넣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막다른 길
가끔씩 자신이 가는 길이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가도 가도 제자리인 것 같은... 그동안 익숙해져 있던 부와 권력에 눈이 멀어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전진한다. 앞만 보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발전과 성장에만 익숙해져 정체와 저성장을 견디지 못한다.
막다른 길에선 되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고치에서 나비가 탄생하듯 정체와 멈춤의 시간이 보이지 않는 성장의 시간임을 깨달아야 한다. 힘들고 위험한 시간이다. 하지만 견뎌내야만 더 큰 변화와 성장을 맞이할 수 있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이들이 많다. 가난과 실패 혹은 치욕과 누명 등으로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내던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세상과 사람을 탓하며 자신을 던져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을 알리려 한다.
you are not alone
세상과 사람은 계속 변한다. 나쁘게 될지 좋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이 잘못된 걸 알고 있는 당신이 있어야 미래는 밝게 변하는 것이다. 세상에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야 한다. 누가 볼진 알 수 없는 글이지만 이렇게 내 생각과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면서 말이다. 목숨은 버리면 순간으로 끝이지만 나의 글과 기록은 세상에 남아 기억될 수 있다. 이제 한 번쯤 뒤를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닐까?
나의 귓속으로 파고 들어온 그 녀석도 막다른 곳에서 뒤로 물러섰다면 서로가 죽고 죽이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전진만이 답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