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37 (개정판)
두통과 속 쓰림이 사라졌다.
전날 장주임이 준 약을 먹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개운한 기분이다. 정말 약발이 좋은 것 같다. 도대체 뭘로 만든 약이길래? 역시 중국은 담배든 술이든 약이든 다 강하다. 대륙의 힘이 느껴진다.
어제 숙취와 두통으로 공급하지 못한 니코틴 때문에 몸에 금단 현상이 찾아온다. 베란다로 가서 중국에서 산 쭝난하이(中南海:중남해)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다. 내가 유일하게 피는 중국 담배이다. 부족한 니코틴이 급속 충전되면서 머리가 핑 돈다.
중국에서의 피웠던 첫 중국 담배의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학교 4학년 중국 교환학생 시절이었다. 4학년이 된 동기들과 후배들은 다들 취업준비에 여념이 없는 시기였다. 다들 영어점수와 스폑 쌓기에 영혼을 갈아 넣고 있었다.
"희택선배! 4학년을 중국에서 보내시려고요? 다들 토익 점수랑 자격증이라도 하나 더 따려고 난리들인데… 이제 중국을 가서 뭐 어쩌려구요? 취업안하실꺼예요?"
난 생각이 달랐다. 중문과를 나왔으면 중국어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지 하는 나만의 신념이 있었다. 간판이 중국집인데 파스타를 팔 순 없지 않은가? 그렇게 대학 생활의 마지막 일 년을 한국인의 발길이 드문 중국 깊숙한 내륙 우한(武汉:무한)이라는 도시에서 보내게 되었다.
중국 동부 해안의 여러 대도시에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중국의 유명한 대학교가 여럿 있었지만 나는 한국인이 제일 없는 곳으로 교환학생을 보내달라고 자청했다. 그냥 일년 동안 중국인으로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떠났다.
정말 그곳은 중국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학교 밖을 나가면 한국인은 커녕 외국인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국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어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그나마 표준어를 구사하는 중국친구들이 필요했다. 학교 밖의 그 지역 토박이들은 사투리에 불명확한 발음을 구사해 표준어도 아직 미숙한 나에게 너무 힘든 대화상대였다.
캠퍼스에서 만난 중국 대학생들은 투박함과 순수함이 가득했다. 학교에서도 외국인은 희귀했지만 한국인은 더 희귀했다. 당시 한류 열풍으로 그에 따른 한국인의 호감도가 다른 대도시와는 남달랐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중국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같이 온 한국 여학생들은 생존을 위해서인지 허구한날 무리지어 붙어다녔다. 그런 행동이 동족간의 유대감을 증진시킬진 몰라도 중국어 능력 증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들은 매일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한국어로 수다떨기와 중국어 수험서만 들여다보는 날들을 보냈다. 한국에서 공부할 때나 다른 것이 없다. 환경만 중국으로 바뀌었지 생활은 한국과 그대로이다. 왜 굳이 이곳 중국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한국에서 중국어 원어민 강사 수업을 듣는 것과 별반 다를바가 없다.
난 한국학생 무리들을 의식적으로 피해 다녔고, 거의 매일 중국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중국 남자애들과 모여 있으면 항상 담배를 자주 피었다. 같이 담배를 피며 어울리는 것은 그들과의 유대감을 증진하는 무언의 행동 양식이었다. 어느새 한국에서 가져와 피던 담배도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시골 도시에서 한국 담배를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만큼 힘들었다. 그들의 기호에 내 기호를 맞춰갈 수밖에 없다.
"我要上厕所给我一根烟吧 我拿过来的韩国烟都抽完了”(나 화장실 가게 담배 한 개비만 줘, 한국에서 가져온 담배 다 피워버렸네)
"韩国烟真不是个东西,欢迎加入中国香烟世界 哈哈 "(한국 담배는 정말 아니야, 중국 담배 세계로 입성한 걸 환영한다 하하)
종이각도 없는 구겨진 담배 갑 속에서 볼품없이 구부러진 정체를 알 수 없는 담배 한 개비를 건네준다. 난 항문 1cm 앞으로 밀려든 그것들의 신호에 얼른 담배를 낚아채고는 화장실로 직행했다. 당시 대학 건물 내의 화장실은 도랑형 사로 아니면 쪼그려 앉는 슬리퍼 모양의 변기 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제는 사로마다 칸막이만 있을 뿐 문이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어서면 낮은 칸박이 넘어 다른 사람이 볼일 보는 것이 다 보인다. 다행히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외국인 기숙사와 강의실이 있는 곳은 칸막이와 좌변기가 설치되어 큰 불편이 없었지만 밖에만 나가면 볼일 보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화장실의 냄새는 고약했다. 그래서 한국 여학생이 기숙사 밖에서 볼 일 보는 경우를 본적이 없다. 그래서 화장실에 갈 때는 담배는 필수 소지품이었다. 담배 냄새가 배설물 냄새를 가려주고 곤란한 포즈로 다른이들과 멀뚱히 마주보기만 할 수도 없잖은가? 어차피 내가 피지 않아도 다른 사로에서 다 피기 때문에 남이 피는 담배연기를 맡고 있느니 차라리 내가 피는 게 낫다. 처음엔 그 상황이 힘들었지만 나중엔 익숙해져서 똥을 누면서 낯선이와 서로 담배까지 나눠피며 불까지 붙여주는 경지에 도달했다.
"부디디딕! 부디딕! 아~!"
"탁! 피시시익~"
배설을 쾌락을 느끼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길게 빨아드렸다. 순간 정신이 핑 돌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헉!"
