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Sep 04. 2019

자본주의와 불륜

[옥수수와 나] 김영하

  요즘 뜨고 있는 '여행의 이유' 김영하 작가의 2012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표지를 보고 집어 들었다.

  소설은 다소 황당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옥수수로 빙의된 주인공이 닭들에게 쫓기는 망상 속에 참다못해 병원을 찾은 장면으로 시작한다. 결말에서 다시 옥수수가 등장한다. 원점회귀인가?

   주인공은 대작(소설)을 쓰기 위해 떠난 미국에서 출판사 사장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 속에서 영감을 얻고...

이상문학상 작품집

  소설을 다 읽고 나의 뇌리에 남는 건 두 가지다.
 
  도대체 옥수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소설 속에는 보편적이지 않은 남녀 간의 욕정이 빠지지 않는 것일까?

  첫 번째 의문은 한참을 고민해도 답을 얻지 못해 검색 찬스를 이용한 후에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옥수수는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다.

 며칠 전 G7 정상 회의에서 트럼프 형님에게 뒷덜미를 잡힌 아베가 미국의 옥수수 250만 톤을 소화해 주기로 약속한 사건이 화제다. 미국 선거를 앞두고 미중 무역전쟁으로 미국 내 쌓여만 가는 옥수수를 밀어내야만 하는 미션을 한방에 해결했다. 미국의 콘벨트(일본 면적보다 넓은)의 드넓은 땅에서 대규모로 생산되는 GMO 옥수수는 세계 생산량 1위이다. 미국 자본주의 기업농의 상징이다.  

미국 콘벨트

   주인공은 작가로 자본주의 출판업계(닭)의 쪼임 속에서 옥수수(노동자, 상품)로 묘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압박 속에서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때가 되면 작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작가의 숙명을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순수한 문학이 탄생할 수 있을까? 주인공은 환경의 변화와 새로운 섹스 속에서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벅찬 기분과 샘솟는 소설의 영감을 발견하고 그동안의 자신의 작품들을 쓰레기로 치부해 버린다.

   주인공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륜과 비정상적인 욕정들을 관조자로서만 지켜보며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불 아닌 불륜의 욕정이 자신에게 이런 새로운 세계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주변에서 일어났던 불륜은 결국 돌고 도는 것이었다. 자신에게도 일어날지 몰랐던... 육체의 성적 쾌락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 같다. 자신의 존재 의미가 이성과의 관계(섹스)를 통해 재발견되는 과정인 것인가?

  생활 속의 가까운 자와 은밀함은 더 이상 쾌락을 주지 않고 낯설고 새로운 자와의 은밀함 속에서 쾌락과 자신을 찾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관계는 오래될수록 깊어지기 마련이지만 이성관계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비정상의 정상화"

 소설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최근 읽은 모든 소설 속에는 남녀(혹은 남남) 간의 갈등, 특히 욕정에 관한 갈등이 빠지지 않는다. 그 욕정은 모두 사회에서 용인하는 그런 교과서적인 사랑은 없다.
  물론 갈등 없는 건전한 남녀의 욕정이 소설의 주제가 될 순 없겠지만 소설도 독자의 공감을 먹고 자라나는 문학이다. 사회 현실과 흐름을 무시한 소설을 외면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그런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남녀의 관계가 정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일까?

  겉으론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면서 자신도 그런 관계 속에 있다. 요즘 유행하는 '내로남불'이 딱 어울리는 말인듯하다.


"범죄자와 작가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어쩌면 소설은 작가의 내면에 잠재된 범죄자 심리 상태를 글로 분출시켜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현실에서 감행할 수 없는 금지된 행동과 말들을 소설이라는 가상공간 속에 밀어 넣음으로써 스트레스도 같이 그 속에 봉인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왜 그럼 다수의 욕망이 보편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일까? 사회질서를 훼손하기 때문에? 법 혹은 정의 구현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사회과 법이 인간 위에 있는 것인가? 인간의 욕정을 통제해야지만 유지되는 사회는 인간이 계속 어두운 곳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두운 곳을 들춰내는 것이 공감되는 소설의 중요한 요건이 되어가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이전엔 소설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 독서토론회에선 자주 소설을 주제로 토론을 했다. 직접적인 깨달음을 주는 비소설(교양, 철학, 에세이등)을 선호하는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회원 대부분이 여자들이었고 소설을 좋아하는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길고 긴 줄거리의 서막부터 결말까지 깨달음을 꼭꼭 숨겨두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도대체 하고자 하는 말이 뭐야?'


   짜증 나고 답답했다. 바쁜 현실 속에 기다림과 과정의 소중함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기다림의 기간은 어느 순간 "아~"하는 탄식과 공감을 가져다준다. 비소설의 책처럼 짧은 시간에 많은 깨달음을 주진 않지만 스토리와 함께 스며든 한 가지 깨달음(주제)은 영원히 지워지지 여운을 남긴다.  

   소설가는 머리가 좋다. 그 현실의 깨달음을 소설 속에서 이야기로 재현해 낸다는 것이 존경스럽다.  
사실 아직도 소설의 내용이 헷갈린다. 내가 해석한 이 소설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자본주의의 억압 속에서 찾은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자본주의에 부응하다"


규범과 욕정도 남녀처럼 애증관계인가?!
   
    김영하 작가는 자신처럼 소설가를 주인공(소재)으로 스토리를 일상 속에서 전개해나간다.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헷갈린다. 그래서 더욱 실감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가 비범하다. 자본주의 사회 속의 인간의 욕정을 잘 묘사한 소설이다.

옥수수와 나
작가의 이전글 막말이 입히는 뇌 화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