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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알면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by 글짓는 목수

사랑을 글로 배우고 느낄 수도 있다.


이건 사랑이 눈에 보이게 되는 과정이다. 좀 더 리얼하게 보이게 하려면 사진과 영상으로 만들면 된다. 사진과 영상으로 사랑을 느끼는 자들은 리얼하게 직관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고 글을 읽으며 사랑을 느끼고자 하는 자들은 단서와 기억을 쫓아서 상상으로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이며 글을 쓰면서 사랑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상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모두는 현실의 사랑에서 멀어진다. 뇌에서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사랑을 느끼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현실에서는 사랑을 할 수가 없다. 그건 사랑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사랑은 지식이나 지혜로 알 수는 있으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독서 토론 in 서면

"왜 우리는 이렇게 입으로 사랑을 잘 말하는데 다들 이날 좋은 휴일 데이트하지 않고 여기 모여 있는 걸까요?"


언제인가 독서 모임에 모인 남녀가 사랑에 관한 토론을 하다가 나온 말이었다. 모두가 각자 사랑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과 지식을 나누는 자리였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나눌 얘기가 많다. 모두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문학을 즐기는 남녀들이 모여 앉았다. 문학 속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 이야기다. 다들 너무도 많은 형태의 사랑을 읽어 왔다. 사랑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남녀들이었다.


서로 아끼고 배려해야 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인내하며 서로를 온전히 받아줘야 한다는 고전이 담고 있는 사랑의 지혜를 이야기를 모두 읽었다. 그것도 모자라 심리학과 뇌과학, 그리고 철학서에 있는 사랑에 대한 다방면의 (뇌)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랑에 대해서도 섭렵했다. 그럼에도 모두가 사랑은 하지 못한다.


"사랑은 알면 알수록 그것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그렇게 느꼈다. 사랑을 하고 싶어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을까 알고 싶어 책을 뒤지고 찾아보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사랑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탓에 사랑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문제는 상대도 그렇다는 것이다. 지식이 지혜가 되어야 하는데 지식이 실드(방어기제)가 되었다. 어쩌면 사랑하기보다는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 것인지도 모른다.

책으로 사랑을 배우는 독자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


내가 책 속 한 구절을 발췌해서 읽었다. 조르바의 모습이 멋있고 부러우면서도 정작 읽는 자는 조르바의 두목처럼 책을 읽고 사랑하지 못한다. 머리로 사랑을 아는 자는 결국 머리가 마음을 잡아두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성(理性)이 우리를 지성인으로 만들었지만 덕분에 우리의 감성은 지성으로만 느낄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건 아마도 소설 속에서 보이는 사랑이 아주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애절하긴 하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시련과 상처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전은 비극이다. 유일하게 비극만이 감동을 준다. 우리는 비극에서 감동을 받지만 우리의 삶은 비극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감동 없이 살아간다. 사랑은 현재에 머무는 것임에도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펼쳐놓은 결말이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글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찍혀있다. 정해진 운명처럼. 우리는 정해진 결말을 너무도 많이 읽어버렸다. 그래서 사랑할 수 없다. 나는 그래서 고전을 끝까지 읽지 않고 마지막을 남겨두려는 것일까? 하지만 토론에 나가면 결국 끝을 알게 된다. 너무 많이 읽어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세상에는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진 탓이에요. ”


적막을 깨고 누군가 말했다. 맞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보이는 사랑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글과 이미지 그리고 영상으로 만들어진 눈에 보이는 사랑에 현혹되어 그것들만 쫓아다니느라 정작 영혼으로 마음으로 몸으로 해야 할 사랑에서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새 생명은 사랑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이 사라지니 새 생명은 순환은 멈춰버린다. 그럼 사랑도 생겨나지 않는다. 사람이 없으니 사랑도 삶도 생겨나지 않는다.

