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변덕스럽고 신중하지 못하며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를 끝까지 온몸을 바쳐 사랑하고 더 나아가 그 여자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도,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맹목적으로 돈과 출세를 추구하던 시대에 바보처럼 순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개츠비는 위대하다.”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열린책들 (한애경 역자) 해설 중에서 -
개츠비가 위대한 것은 사랑을 향한 순수함을 끝까지 간직했다는 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떤 남자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조금만 아쉬운 소리를 해도 그냥 튕겨나간다. 너 보다 내가 더 소중한 시대 아니던가? 세상에 널린 것이 남자고 또한 여자이다. 내가 왜 한 여자와 한 남자에게 매달려야 하는가? 그 시간과 노력이 가져다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제 누구나 안다 그런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의 결론은 비극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그 영혼이 너무도 순수하기 때문이다. 부와 향락에 취해버린 도시의 현대인들은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개츠비는 위대해졌다.
우리는 자극적이고 다양한 유혹과 관심거리 속에 살아간다. 이 이성(異性)이 눈길을 끌다가도 더 매혹적인 저 이성이 나타나서 그 관심을 또다시 그곳으로 옮겨버린다. 사실 이 유혹은 성적 자극임에도 우리의 본성은 이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유전자가 설계되었다. 유전자는 건강한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지 당신이 그 상대와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당신의 정자 속에 유전자와 그녀의 난자 속의 유전자가 만나서 다음 생에도 살아가길 바라는 유전자의 생존 본능이다. 유전자가 합쳐지고 태어나면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왜냐? 생명은 고귀하고 소중하며 또한 국가와 사회 귀중한 자산이며 법적으로 보호를 받게 된다. 이건 생명을 탄생시킨 부모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자녀는 부모와 종속관계(본능적 피양육자)이면서 또한 별개의 독립적인(법적인 사회구성원) 존재이다. 모순적인 관계이다. 국가와 사회는 이런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시스템을 혼합적으로 이용해서 국가와 사회를 유지 존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뭔가 한쪽이 고장 난 듯하다.
그 고장의 원인은 아마도 남녀의 순수한 사랑을 사라지게 만든 때문 아닐까? 소설은 현대 물질자본주의의 성공에 취하고 부귀영화에 취해버린 사랑은 더 이상 순수하고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남녀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순수한 사랑은 소설처럼 강력하고 위대하지만 이제 그 누구도 그토록 강력하고 위대하게 살고 싶지 않다. 너무 강렬하고 순수한 감정은 이 시대를 살아가기엔 너무 위험하다.
‘사랑이 밥 먹여 주지 않는다’
이런 말이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웃긴 사실은 밥 좀 먹고살만하면 사랑 타령이 시작된다는 것 또한 인간이다. 이건 생존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생기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 생존 욕구는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상대적이다. 배 굶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없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뭘 먹고 뭘 보고 뭘 누리는지는 모두가 다르다. 그 상대적 간극이 크다는 것이 생존에 위협이 된다. 한 개인이 뒤쳐진다고 느끼게 만드는 환경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협한다. 닥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안겨주고 누군가의 성공과 승진과 출세 소식에 자신을 채찍질하며 기를 쓰고 일하고 올라가려 한다. 무한경쟁사회의 시스템이다.
성공과 부귀를 향한 어긋난 사랑
1920년대 세계 1차 대전으로 유럽이 쑥대밭이 될 때 미국은 최대 호황기를 누렸다. 전쟁은 누군가의 피와 눈물을 쏟아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이들에겐 부와 욕망을 채워준다. [위대한 개츠비]는 20세기초 미국의 호황시기 때 벌어지는 물질주의 사랑을 아주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그 시대의 젊은 남녀의 욕망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 가운데에서 순수한 사랑으로 여자의 욕망을 채워주고 그 사랑을 얻으려는 순수하게 어리석은 한 남자의 모습을 위대하다고 역설한다.
그것이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희소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가진 것이 많으면 더 많은 식욕과 성욕과 권력욕을 채우려 하기 마련이지만 개츠비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것들을 이용한 것뿐이다. 그는 사람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랑을 품고 있는 상대이다. 이것 만큼 고귀한 것이 없다. 모두가 식욕과 성욕과 권력욕이라는 욕망(목적) 달성을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필수적인 시대에 영리한 바보인 개츠비는 아주 흥미롭고 매력적인 캐릭터일 수밖에 없다. 화자이자 필자로 나오는 닉은 그런 개츠비의 모습을 관찰하며 그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써 나간다. 소설 속에 소설이 들어 있다.
