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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은 간절함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크 - 두 번째 -

by 글짓는 목수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진다."

- 빅터 프랭크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에서 -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싫어한다. 일도 관계도 감정도 확실했으면 한다. 그건 모든 일과 관계와 감정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계획과 약속과 분석을 통해 일과 관계와 감정을 알아내려고 한다. 어쩌면 인류의 발전은 모든 불확실함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해 나가려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불확실함이 사라져 갈수록 인간에겐 간절함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겐 그토록 간절한 것이 없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온몸이 전율하며 숨이 벅차오를 정도로 자율신경계를 교란시키는 불확실함을 느낄 일이 없다. 수용소에서 언제 어떻게 가스실로 끌려갈지 모르는 극도도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그 불확실과 불안을 이겨낼 무언가가 필요해진다. 그건 간절함이다. 삶을 향한 간절함은 소망이 있어야만 가능해진다. 그 소망은 꿈처럼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저자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피어난 간절함이 소망을 품은 기록으로 남아 수많은 이들에게 그 간절함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독서 모임에서 선정된 책이었다. 7년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호주로 떠나기 전 모교의 대학 도서관에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썼던 독후감[시련 속에서 얻은 삶의 의미]을 다시 읽어보았다. 감회가 새롭다. 7년이 흐르고 다시 읽게 된 책은 또 새롭다. 그동안의 삶이 나를 변화시킨 탓일까? 그때 보았던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책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한다. 그 변화는 책이 알려주었지만 책은 변한 게 없고 내가 변한 탓이다. 그래서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은 나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만약 그 당시에 당신이 독후감을 적어놓았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없다면 그 느낌만 가질 뿐 정확히 그 다른 것이 어떤 것인지 파악하긴 어려울 것이다.

[28년 후]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지, 반드시 죽는다는 걸 기억해.”

“Memento Mori, it means remember death. Remember you must die”


- 영화 [28년 후] 중에서 -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일이 전혀 없다. 우리는 일상에서 죽음의 공포와 낯선 환경에서 겪을 수 있는 감정변화와 행동 변화를 경험할 수 없다. 책을 읽기 전 한 지인의 추천을 통해 보게 된 영화가 이 책을 더 깊이 있게 읽게 해 주었다.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오염된 지구 28년 후 진화한 좀비들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는 죽음과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눈앞에 생과 사가 끊임없이 오고 가는 상황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소소한 웃음과 함께 웃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옆에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내일 당장 내가 혹은 옆에 있는 사랑하는 이가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현재 마주 보고 웃을 수 있는 것이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라! [28년 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 빅터 프랭크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에서 -


저자는 수용소에서 아내와 분리되어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아내가 살아있을 거라는 소망이 깃든 믿음으로 고통을 견뎌낸다. 사랑은 보이지 않아도 힘(에너지)을 가진다.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이 믿음을 지키고 소망을 품게 하는 것이다.


나 또한 낯선 땅에 낯선이 들 속에서 낯선 일을 겪으며 무언가 필요했던 것 같다. 불확실한 환경은 확실한 믿음과 소망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믿음과 소망은 글을 쓰면서 생겨났던 모양이었다. 수용소에 사람들도 수용소를 나갔을 때를 상상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따뜻하고 맛난 음식을 배 터지게 먹는 상상을 한다. 나도 매일 새벽 소설을 쓰며 그 이야기 속에서 나의 소망을 펼쳤던 것 같다. 그 이야기 속에는 사랑도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면서 나중에 내가 소설가가 되는 꿈도 꾸기 시작했다. 그런 믿음이 계속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모두 생겨났다. 물론 저자가 겪은 수용소의 환경과는 비할 바가 못되겠지만 이전과는 다른 낯선 환경과 고립감이 만들어낸 변화였다.


익숙함이라는 권태


우리는 이런 낯선 환경과 고립감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나 익숙한 곳과 익숙한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편안함이 지루함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렇다고 굳이 오지로 가서 고립감을 경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역할과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이 누리고 가진 것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역할과 책임을 수행해야 하고 그 환경을 벗어나긴 더욱 어려워진다.


그 속에서 일상의 익숙함과 권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여행을 떠나거나 그런 세상을 간접 경험하는 방법 밖에 없다. 매일 여행을 갈 수는 없다. 그럼 간접적으로 그것을 경험해야 함을 의미하다. 내가 계속 읽는 이유이다. 내가 과거 익숙함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을 경험하고 다시 익숙함으로 돌아와서도 그때의 간절함을 잊지 않으려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생동감을 계속 불어넣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끊임없이 글을 쓰며 상기하고 또 상기하면서 나와 타인과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려 한다. 그럼 현재의 나와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이야기(문학)의 힘


문학의 힘은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하고 떠올리지 못하는 죽음과 사랑 그리고 낯선 무언가를 계속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 내 안에 욕심과 분노와 이기심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은 어떻게 느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 빅터 프랭크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에서 -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이뤄내고 있지만 그 성취에 취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그런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왜냐 세상은 인간의 욕망을 필요하고 그 욕망의 연료를 태우며 돌아가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태워도 태워도 계속 태워야 하는 욕망의 연료로는 구원되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태우지 않아도 되는 스스로 온기를 품는 사랑으로만 구원될 수 있다.

책(죽음의 수용소에서)과 영화(28년 후)는 모두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이 식어버린 인간들이 만든 세상은 폭력과 분노의 바이러스만이 만연할 뿐이라고.


우리는 누군가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이름을 드높인 영웅들만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그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죽은 이의 숫자만큼 그 영웅의 이름만 드높여질 뿐이다. 그들이 사랑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우크라이나 vs 러시아, 이란 vs 이스라엘 전쟁

불확실은 간절함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 또한 불확실한 것이지만 간절한 것이다. 사랑이 식으면 벌어지는 일과 사랑이 없으면 샘솟는 분노와 증오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확실한 것만 추구하고 확실하게 얻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것만 바라며 살아가려 한다. 그건 반대로 말하면 당신이 간절함을 원치 않음이고 그것을 잊고 살게 만드는 것이다.


간절하지 않다면 그건 사랑인가? 그때는 사랑이었고 지금은 사랑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누가 지금 편안하고 확실하게 사랑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고 말한다면 28일 후, 28주 후, 28년 뒤에도 그런지 기다리고 지켜보라.


그때도 그렇다면 당신은 항상 간절했던 것이다.

그럼 간절함은 어디서 오는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 독서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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