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가는 길
“나를 좀 이해해 달란 말이야!”
우리는 이해받길 원한다.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모습을 SNS에 드러내며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한다. 나의 가족과 나의 주변에서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까운 자들에게는 나의 내면에 가진 모습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일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둘 중 하나 아니면 둘 다 일수도 있다. 삶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역할과 책임 그리고 이해관계에 얽혀서 자신의 감정과 내면에 가진 다른 모습을 감춰야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각자 자신의 SNS를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는가는 아마도 이와 연관일 깊을 것이다. 나 또한 여러 개의 SNS을 이용해서 나의 생각을기록하고 표현한다. 서로 다른 SNS 계정은 다른 색깔과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이건 실명의 삶과 이명의 삶으로 나뉜 것과도 비슷하다. 누구나 그럴 거라 생각한다. 자신의 일상을 남기고 싶고 또한 자신의 취미, 특기 혹은 비즈니스의 기록 혹은 홍보를 위해 또 다른 계정을 이용한다.
모든 모습을 하나로 섞어서 표현하는 사람들은 순수한 사람일 것이다. 모든 자아를 통합한 것이다. 그래서 복잡하고 어지럽다. 그것이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계정은 노출되지 않으며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그건 사람들은 개성 있는 것, 정리된 체계적인 특색 있는 것을 보면서 따라 하고 벤치마킹 하기 때문이다. SNS 활용법이다. 그렇게 그들은 불특정 다수의 이해를 구하고 공감을 얻으며 인지도를 높여간다. 그리고 그것은 인기가 되고 인기는 많은 현실의 결핍들을 채워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무언가를 계속 업로드한다.
“아무도 읽을 수 없는 것을 왜 쓰는가?... 경험하면 기록하라, 기록하면 업로드하라, 업로드하면 공유하라.”
- 유발하라리 [호모데우스] 중에서 -
이제 모두가 이해받기 위해 분투한다. 나 또한 이해받는 방식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업로드하고 공유했다. 타인이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잘 포장하고 표현해서 나를 팔았다. 비록 팔리지는 않더라도. 이해받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말로 이해되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시장의 형태는 바뀔지언정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장벽이 없이 연결된 세계에서 나를 드러내야 그나마 확률이 높다. 학벌도 지위도 돈도 배경도 없다면 오로지 자신이 가진 남과 다른 무언가를 표현함으로써 승부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은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먹고 살아야만 한다. 나의 생각과 의사와 상관없이 타인을 일방적으로 이해해야 함은 당신이 누군가로부터 생계를 위해 돈을 지불받고 하는 노동을 계속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 때문일까 과거엔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했던 것 같다. 이웃들끼리도 서로 잘 알고 인사하며 옆집에 누가 사는지 시시콜콜한 것들도 묻고 따지면서 서로를 알아가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모두가 자신을 기록(텍스트, 이미지, 영상)하고 업로드하고 공유하며 어떻게든 사람들로부터 이해를 받고 인정받고 인기를 통해 타인을 굳이 이해하지 않고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살고 싶은 마음이다.
이제는 더 이상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건 과거 우리가 누군가에 종속되어 너무 일방적인 복종에 오랜 시간 길들여져 자신의 영혼이 죽어감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돈과 권력은 발언권이다.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무기처럼 사용되는 세상에 사람들은 지쳤다. 자신은 사라지고 너무 오랜 시간 자신은 누군가의 호주머니를 채워주고 인기와 명예를 위한 도구로만 사용되어 왔다. 만약 그 도구를 아끼고 인간으로서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지금의 결과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런 거 어떻게 다 신경 쓰고 어떻게 사업과 비즈니스를 하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럼 나는 묻고 싶다. 비즈니스는 모험을 전제한다. 모험이란 위험을 감수함을 의미한다. 위험은 남들보다 좀 더 빨리 가려 하고 무리한 행동을 감행할 때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써서라도 그럴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런 마인드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쓰고 버리는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을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그 누구도 누군가의 도구로 살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자신의 자녀는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기를 쓰고 공부시키고 남 밑에서 일하지 않게 하려 하면서 남의 자식은 자신의 자식의 밑에서 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신 밑에서 일하는 누군가가 당신의 자녀 밑에 자신의 자녀를 또 대대손손 밀어 넣어 주고 싶겠는가? 항상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야 한다. 왜 대한민국 젏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가? 돈 많고 지위가 높으신 분은 아이를 적게 낳을 순 있어도 안 낳는 경우를 본 적은 없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자녀가 남 밑에서 일방적으로 이해하면서 사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 아닌가?