순수한 사랑 – 오르페우스
스콧 피츠 제럴드는 이 소설로 '문학계의 오르페우스'라는 별칭을 얻었다. 죽음으로 지하세계에 빠진 연인을 구하려는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 몇 없는 일편단심 로맨티스트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페르난두 페소아가 출판사를 만들고 '오르페우'라는 문학잡지를 창간한 것도 이 오르페우스의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었기 때문 아닐까? 물론 오르페우스와 그의 연인 에우리디케의 사랑은 비극이다. 언제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비극적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과거의 첫사랑이 떠올랐다. 소설 속 장면들이 편도체를 자극하며 너무 오래되어 흐릿해진 기억들을 해마에서 끄집어 내었다. 그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전전두엽에 재생되고 있었다. 이 기억은 추억이고 또한 상처이다. 옛사랑은 언제나 기쁨과 아픔을 함께 품고 있다.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고 또한 이뤄지지 않았기에 기억된다. 이 또한 비극이다. 현실에서 이뤄진 사랑, 즉 결혼처럼 함께 현실의 삶을 함께 하는 것은 더 이상 추억(상상)되지 않는다. 만약 현실의 삶을 함께한 자가 추억되려면 보통 그 상대가 사라지고(죽음) 나면 가능해진다. 그래서 사랑은 소유되면 사랑하지 못하고 소유되지 못하면 괴로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 때문에 기쁘고 또한 슬프다.
“난 네가 좀 더 좋은 대학을 다니고 좀 더 좋은 신앙을 가졌으면 좋겠어”
대한민국은 혈연과 지연이 없다면 학연이라도 가져야만 출세를 할 수 있는 사회였다. 남자의 출세는 여자의 삶을 바꿔준다. 여자는 가난과 힘든 자신의 상황을 남자를 통해 벗어나고자 했고 아름다운 젊음을 담은 매혹적인 모습으로 남자를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사랑의 힘은 강력하다. 'The power of love'라는 노래 가사도 있지 않은가? 테스토스테론이 과도하게 분출되는 젊은 남자의 눈에 보이는 사랑스러운 여자의 모습은 하늘에 별만 빼고 다 가져다줄 수 있을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마련이다. 그렇게 혈기 왕성한 남자는 여자에게 이용당하고 만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면 없던 용기와 자신감이 생겨난다. 나는 사랑의 감정이 미움으로 바뀌는 감정을 느꼈다. 아마 나는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여느 남자와는 달랐던 모양이었다. 사랑과 물질은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임에도 사랑의 감정이 물질에 의해서 지배되고 생성소멸 된다는 것을 순수하던 청년시절에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아직 사회에 편입되지 않은 캠퍼스 울타리 안은 그 순수를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였다. 감정을 얘기하는데 상대는 감정이 아닌 다른 것을 그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아마 그 첫사랑의 기억이 이후에 나의 삶에 아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생물학적 수컷과 사회학적 수컷
그때부터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집안 사정으로 재수나 편입을 생각할 순 없었지만 학사 경고를 먹던 내가 성적 장학금을 타게 된 건 순전히 그녀에 대한 순수한 감정이 배신당한 데서 생겨난 미움과 설움이 만든 힘이었다. 사랑의 힘은 그 반대의 힘도 지니고 있다. 방향이 다를 뿐이다. 이후 그녀가 일깨워준 사회적 성공 공식을 철칙으로 여기며 살아간 것 같다. 취업을 하고 이직과 승진에 목매어 했다. 그 과정이 나의 영혼이 메말라 가는 과정인 것을 몰랐다. 내 안에 또 다른 나는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니 나라고 다를게 뭔가 세상은 남자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돈 못 벌고 명함 없는 남자가 설 자리는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모두가 비슷한 생각과 똑같은 패턴으로 성공을 향해서만 달려간다. 마치 1~100위까지 순위가 매겨지는 마라톤 경주 같다. 참고 견디고 최상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달려야만 한다. 멈추거나 넘어지면 끝이다. 다시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더 힘들다. 왜 모두가 똑같은 코스에서 달려야 하는 순위가 정해지는 선수가 되어야만 했을까? 그건 수컷으로 태어나 일생 동안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두 가지 미션 때문이다. 유전자를 남겨야 하는 본성(생물학적)과 세상에서 남자로서 인간 대접(사회학적)을 받기 위해서였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쉬우니라.”
