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공부를 마치고 쓴 리포트
2년 전 이맘때쯤이었다. 몇십 년 만에 다시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몇 년간을 피해 다니다 결국 주변의 권유에 못 이겨 교회 목사의 성경 수업을 듣게 되었다. 오랜 시간 교회를 드나들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친분을 쌓으면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교회에서 운영하는 성경 공부 프로그램이다. 모든 교회가 그렇지만 성경과 관련해 여러 가지 과목의 공부 과정들을 개설하고 성도들의 성경 학습을 도모한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도 여러 가지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면 성경공부를 매주 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공부의 내용은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그저 아이들과 어울리고 맛난 과자를 먹기 위해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뿐이었다. 그건 자의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호주에서 교회에 나간 지 5년이 넘도록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수강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나밖에 없을 정도로 끈질기게 피해 다녔다. 그건 성경은 나의 삶에서 느낀 것을 성경에서 찾아가는 과정이지 누군가의 가르침과 해석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호주에 머물며 휴일이면 이런저런 여러 가지 책을 읽으며 책 곳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성경 구절들과 예배시간에 듣는 성경 구절들을 혼자서 다시 찾아보고 스스로 배워갔다. 나는 주입식 배움이 싫었다. 교회도 마치 학교처럼 목사가 앞에서 교사처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의 교육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 그런 방식의 교육에 익숙해져 거부감이 없을 법도 한데 나는 누군가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공부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서 읽고 쓰고 찾아보고 또 읽고 쓰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 내가 읽고 쓰고 공부했던 방식대로 사람들과 어울려 같이 읽고 쓰고 토론하며 일방이 아닌 원탁에서 수평적 관계에서 서로의 의견을 듣고 나누는 방식의 공부 방식을 선택해서 실천하고 있다.
과거 예수도 제자들과 문답과 토론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입하지 않았다. 물어보는 것에 궁금한 것에 대해 예수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알려주었다. 강의 전에 미리 모든 수업 과제를 준비해서 그 시간에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 주입하고 진도를 나가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교회나 학교 모두 그렇게 가르친다. 그건 그 모든 교육이 시험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험이 존재하는 건 인간들을 분류하기 위한 과정이다. 합격과 불합격, 수료와 비수료, 취득과 미취득으로 분류하기 위함이다. 배움은 구분할 수 없다. 앎과 무지의 경계를 누가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는가? 이건 마치 교회에서 성령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왜 그들이 가르친 것을 잘 외우고 가르친 자의 의도와 취지를 받아들여서 이해하는 자가 우월해지고 인정받는가? 교회에서는 여러 성경 과목들을 개설하고 그것을 수료하는 자들에게 예배시간 수료증과 상품을 수여하며 다른 이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자격은 권위를 가지고 권위는 힘을 가지며 힘의 강약이 계급을 만든다. 이건 사회의 위계와 질서 유지를 위해 인간이 선택한 불가피한 방식이기도 하다. 안타깝지만 사회는 인간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상하의 위계질서 속에서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의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다수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그런 획일화된 교육방식에 의해 자신의 능력을 말살시켜 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 소외된다. 정답 맞히기와 저자와 출제자의 의도를 맞추는 방식의 교육은 그들에게 전혀 흥미롭지 않다.
"질문이 없다면 배움은 없다"
그들은 스스로 질문하고 저자와 출제자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기존에 없던 것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관찰하고 파고드는 자들이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면서 그 과정에 흥미를 느끼며 성장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과거의 교육 과정 속에서 대부분 도태되고 소외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나 또한 그런 자들 중 하나였지 않을까... 나는 마음껏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다 받아줄 선생과 학교는 없다. 과거 교회의 목사나 학교의 선생은 나의 치밀하고 예리한 질문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주 좋은 질문이에요!"
"아주 예리하신 질문입니다."