순수한 아이의 사랑

“맞아요. 세상엔 순수한 아이들처럼 사랑할 수 없는 너무도 많은 현실의 제약들이 있죠”


어린아이들은 법도 규칙도 없는 세상에서 함께 어울리며 놀 수 있다. 그들은 옆에 있는 상대를 욕망의 수단과 대상이 아닌 오로지 유희를 위한 목적으로 보기 때문이더라. 하지만 지식과 논리로 무장한 어른은 지적이고 예의 바른 욕망으로 상대를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보더라. 현재의 상대를 보지 않고 미래의 상대가 줄 이익과 쾌락을 미리 예측하고 염두에 두며 말하고 행동하더라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우린 너무도 잘 교육되고 훈련된 탓에 더 이상 현재에 머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여서 책을 보는 것 또한 현재가 아닌 좀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해서 읽는 것은 아닐까요?”


그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침묵했다. 그건 침묵의 동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책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미래의 좀 더 나아진 자신을 위한 투자이다. 그래서 공부하듯 책을 읽는다. 이성으로 무장해서 읽은 지식이 지혜로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상대의 상처와 아픔을 가슴으로 끌어 안고 눈물을 흘리게 해주진 않는다. 어린아이들이 옆에 아이가 울면 따라서 우는 것처럼… 진정한 공감이다.


“그렇다고 어디 마음 가는 데로 하면서 살 수 있나요?”


또 다른 이가 말을 했다. 감성에 매몰되어 있던 우리의 이성을 다시 일깨웠다. 마음 가는 데로 살 수 없기에 삶은 언제나 감동 없는 대중적인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대중 속에 섞여 고전을 읽으며 간접적인 감동이라도 느끼는 것이 어딘가. 감동과 고통을 겪는 비극의 주인공보다는 감동과 고통 없는 권태 속 주인공으로 사는 것이 최선이다. 고통 속에 있는 자는 권태가 부럽다. 그럼 권태는 좀 나을까? 권태가 불러오는 것은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조르바와 두목 사이

“당신한테는 무식이 좀 필요해요. 무식, 아시겠어요?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해야 합니다. 머리란 구멍가게 주인과 같은 거예요. 계속 장부에 적으며 계산을 해요.(중략…) 그래서 당신에겐 평화가 없는 거요. 이해하지 않으면 행복할 텐데!”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


어쩌면 지적이고 합리적이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인간 사이에 사랑이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식하고 합리적인 자가 부유해지는 세상이다. 그럼 부유하면 부유할수록 사랑하기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없던 개털이었던 학생과 백수 시절 만났던 연인이 세월이 흘러도 계속 떠오르는 건 아마도 그 때문이겠죠?”


그러고 보면 가진 것 없고 헐벗었던 때의 사랑만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헐벗고 연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준 상대는 잊히지 않는 법이다. 기억은 편도체를 떨리게 만든 감정을 담은 애절하고 간절했던 기억들만 해마 속에 넣어두고 울음을 터뜨리며 어느 순간 눈물과 함께 쏟아내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이 땅에 왔는데 너무나도 많은 것을 걸치고 가진 채로 서로를 바라보며 벌거벗은 상대를 더 이상 받아주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우리가 벌거벗은 채로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만 벌거벗고, 벌거벗은 서로를 만지고 가지려고만 할 뿐 서로의 벌거벗은 모습을 바라보며 대화할 수 없다.


“시간이 늦었네요 자, 이제 마무리하시고 일어나시죠”


시간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현실의 시공간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문학의 달달한 독서 모임이 끝나면 다시 감성을 접어 서랍에 넣어두고 다시 이성을 꺼내 장착하고 현실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요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한 줄 평을 남기고 일어나시죠.”


나는 하얀 종이 한 장에 참석자들의 이름을 나열해서 적었고 제일 먼저 한 줄 평을 남겼다.


[사랑을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옆으로 종이를 돌렸다. 각자가 한 줄 평을 적고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한 줄 평을 적고 그 종이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적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을 알면 사랑할 수 있을까?]


그 문장 위에 조르바와 두목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는 내 모습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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