- [마태복음] 19장 24절 -
남자는 모두가 천편일률적인 모습으로 변해간다. 부와 명예와 사랑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정해진 길 위에서만 달린다. 하지만 물질을 통해 얻어낸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늦게 깨닫게 된다. 사랑은 물질과 부귀 위에서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는 진리를 알지 못했다. 사랑은 간절함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물질과 권력에 취하면 그 간절했던 마음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언제 어디서든 취할 수 있는 것 또한 물질적 사랑이다. 육체와 약물이라는 물질이 주는 쾌락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이다. 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을 연기해야 한다. 현대의 남녀는 가면을 쓰고 모두가 연기를 한다. 그건 당신의 물질과 권력을 이용하고 누리고자 하는 페르소나를 연기하는 이성일뿐이다. 진실된 사랑은 서로의 가면을 벗고 그 벗은 모습을 위로하고 품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들의 부정직이란 그리 심하게 비난할 일이 못 된다.”
- 스콧피츠 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
나의 옛 첫사랑도 그렇게 떠나갔다. 서울의 표준말을 쓰는 교양 있어 보이고 신앙심 깊은 대기업의 명함을 가진 남자였다. 그녀는 서울로 상경해 강남역에 작은 무역회사를 다니면서 월세의 반지하 단칸방에 살면서 일 년 만에 경상도 사투리를 깔끔하게 지워버리고 서울여자로 변신해 있었다. 출신까지 속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야~ 사투리 좀 작작 써, 사람들 본다”
“뭐가 어때서, 경상도 남자가 경상도 사투리 쓰는 게 뭐가 잘못됐는데?”
졸업 후 서울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내가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경상도 사투리에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살며 지방대 출신의 나는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고 사랑했지만 사랑은 잘 알고 사랑한다고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세상의 이치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것을 너무도 늦게 깨달은 탓에 이후 험난한 삶이 너무 오래 지속되더라. 그 험난함이란 것이 그때의 순수함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소설 속 개츠비와는 반대의 경우이다. 자신과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야 하는 삶을 이성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 남자의 영혼이 사라지는 건 한 여자가 간절히 원했던 것이었다. 남자는 물질에 영혼을 팔고 여자는 영혼을 그 물질로 채운다. 하지만 물질은 영혼을 채울 수 없는 법이다. 채우고 채워도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자는 둘 다를 원하지만 그건 욕심이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 인간은 항상 누리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는 것만 그리워하고 후회하며 살아간다.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의 입술이 닿자 그녀는 그를 위해 꽃처럼 피어났고, 상상하던 일은 완벽한 현실이 되었다.”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
개츠비는 그 순수한 사랑의 힘을 간직하고 돈과 부귀를 수단으로 이용해서 데이지(사랑)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나는 반대였던 것 같다. 사랑을 얻고자 쫓았던 성공과 물질을 향한 열정은 결국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더라. 그리고 이건 아마도 현대 남성이 겪는 보편적인 현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이다. 돈과 물질이 불어나면 그만큼 유혹과 자극이 들러붙는다. 그것들은 도파민을 분비하고 촉진한다. 사랑을 향한 순수한 열정은 어느샌가 자취를 감춰 버린다. ‘그때는 어린애들 불장난이었지’라고 하면서…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이 사랑하는 방식을 그리워하고 추억하지만 결국 괄시하고 무시한다.
“사람은 다 변하는 거야, 세상에 안 변하는 게 어디 있냐?”
그럼 세상에 모든 것은 변한다는 또 다른 진리가 더 마음에 들게 된다. 세상에 변함없이 영원하고 순수한 것은 없다. 그래서 개츠비가 위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런 개츠비의 모습은 어쩌면 여자들이 마음속에서 가장 갈망하는 상대일 것이다. 여자들이 그런 남자를 갈망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그런 남자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며 여자가 원하고 상상하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원하는 데로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자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행동(물질과 사랑을 모두 원하는)이 만들어 낸 남자는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모순은 모순을 낳는 법이다. 그런데 돌연변이 같은 개츠비가 등장했다. 여자의 로망이 소설 속에 등장한 것이다. 현대의 여자들이 도깨비를 사랑하고 외계인을 사랑하게 된 것은 현실에서는 모순적이지 않은 남자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여자가 모순적으로 남자를 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드러난 현상만 탓하기 때문아닐까?
