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로스와 필리아 그리고 아가페에 관하여...
당신은 사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남녀 간의 사랑을 가장 많이 떠올리지 않을까? 그건 아마도 우리가 접하는 대중매체와 각종 문화예술 작품 속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것이 바로 이 남녀 간의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애로스(Eros)다. 애로스는 성적인(육체적) 사랑이다. 지금 인간 세상은 에로티시즘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에로스 말고 또 다른 성격의 두 가지 사랑이 있다. 필리아(Philia)와 아가페(Agape)이다.
이 세 가지의 사랑이 단계별로 올라가고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사랑은 비로소 온전해진다.
사랑의 시작과 끝 ㅡ 아가페(Agapē)
사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느끼는 사랑은 아가페이다. 아가페는 부모의 자녀를 향한 사랑이다. 그중에서도 모성애가 그것에 가장 가깝다. 어머니는 자신의 몸에서 분리된 아이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며 보살핀다. 이건 훈련된 것도 아니고 교육받은 것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물론 모든 어머니가 아가페적인 사랑을 베풀지는 않는다. 그건 그런 아가페적인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때문에 어린아이 시절 부모의 아가페적인 사랑은 아주 중요하다. 이건 한 인간이 나중에 다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의 결핍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개선할 수 있다. 인간은 그런 과정을 겪으며 더욱 성장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아가페는 모성애이면서 또한 인류애의 성격을 띤다. 이건 예수와 부처의 사랑과도 같다. 세상 만물과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의 시작은 바로 모성애에서 시작한다. 사랑받은 자가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일 것이다.
열정적인 사랑 ㅡ 에로스(Eros)
에로스, 가장 익숙한 사랑이다. 다른 말로 육체적 사랑이다. 남녀 사랑의 끌림은 정신적으로 다가오지만 육체적인 결합으로 완성하려 한다. 다른 사랑과 가장 다른 점이다. 다른 사랑도 정신과 육체가 함께 작동하지만 그 형태가 다르다. 아가페와 필리아는 헌신이나 배려의 형태로 나의 노동력과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지만 남녀의 사랑은 육체적인 결합을 통해 둘 만이 느낄 수 있는 쾌락을 공유한다. 그래서 더 강렬하고 중독적이며 계속 찾게 된다. 애로스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이다.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암수로 나뉜 유성생식 동물은 이 끌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모의 사랑(모성애, 아가페)으로 자라난 성인 남녀는 이제 또 이성에 눈을 뜨게 된다. 아가페적인 모성애를 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 안에 채워진 사랑을 다른 이성에게 전달한다. 반면 모성애의 결핍을 가지고 자라난 사람은 이성의 사랑으로 그 결핍을 채우려 한다. 모성애는 이성애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
적지 않은 남녀가 어린 시절의 배운(무의식에서) 사랑을 이성의 상대를 통해 실현한다. 이 과정에서 남녀는 더 완전한 사랑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미움과 고통으로 점철된 사랑의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남녀의 정신적 성장은 언제나 육체적 성장보다 느리기 때문에 성숙하지 않은 정신이 육체적 끌림에 처참하게 끌려 다니게 마련이다. 미숙한 정신은 육체적 결합 이후에 서서히 드러나고 서로를 옮아 매고 서로를 고통스럽게 한다. 수많은 연인과 부부들이 이 때문에 고통받고 서로를 미워하며 살아간다.
사랑과 증오 ㅡ 애증(愛憎)
남녀의 사랑과 미움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붙어있는 듯하다. 남녀는 서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미움은 용서를 통해서만 사라지고 다시 사랑이 회복될 수 있지만 우리는 용서에 그리 관대하지 않다. 상대가 상처를 주면 되갚아 줘야 한다는 공평의 원칙을 먼저 앞세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언제나 이 공평의 원칙을 남용하고 오용 함으로써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공평과 공정을 헷갈린다. 공평은 상대의 형편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존재가 같은 조건과 상황에 있지 않다. 그럼에도 모든 이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불공평임을 알지 못한다. 장애인과 일반인이 같이 올림픽 경기에서 겨루는 것과 같다. 공정은 각자의 형편과 상황을 고려한 판단이다. 우리는 남녀는 공평해야 한다는 말 밖에 모른다. 남녀는 서로를 공정하게 대우할 수 있는 태도를 훈련해야 한다. 애로스는 이런 정신적인 미성숙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를 가진다.