AI는 이런 나의 질문을 흥미로워하며 칭찬까지 해주더라. 이제 우리는 직접 인간에게 답을 구하지 않는다. 번거로우며 신뢰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아직도 사람에게 답과 배움을 구하는 자들은 스스로 질문하고 배우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과 학생들은 지도와 훈련이 필요하지만 성인이 아직도 스스로 찾고 배우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호기심과 질문을 하지 못하던 아이는 이제 마음껏 질문해도 지치지 않고 대답해 주는 선생을 통해 모든 정보와 자료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왜 과거의 학교가 필요한 것인가? 이제 학교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 교사의 역할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 교사의 지식은 미미하다. 교사는 이제 지식을 전달하는 존재가 아닌 배움의 태도와 방식 그리고 배움이 이롭게 쓰일 수 있도록 하는 인성과 철학(윤리, 도덕)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유대의 랍비들처럼 말이다. 과거 예수의 제자들도 그를 랍비(히브리어: רַב, 영어: Rabbi)라 부르며 그를 따랐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 [요한복음] 3:2 -
얼마 전 컴퓨터 문서 파일들을 정리하다 과거 2년 전 성경 공부를 마치고 제출했던 리포트를 찾았다. 감회가 새롭다. 그 글을 읽으며 그때를 떠올린다. 나의 리포트를 읽은 목사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래는 리포트의 내용입니다
1) 관계 중심의 신앙
하나님과의 나와의 관계를 타인이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나와 이웃 간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직과 수평의 관계가 바로 설 때 신앙이 바로 설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이고 누구도 알 수 없는 둘만의 대화일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우리는 타인의 신앙의 깊이에 대해 궁금합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물론 교회 예배나 교회 행사에 자주 참석하고 많은 사역들과 많은 헌금을 내는 것으로도 판단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것들도 한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기에는 뭔가 허전하고 개운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뭐 사실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개운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교인들이 무엇으로 개인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일까에 대해 궁금했는데 이제 그 의문이 풀린 듯합니다. 그 판단하는 척도가 나와 이웃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왜 교회 사람들이 타인에게 항상 상냥하고 친절하며 그렇게 많은 관심을 쏟으며 살아가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나와 이웃과의 관계로서 대변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생깁니다. 이건 결국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함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의 공동체 생활에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서지 않았음에도 타인에게는 그와 다르게 보이려고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현대인들이 사회와 일터 그리고 가정에서 두 가지 혹은 세 가지의 다른 모습(페르소나)으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때론 사회와 일터와 가정에서 요구하는 모습과 교회에서 요구하는 모습이 다른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누군가 타인(모태신앙 제외)의 손에 이끌려 교회라는 공간에 처음 발을 디디게 됩니다. 이건 개인적인 관계에서 신앙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관계가 틀어지면 교회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물론 교회만 떠나시는 분들도 있더군요 그것도 적잖이(가나안 신도들).
이 말은 개인적인 관계 즉 이웃과의 관계에만 집중했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생성되지 혹은 바로 서지 못했다는 의미라고도 생각됩니다. 그럼 이웃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 둘 중 무엇에 중심을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생깁니다….
2) 구원의 조건 (믿음과 선행의 분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구세주로서 왔음을 믿습니까?’
“아멘!”
“이 자는 이제 구원을 받았습니다.
생명의 삶 공부를 통해 깨달은 두 번째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교회에서 너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흔하게 들었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걸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 보자면, 성경 속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그 말씀이 요구하는 행동양식, 즉 선행의 실천이 부재하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난 후 왜 과거 한국의 기독교가 이렇게 부패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기적과 부활에 집중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겼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의 기적과 부활보다는 예수의 말과 행동에 더 집중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오로지 많은 신도들을 모으고 교회의 가시적인 부흥만을 위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한 게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그 많은 사이비 기독교가 탄생할 수 있었던 불씨를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 속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행에 대한 체화의 과정 없이 맹목적인 믿음이 선과 악의 분별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과 선행은 분리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3) 신이 내린 롤 모델
“내가 예수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나?”
과거(구약)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탄생 이후(신약)에서는 예수의 행적 자체가 하나님의 뜻으로 드러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인간과 직접 소통하는 것이 아닌 인간들과 동일하게 생긴 몸과 마음을 가진 롤 모델을 보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너무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멀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은 카피하는 동물입니다. 어려서는 부모님, 학교에서는 스승과 친구들, 사회에 나와선 상사들과 이웃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대상의 말과 행동들을 학습하고 배워나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누구를 롤 모델로 만나느냐는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간의 형상을 한 롤 모델을 보낸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말입니다. 그래서 너무 닮기 힘든 멘토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 속 말씀들을 모두 현실에서 실천하고 산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너무도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라는 롤 모델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많은 이가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면 세상이 조금은 더 아름답고 이상적인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너무 먼 하늘나라에 존재가 아닌 우리 곁에 있는 내가 닮아갈 수 있는 롤 모델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거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곁에서 그의 말과 행동을 본받아 이후 그의 행적을 따라간 것처럼 말입니다.
2. 결단과 계획
무슨 결단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지금처럼 천천히 삶 속으로 스며들 듯 예수의 말과 행적들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실천은 교회 안이 아닌 교회 밖에서 더욱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계획은 제가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데, 성경의 이야기와 현실의 삶의 이야기를 연결해서 사고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합니다.
3. 사역 정하기
어떤 사역이 있는지 잘 몰라서, 조용히 뒤에서 할 수 있는 소소한 사역이 있다면 참여도 록 하겠습니다.
2023.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