사랑을 노력으로 얻기(Gain) 보다 사는(Buy) 편이 빠르다
세상 현실의 냉혹함을 먼저 겪은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의 기술이 아닌 처세술을 알려주는 것이 먼저이다. 처세에 능하면 배우자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결혼과 사랑이 분리되는 이유이다. 한국의 부모들이 그렇게도 자식 교육에 목을 매는 이유이다. 사랑이 없어도 결혼해서 함께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있어도 결혼이 없으면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학벌과 출신은 어려서 학창 시절에 모두 결정이 나버린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한국에서 어려운 이유는 한국은 낙인효과가 너무도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는 어떻게든 자녀의 공부를 위해 뼈와 영혼까지 갈아 넣는다. (공부라기보다는 학위와 자격취득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은 그들의 삶은 사라지고 모두가 자녀에게 자신의 삶(원하던)을 투영하려 한다. 서로를 옮아 맨다. 부모와 자녀는 분리되어야 하지만 분리되지 못하고 계속 얽혀서 서로를 갈아먹는다.
간판이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는 곳이다. 어느 순간부터 대한민국에 흑수저의 성공스토리는 사라지고 날 때부터 금수저의 스토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흑수저의 성공스토리에 더 이상 속지 않는 현명한 시민이 되었다. 그래서 흑수저로 태어나면 노오력과 겸손, 인내 같은 것은 내팽개치고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사기와 눈속임과 복권과 코인이 불티나게 유행하게 되었다.
조강지처(糟糠之妻)
이런 말이 있다. 힘든 시기를 함께한 부부는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 이건 물론 사랑이 영원해서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우정과 같은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힘든 시기를 함께 이겨낸 전우는 평생 함께 가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서로의 허물과 아픔과 고통을 모두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남녀도 이와 같은 관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남자에게 조강지처는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만약 그 시작이 사랑이었다면 남녀 모두가 그럴 것이다. 하지만 과거 부모 세대는 사랑으로 맺어진 케이스보다는 어쩌다가 결혼할 시기가 되어서 맺어진 부부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힘든 경제 성장 시기 부부가 힘든 과정을 참고 견디면서 단단해진 경우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 과정 속에 더 상처받고 덜 상처받고 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총량의 법칙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같다. 하지만 힘든 시기를 견뎌본 남녀는 다시는 이런 힘듦을 함께 견딜 수 있는 상대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견뎌내면 친구가 되고 견디지 못하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것이 남녀 사이이다. 부부는 우정으로 여생을 함께 하는 관계이다. 다행히 서로에게 혐오와 증오가 없다면 말이다.
“아, 당신은 너무 많은 걸 원해요! 지금 당신을 사랑해요.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지난 일은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한 때는 그 사람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당신도 사랑했어요.”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
이 대사가 소설 속에 가장 의미심장한 구절이 아닐까? 여자(데이지)는 둘 다를 포기하지 못한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놓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쌓고 채우며 발전하는 산업자본주의에 축적과 증식의 욕망이다. 이것이 가장 힘든 것이다. 데이지는 둘 다가 너무 아쉬운 것이다. 그래서 둘 다 놓지 않으려 했지만 개츠비가 그것을 무너뜨리려 했다. 데이지는 가문과 명예와 부귀를 모두 갖춘 현재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개츠비가 비록 부를 가지고 나타나긴 했지만 데이지가 보기엔 부실하다. 여자는 모험은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가진 것 중 어느 것 하나도 놓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 오르페우스
개츠비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녀의 마음 하나만을 얻으려고 모든 삶을 바쳤지만 그녀는 그럴 마음이 없다. 그런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순수함이 여자를 울리고 또한 남자를 분노케 한다. 결국 남자의 순수한 사랑은 허망한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이 소설이 현대 물질문명을 살아가는 남녀에게 계속 회자되고 가시처럼 파고드는 건 순수함을 갈망하지만 그럴 수 없는 모순 때문일 것이다.
물질과 사랑을 모두 가질 수 있는가?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공존하지만 같은 방식으로는 둘을 모두 알 수 없다. 한 가지에 더 다가갈수록 다른 한 가지는 더 멀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간과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인정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