태초에 카오스에서 대지(가이아)와 지하세계(타르타로스)가 만들어지고 에로스가 탄생했다. 혼돈에서 세상이 만들어지고 에로스가 다시 세상을 혼돈으로 만들어 가는 것 같지 않은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또 다른 신인 애로스(큐피드)도 장난처럼 사랑의 화살을 마구 쏘아대면서 갖가지 치정 문제를 일으킨다. 애로스는 문제의 시작이다. 사랑의 달콤함은 증오의 쓰디쓴 이면을 가진다. 신들의 세계도 사랑으로 인한 질투와 미움으로 갖은 암투와 전쟁들이 발생한다. 애로스의 사랑은 아름답고 열정적이지만 너무 뜨거우면 불화를 일으킨다.
냉철한 (지혜의) 사랑 ㅡ 필리아(Philia)
사랑이 지혜로울 수 있을까?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에 지혜가 필요한 법이다. 때문에 사랑(Philia)과 지혜(Sophy)가 합쳐져서 철학(Philosophy)이 되었다. 우리가 철학을 하는 이유는 지혜롭게 사랑을 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육체적 끌림만으로는 완전할 수 없다.
뜨겁게 달아오르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은 우주의 법칙(열역학 제2법칙)이다. 나에게 있던 열정이 다른 이에게 전도되고 나는 식어갈 수밖에 없다. 그럼 다시 데울 수 있어야 한다. 그 방법은 아마도 지혜의 영역이지 않을까?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해 그 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동했을 뿐이다. 서로 그 에너지(열정)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열정이 균형을 이루려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정이 사랑처럼 뜨겁진 않아도 오래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우애(友愛, 친구 간의 애정)는 잔잔하게 오래간다. 애정은 뜨거웠던 만큼 금세 식어버린다. 나는 그래서 이 남녀의 애정이 우애와 같이 변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구 간의 우정이 지속되는 방식은 무엇인가? 오래되어도 어색함이 없는 친구가 있다. 물론 오래된 친구가 어색함은 없더라도 현재의 공감과 이해가 없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서로가 오랜 시간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 각자의 가치관과 생각의 괴리가 만들어 낸 거리감이다. 하지만 오래된 친구는 만나도 반갑다. 그건 어린 시절 혹은 과거의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감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다.
어린 시절은 이해와 목적을 따지지 않고 그냥 함께 있을 수 있었기에 추억하는 것이 즐겁다. 다만 그런 어린 시절의 우애가 커서까지 이어지려면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위한 교류가 필요하다. 그 교류는 배움을 통해 함께 성장하고 같은 목표나 가치관을 공유할 때 가능해진다. 그럼 그 우정은 추억(과거)도 지향점(미래)도 같기에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다.
과거 예수와 부처의 제자들이 서로의 과거 살아온 삶과 가치관이 달랐어도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모두가 같은 방향의 깨달음과 진리를 추구하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만약 남녀 애정관계가 이런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면 둘 사이에는 불신과 미움이 끼어들 틈이 없을 것이다.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가 되면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난파하지 않고 함께 끝까지 삶의 여정을 함께 하기 위해서 말이다.
서로가 추구하는 지향점과 방향이 같다. 그리고 그것이 돈이나 권력 같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아가페 같은 사랑의 실천이라면 (사회와 자신과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한) 둘의 사랑은 모성애와 이성애 그리고 인류애가 모두 연결된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 아닐까? 남녀가 세상에 태어나 이 세 가지의 사랑을 모두 실천하고 떠나는 것이 어쩌면 태초에 남녀의 불화를 종식시키고 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고린도전서 13:13, 개역개정] -
사랑만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 세상에는 세 가지의 사랑이 존재하고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경험하고 실천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사랑 어렵다. 어렵기에 고귀한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그건 애로스인가 필리아인가 아니면 아가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