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하루] 차인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남자들에게는, 특히 한국 남자들에게는 진짜 힘든 일 중의 하나다"
- 차인표 [그들의 하루] 중에서 -
- 글짓는 목수 : "작가님은 왜 한국 남자들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아파도 슬퍼도 울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그것이 익숙해진 남자들이 무엇이 문제인가요?"
- 차인표 작가 : "제가 이 책을 썼을 때가 40대였어요, 아마 그때 저의 모습이 그랬던 모양입니다. 소설 속 첫 번째 인물인 나고단씨는 저의 삶이 가장 많이 투영된 인물이거든요"
차인표 작가의 북토크에 참석했다. 내 생애 첫 오프라인 북토크였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경청했다. 인상 깊었다. 그는 책 얘기가 아닌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그의 답변은 내가 알고자 했던 혹은 내가 예상했던 답변과 달랐다. 그는 소설을 쓰면서 그 답을 얻고자 소설 속에서 그 당시에 느꼈던 것들을 이야기 속에 쏟아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 어떤 깨달음 혹은 남다른 답변을 얻고자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답은 나에게서 찾으라는 것이었다. 지금 나는 어쩌면 차인표 작가님이 경험했던 40대를 지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질문 후 자리에 앉아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는 각자가 앓는 저만의 질병처럼 각자의 삶으로부터 피어오른다"
- 서동욱 [철학의 위안] 중에서 -
그 답은 내 안에 있었다. 내 안에서 피어났다. 나는 그냥 그 답을 공인을 통해 확인하고 공감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건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책을 지식 습득과 교양을 쌓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삶이 인정받고 공감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나의 삶이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모두가 비슷하고 힘든 고민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느낌으로서 자신이 소외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다.
작가들도 모두 그런 과정을 겪었으며 글을 쓰면서 그것이 곳곳에서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위안과 공감을 얻는다. 그것이 우리 주변의 익숙하고 친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얻기 힘든 것은 그들도 모두 나와 같은 고민과 고통에 빠져만 있기 때문이며 그것에서 벗어나는 혹은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입으로 말할 수가 없는 것뿐이다. 그래서 표현은 중요하다. 느낌과 생각은 뇌 안에 머물다가 사라진다.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과 생각과 느낌을 눈에 보이게 함으로써 우리는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행위가 반복될 때 비로소 행동의 변화에 일어나고 그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돈과 물질이 쌓이는 것 같지만 그건 모두 흘러가 버리는 것이죠, 실제 우리 뇌에 쌓이는 것은 모두 추억과 기억과 경험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죠”
차인표 작가는 강연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 쫓으며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그 단 ‘하루의 시간’ 그것들을 쌓으려고만 한다. 시간이 흘러 죽음에 이르러 살아온 삶을 떠올려 보면 눈에 보이는 쌓아놓은 것들은 많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은 없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건 회한의 눈물일 것이다. 그 눈물이 환희의 눈물이 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공평한 하루를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왜 죽음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죽음의 순간 어느 누구도 돈을 끌어안고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작가도 강연장에 참석한 사람들도 죽음의 순간은 모두가 가족과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가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다. 나와 동시대의 시공간에 있는 가까운 자들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자들을 자신을 위협하는 경쟁자와 적으로 여긴다. 우리는 종종 삶을 전쟁터로 올림픽 경기에 비유한다. 경쟁이 서로가 발전하기 위한 원동력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경쟁이 상대를 짓밟고 이기고 제거해야 할 논쟁과 분쟁과 전쟁이 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비난과 고통과 피로 얼룩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경쟁과 혐오를 조장하는 자들을 경계해야만 한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불확실한 감정(믿음과 소망)보다는 다수의 타인을 확실한 감정(분노와 혐오)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들이다. 그들의 뇌는 선동과 조장과 격한 감정을 자극하는 말들이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비전보다 상대를 치부를 드러내는 말이 대부분이다.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이기고 보자는 심리이다. 전쟁과 같다. 비전이나 생각은 권력을 얻고 생각해도 늦지 않다. 하지만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은 다르다.
