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예술은 슬픔이다

[세바시] 정유미 감독 강연 후기

by 글짓는 목수

"그건 아마도 그걸 들여다보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닐까요? 제가 그랬고 지금도 그런 것처럼요..."


정유미 감독이 말했다.


"사실 전 감독님의 애니메이션을 이 강연장에 와서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인간의 어둡고 침울한 곳을 깊이 들여다보는 감독님의 내면에 있는 아픔과 슬픔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문득 '행복한 가정은 누구나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말이 떠올랐어요. 저는 예술가는 이런 개인의 불행을 들여다 보고 세상에 표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일반사람들과 예술가의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감독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쭙고 싶은 것은 감독님은 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왜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건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건 내가 정유미 감독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이다. 비록 너무 많은 사람들의 질문 공세에 나의 질문은 현실에서 재현되지 않았지만 그 아쉬움을 상상에 담아 산문 후기를 쓴다. 이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그럼 이건 에세이인가? 소설인가? 내가 만약 이 대화를 실사 사진과 함께 업로드하면 이건 진실을 왜곡한 것이고 나는 유언비어 유포죄가 성립될 수도 있다. 왜냐 그건 그녀는 공인이고 공인은 명성과 명예라는 것에 의존해서 현실의 삶을 지탱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산문의 허구를 이용한다. 픽션도 논픽션도 아닌 자유롭지만 모호한 글을 좋아한다. 그건 내 삶이 그러하기 때문일까?


산문, 모호하지만 자유롭다.


이 글은 산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산문은 문학이지만 아주 넓은 범주를 가지기에 이것도 저것도 다 섞어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소설가들은 기억과 상상의 조합에서 기억의 비중이 적지 않을 경우 산문이라는 모호하고 광범위한 분야로 책을 출간한다. 산문집이다. 산문은 그만큼 형식과 내용에 구애받지 않기에 자유롭다.

페르난두 페소아 (1888~1935)

"이상적인 문명세계에서는 산문이 유일한 예술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도 언젠간 이런 글들을 모아서 산문집을 내고 싶다. 페르난두 페소아가 산문시를 즐겨 썼던 마음을 공감한다. 산문은 산만한 자신의 머릿속을 정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한 가지에 오랜 시간 몰두하며 전개해 나가는 장편(소설)은 장기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현실과 분리되는 시간이 길다. 반면 산문시는 일상 속에서 떠오르는 영감들을 그때 그때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때문에 수시로 떠오를 때마다 빠져들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페소아는 직장인으로 살면서 전업 작가들처럼 장시간의 현실과 괴리되어 긴 시간의 집중력으로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오랜 시간 일과 글을 병행하며 장편의 집필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장편을 쓴다는 것은 현실과 차단된 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장편을 쓸 때 해외로 나가거나 격리되어 쓰려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현실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직장인은 그것이 쉽지 않다. 글과 삶을 동시에 산다는 것은 이상과 현실을 계속 오고 가는 것이다.


앞에서 내가 작가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은 이것과 연결된다. 우리는 현실의 삶 속에서 느끼고 가지게 되는 아픔과 슬픔을 자주 외면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건 우리가 홀로 깊이 그것들을 대면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유미 감독은 세상과 차단되어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만의 애니메이션 예술로 승화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나는 질문의 기회를 얻지 못해 그것을 직접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그녀의 강연은 시종일관 개인의 아픔과 슬픔을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바시 강연 정유미 감독 (부산)

“연필로 쓰면 쉽게 지울 수도 있잖아요.”


청중이 던진 질문에 그녀가 답했다. 상처와 아픔을 그려내야 하는 그녀의 도구는 연필이었다.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노래를 기억한다. 쓰다가 틀리면 지울 수 있는 것이 연필이다. 이건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리다가 아니면 지우면 된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지울 수가 없다. 삶은 상처와 슬픔을 해마 속에 각인시키면서 그 기억의 총량을 늘려간다. 그것들이 삶을 점점 더 옥죄어 오는 것이 삶이다. 이건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쓰인 글과 유화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일 것이다.