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부모의 마음은 매한가지이다. 내 자녀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이 아닌 도구로 대접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 누가 낳고 키우고 싶겠는가? 이건 과거 오랜 시간 동안 결과와 성과만을 위해 인간을 쓰고 버리는 도구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인간은 학습하는 동물이다. 한국인의 유전자에는 이제 이것들이 새겨져서 아이에게 이 유전자를 물려주기 싫은 것이다. 내가 도구로 살아온 인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고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자에게는 누구나 알아서 몸과 마음을 바쳐서 충성을 하게 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이다. 좀 적게 받고 일이 좀 힘들어도 함께 손발을 걷어 부치고 고생하며 스스로가 앞장서는 솔선 수범 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밑에 사람은 알아서 움직이는 법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한국에서 직장 생활하는 동안에 그런 자들을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기업은 보스를 양성하는 곳이지 리더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 결국 내가 내린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물론 이것은 확증편향이고 일반화의 오류이다. 이건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삶과 경험에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많은 예외의 경우가 있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산업 자본주의 시스템, 더욱이 과거 한국의 기업문화는 대부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기업에서 인간은 노동력이라는 수단이 된다. 목적이 될 수 없다. 기업은 이윤 창출이 목적이다. (장, 단기적인) 이익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이 기업이 추구 가치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기업의 다른 점
기업가는 수백 년을 이어온 그리고 앞으로 또다시 수백 년을 이어가야 할 국가를 운영하면 안 된다. 기업은 업황이 나쁘고 실적이 악화되면 폐업 소멸될 수 있다. 그럼 기업가는 다시 다른 기업을 개업하거나 다른 기업으로 옮겨가면 된다. 하지만 국가는 경영이 부실하고 실적이 악화된다고 소멸될 순 없다. 국민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국민을 저버린 왕들의 역사를 기억할 것이다. 기업은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지만 국가는 국민을 해고할 수 없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한국에서 기업가가 정치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칼은 든 자(검사)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검사는 원래 검사(檢事)이지만 우리나라의 검사는 검사(劍士)였다. 칼(무력)을 든 자들이었다.) 법이 칼이 될 수 있는 것은 법이 그들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칼을 든 자들보다 차라리 AI 검사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더 낳을 법도 하다. 물론 그 알고리즘을 또 누가 만드느냐의 문제가 논란이 될 수도 있겠다. 아직은 인간은 그래도 공정한 판사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싶다. 이것이 무너지면 사회의 묶어두고 있던 신뢰는 한없이 무너지게 된다. 법은 최소한이다.
이해받는 것과 이해하는 것 사이
사람들은 이렇게 누군가의 이해를 강요받으며 살아온 삶이 어떻게 피폐해져 가는지 여실히 경험했다. 그래서 모두가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이해받고자 하는 방식을 선택해서 살아가는 듯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 또한 인생의 대부분을 누군가를 억지로 이해하며 살아온 삶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일까? 이렇게 글을 쓰는 삶을 사는 것은 이제는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나를 이해받고자 하는 마음이 커져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틀리지 않다.
처음 써내려 갔던 대부분의 글들은 세상을 향한 비난과 나에 대한 자책 그리고 혐오와 같은 것들이었다. 어쩔 수 없다. 글은 대부분 그렇게 시작한다. 그것들을 쏟아내고 나면 이제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원래부터 있었는데 앞의 것들 때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것들은 이제 세상을 좀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하는 것들이다. 자신의 눈에 씌워졌던 색안경과 프레임이 벗겨지면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은 물론 다른 경험들이 글쓰기와 병행되면서 벌어진다. 다른 경험은 기존의 익숙함이 아닌 것들이다. 독서나 관계나 떠남이나 그런 것들 말이다.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면서 뚜렷해진다. 내가 지금 세상(사회와 국가)에 대한 사람과 관계에 대한 신앙과 종교에 대한 이상과 현실에 대한 글들이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자신 안에서 시작해 타인으로 그리고 사회와 공동체로 향해가야 한다. 그것이 작가로서 성장하는 방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시다시피 과거 역사 속에 유명한 작가들은 소설가와 시인인 동시에 철학자이고 사회학자이며 사상가들이었다. 듣고 말하는 것은 삶을 사는 것이고 읽고 쓰는 것은 삶을 바로 보는 것이다. 글은 한 개인이 세상에 바라보는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글의 시작은 자신을 이해받으려는 행위로 시작했지만 결국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계속 끝까지 쓴다면 말이다. 나는 지금 어쩌면 그 사이 어디쯤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해받는 자과 이해하는 자 사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