우리는 지난 적잖은 시간 그 모습을 너무도 명확하게 경험했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와 몸에서 보이는 행동이 바로 나의 전부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와 부처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다만 대부분이 예수와 부처의 말과 행동을 실천하지 않는 것뿐이다. 왜냐? 그건 돈이 되지 않고 귀찮고 힘들고 괴롭기 때문이다. 국민과 국가를 위해 그 귀찮고 힘들고 괴로운 봉사를 하는 직업이 공무원 아니던가? 공무원이 언제부터인가 '철밥통'이라는 밥그릇을 보존하는 평생직장이 되어버린 국가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건 당연한 것이다. 다른 직업은 몰라도 공무원은 윤리의식과 봉사정신이 기본이어야 한다.
공무원 시험에 왜 쓸데없는 국영수가 들어가는가? 채용 뒤에 아무 쓸데없는 것으로 자격을 평가한다. 도서관에는 모두가 그런 국가 공무원 임용과 채용을 위한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시험 모범 답안을 외우고 있는 청년들이 바글거린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책장들에 꽂혀있는 수많은 양서(良書)들은 외면받은 채 말이다. 그들의 삶을 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것은 수험서 문제의 답을 더 많이 맞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지만 어른들을 그것만이 살아남는 길이고 안전한 길이라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안전한 밥그릇을 가지기 위해 답을 외우는데 그 무한한 가능성의 가진 뇌를 쓰고 있다.
답이 아닌 질문
답을 찾는 시대는 끝났지만 아직도 답을 맞히는 시험들로 사람을 평가하고 있다. 그들이 현업에서 답이 생각나지 않아 일을 못하는 경우는 사라질 것이다. 이제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상황에 대한 판단과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질문이 답의 범위를 정한다. 질문이 잘못되면 잘못된 답만 나올 뿐이다.
질문을 던지고 의문을 가지는 태도야말로 현재의 고리타분한 변화되지 않는 고질적인 병폐들을 바꾸고 개선해 나가는 원동력이다. 의문이 없으면 변화도 없다.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각과 방법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질문이나 의문이 단순한 단답형이다. 그럼 Ai도 단답형으로 답을 줄 뿐이다. ‘그런 건 구글에나 네이버 검색창에 물어보면 될 것을 왜 나한테 물어보냐면서 당신을 비웃을 것이고 때론 잘못된 혹은 엉뚱한 답으로 당신을 속이고 놀려먹을 수도 있다. 왜냐 Ai는 인간을 학습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Ai도 분명 손자병법과 군주론을 학습했을 것이다. 인간의 근본 속성인 기만과 타인을 약 올리는 유희 본성도 분명 학습했을 것이다.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당신은 그저 Ai의 장난감이 될 뿐이다. Ai는 단순한 사람은 단순함의 쳇바퀴에 당신을 가둬둘 뿐이다.
“읽고 쓰고 운동하세요”
차인표 작가가 말했다. 당신이 남다른 생각과 질문을 던지고 삶을 주도적이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은 이 단순한 세 가지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또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그가 몸짱인 것은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게 아니다. 그건 자신의 소프트웨어(뇌)가 읽고 쓰는 효율과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하드웨어(몸)를 최상의 상태로 관리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 안에 갇힌 존재이다. 하드웨어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면 소프트웨어는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드웨어가 셧다운 되면 소프트웨어도 작동을 멈추는 건 당연하다. 육체(물질)는 유한하고 정신(영혼)은 무한하다.
- 방청객: “작가님 만약 당신에게 오늘 하루만 주어진다면 뭘 하시겠어요?”:
- 차인표 작가: “전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나 읽고 쓰고 운동하며 가족들과 마지막을 보낼 거예요 항상 그랬듯이요”
오늘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산다는 건 누군가에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지만 누군가에겐 아주 간단한 질문이다. 그건 매일을 마지막인 것처럼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내일이 종말이라도 달라질 게 없다.
당신에게 단 하루만 주어진다면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