풀린 다리를 일으킬 수 없었다. 난 잠시 동안 화산처럼 쌓아올린 배설물 위에 살포시 눌러앉아있었다. 그날 공중 화장실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바가지에 물을 받아 샤워를 해야 했다.
그때 처음 중국 담배의 위력을 깨달았다. 돈 없는 중국 대학생들이 피는 싸구려 저가 담배의 성분은 도대체 무엇일까? 저들은 몸을 마비시킬 정도의 강력한 물질을 매일 몸 속으로 빨아드리고 있다. 그 날 이후 니코틴을 보충하기 위해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중국 담배를 찾아 헤매었고 다행히 몸에 마비가 오지 않으면서 가격도 적당한 몇 가지 브랜드의 담배를 찾아내었다. 그중 하나가 쭝난하이(中南海)였다.
-------
토요일 오전 담배 한 개비로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 한다. 한국이었으면 토요일도 출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일이 없이 문 닫을 날만 기다리는 회사에 직원들 잔업비까지 써가며 출근시킬 리가 만무하다.
'오늘을 뭘 하지? '
"띠링띠링"
[部长~ 您身体怎么样啊?] (부장님~ 몸은 이제 좀 괜찮으세요?)
장주임이다. 어제 그녀가 준 약 덕분에 원기도 회복했는데 그녀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에게 고맙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답의 의미로 밥을 한 끼 사주겠다고 하니 바로 콜이다. 그녀는 나에게 사적인 호감이 있는 것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그녀는 다른 한 사람을 더 데리고 가도 되냐고 묻는다. 누구냐는 질문에 나도 아는 사람이란다.
양주 시내에의 번화가 쇼핑센터 안의 컨더지(肯德基, KFC)에서 보기로 했다. 여기 중국은 맥도널드보다 KFC가 더 많아 보인다. 닭을 무지하게 먹어댄다. 이 많은 중국 인구들이 먹어대는 닭의 양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한 해에 희생되는 닭의 양이 과연 몇 마리일까? 한 해에 일인당 10마리만 먹는다고 해도 140억마리다.
KFC의 중국 발음이 특이해서 한국 사람들 사이에선 건더기라고 불린다. 뭐 닭 건더기를 먹긴 하니까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部长!您来得早啊" (부장님 빨리 오셨네요)
"是的,这不是总务担当曹婧吗?你们在一起的呀" (어~ 그래, 총무 담당 차
오찡아냐? 둘이 같이 있었구나)
"您好!部长" (예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청바지와 맨투맨 티셔츠 그리고 야구 캡 모자를 눌러쓴 차오찡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한다. 반면 장주임은 분홍색 레이스 달린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하늘 거리는 모습이 차오찡과는 상반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我们看一部电影怎么样?"(영화 한 편 어때?)
오후 3시, 밥을 먹기는 애매한 시간이다. 영화를 한 편 보자는 나의 제안에 장주임은 날듯이 기뻐하는 반면 차오찡은 표정 없는 얼굴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장주임이 차오찡의 팔을 한쪽 팔을 휘감으며 끌어당기니 못 이긴 척 따라온다.
영화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 보인다. 중국은 제 돈 주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 대부분 불법 다운로드 혹은 저가 유료 사이트를 통해 PC방이나 집에서 개봉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제목이 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들의 말로는 요즘 유행하는 영화란다. 스릴러가 가미된 중국 근대시대물이다.
우리 셋은 영화관 뒤쪽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장주임을 중앙으로 양 옆에 나와 차오찡이 앉았다. 조명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된다. 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인가? 그 지루한 광고 하나 없이 다이렉트로 영화가 상영된다. 영화의 스토리가 윤곽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하고 영화 속으로 몰입될 쯤이었다. 극장 앞 쪽에서 뽀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咦!这不是烟雾吗?火...火灾不是吗?" (헉! 저거 연기 아냐? 불... 불난 거 아냐?)
당황한 나는 '불이야~!'라고 외치려는 순간 장주임이 나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리고는 귀에 대고 속삭인다.
"部长,这个是烟气的"(부장님, 저거 담배연기예요)
"헐…"
어이가 없다. 앞쪽에 앉아있는 몇 명의 아저씨들이 담배를 피워대고 있다. 스크린 앞으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영화 속 주인공이 피우는 담배연기와 뒤섞여 4D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런데 아무도 뭐라고 하는 이가 없다. 어처구니가 없다. 중국은 참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알기 힘든 나라이다.
"那我也抽一根可以吗?"(그럼 나도 한 대 피워도 돼?)
"随便吧"(마음대로 하세요)
영화 주인공이 어찌나 담배를 맛있게 피는지 나도 담배가 당긴다. 이런 경험을 언제해 볼 수 있겠는가? 비록 몰상식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만 지금 여기가 아니면 평생 경험해 볼 수 없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어둠 속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북경과 상해에서 해 볼 수 없었던 담배 피우는 영화관을 체험한다. 이색적이다.
영화는 후반부로 흘러가면서 잔인하고 무서운 장면들이 연출되기 시작하자, 장주임은 내 팔과 차오찡의 팔을 한쪽씩 휘감고는 고개를 떨구고 실눈을 떠서 스크린을 응시한다. 장면이 잔인하고 무서울수록 내 팔을 더욱 가슴팍 깊숙이 끌어당긴다. 그때마다 느껴지는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의 온기와 감촉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영화는 혼자 봐야 기억에 남는다. 분명 혼영(혼자 영화 보는 것)이 대세가 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렇게 담배연기와 긴장 속에서 영화는 끝이 났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 속 내용을 얘기하며 물어오는 그녀의 질문에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미소만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