[사람은 연필로 쓰세요]_전영록

“흑백의 느낌을 좋아해요”


그녀는 마치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복장처럼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검고 긴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얼굴과 대본카드만 빼고 올블랙의 느낌이 마치 사신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의 그림과 그녀의 패션은 일관되다. 그녀는 어쩌면 흑백으로 나뉜 세상을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연필로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채로운 색깔이 사라지고 흑과 백으로 표현된 세상은 현혹됨이 없다. 그래서 더 뚜렷하게 세상을 볼 수 있다. 형형색색 한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세상의 악과 고통은 항상 이런 형형색색 유혹 뒤에 숨어 있음을 모르지 않다.


악은 흉하고 무섭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건 하수 중에 하수이다. 최고의 악은 위선이다. 선을 가장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때문에 삶이 상처받고 슬픔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과 멀어져 고립되고 스스로를 치유해야 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예술은 바로 상처와 슬픔을 치유하고 세상으로 다시 거듭 나오는 과정인 것이다. 정유미 감독은 그 과정이 아주 힘들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도 그 과정은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삶은 이런 고통과 함께 하는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그녀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고통이 없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스스로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다른 모든 사람 들고 그것을 보고 잠시나마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들여다보게 하려 함이리라. 며칠 전 김금희 작가와의 북토크에서도 확인했지만 문학도 예술도 모두 개인이 가진 깊은 슬픔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금희 작가 북토크]

우리의 현실의 삶은 우리를 잠시도 가만두지 않는다. 항상 이성적으로 혹은 계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자칫 한 눈 팔다 코 베어가는 세상이 아니던가. 각종 신종 사기와 보이스 피싱, 묻지 마 범죄, 가스라이팅 등등 냉정하고 치밀한 계산과 판단력을 무장하고 있지 않으면 나의 재산과 신체에 피해를 입게 된다. 삶은 전쟁터이다. 우리가 손자병법서를 읽는 이유 아니던가? 하지만 이런 냉혹한 머리와 마음은 영혼이 숨 쉴 곳을 내어주지 않는다. 인간은 육체만 사는 것이 아니다. 영혼이라는 다른 동물들이 가지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가. 영혼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상처가 육체를 멸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유일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물이다.


육체의 상처는 약을 마르고 병원에 가서 전문의의 치료를 받으면 회복되지만 영혼의 상처에는 약이 없다. 이건 스스로가 치유해야 한다. 그 방법도 스스로가 찾아야만 한다. 그것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심리상담과 고해성사를 통해 또 다른 인간에게 의지해서 찾아가려 한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다. 그들도 답을 알려줄 수 없다. 그들은 그저 들어주는 자들이지 우리에게 각자의 해답을 주는 자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직업으로서 우리를 상대하는 방법에 능한 것이지 그들이 우리의 상처에 공감하고 함께 그것을 나눠가질 수는 없다. 그건 심리 상담사와 신부님과의 개인적인 교감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결국 또 사람으로 치유하려다 또 다른 상처만 남기는 꼴이 될 수 있다.

세바시


예술은 슬픔이고 또한 치유이다.


우리가 예술을 접하는 이유는 이런 상처가 끄집어내는 슬픔을 마주 보기 위함이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슬픔을 읽고 보고 듣는 과정이 그것들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인 것이다. 일종의 도피라고 볼 수 있다. 감상자는 보면서 도피하고 예술가는 하면서 도피한다. 도피하는 자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이런 도피처가 없이는 견딜 수 없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예술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술은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우리가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삶은 영혼이 잠시 도피할 곳이 필요하다. 예술이 그런 곳이다. 예술을 보고 느끼며 울고 웃으면서 치유하고 다시 현실의 삶으로 돌아와서 다시 상처받고 치유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것만이 스스로 삶을 끝내지 않고 주어진 삶을 살다 가는 인간의 삶이다. 이 삶은 무한 반복한다. 예술도 그러하다. 그 형태와 모습만 바뀔 뿐 담고 있는 본질은 변함없이...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이 삶, 지금 그리고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너는 다시 한번, 그리고 수없이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아무것도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keyword
이전 24화남녀가 멀어지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