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에스터 페렐 - 여덟 번째 -
“정치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관계의 단절은 새로운 사회 질서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입구일 수 있다.”
- 에스터 페렐 [우리가 사랑할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
우리는 가정과 일터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일상을 살아간다. 매일 만나는 사람과 접하는 정보 그리고 바라보는 풍경은 이렇다 할 변화 없이 반복된다. 그것들에 익숙해져 일상에서는 새로운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여행을 갈망한다. 주말과 연휴가 오면 공항은 북새통을 이룬다. 이건 모두가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반영한다. 요즘 명절은 가족과 친지가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떨어져 멀리 여행을 떠나는 시간이 되어가는 듯하다. 추석과 설 연휴에 해외 여행객이 급증했다. 개인주의 사회는 부단히 도 이런 익숙한 관계와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빈번해진다.
이건 집단주의와 공동체 지향적인 사회가 개인과 소수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음을 반증한다. 이것이 나쁘다 좋다 말할 수 없다. 단, 막을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그럼 그것에 맞는 사회적 질서가 재편되어야 한다. 그래야 국가와 사회는 개인의 의식 변화를 다시 조선 시대로 되돌릴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의 변화가 국가와 사회를 바꾸는 것이지 국가와 사회의 제도와 법규가 인간(개인)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이건 공산주의 독재 국가에서나 이뤄지는 행위이다. 여행은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단절을 통해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다시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지만 변화는 지속적이고 장편적인 단절을 통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세 가지의 방법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네 가지이지만 두 가지는 병행해서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에 크게는 세 가지의 경우로 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변화의 핵심 키워드는 독서(간접), 토론(대화, 직간접), 환경(직접), 관계(직접) 이 네 가지다.
느리지만 안전한 변화 – 독서
변화, 누구나 꿈꾸고 소망하는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 발맞춰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세상의 변화를 빨리 눈치채는 자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많은 이들이 ‘돈’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시대의 변화를 미리 안다면 그 변화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가 무엇이 될지를 안다는 말이고 시장을 선점할 기회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왜 책을 읽고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려 그토록 공부하는지는 이와도 관련이 깊다.
현재 사회에 만연하고 유행하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단절시켜야 한다. 지금 돈 되는 것을 지금 시작하는 것은 하수이다. 그래서 대부분 본전도 못 챙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마트한 사업가는 지금 돈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현재의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남다른 생각과 환경을 찾아 헤맨다. 다만 그들은 현재의 조직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독서를 통해서 생각의 변화를 꾀한다. 독서는 가장 최단 시간에 타인의 생각을 얻을 수 있는 방식이다. 글을 읽는 동안 사고와 사색을 함께 하기 때문에 새로운 생각을 도출하는데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성공한 자들은 항상 독서를 한다. 성공한 자들 중에 독서와 친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긴 어렵다. 여기서 성공이란 졸부처럼 돈만 번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부와 명성을 가져온 경우이다. 독서를 통한 변화는 가장 긍정적이고 안전한 변화를 보장하지만 이건 시간이 오래 걸리며 그 즉각적인 변화와 체감을 얻지 못해 많은 이들이 중도 포기한다. 독서를 통한 변화는 서서히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지만 누적될수록 그 파장과 영향력은 크고 길다. 그러려면 독서를 즐길 수 있어야만 한다. 독서를 식사하듯 대해야 한다.
도전적이고 위험한 변화 – 환경과 관계
가장 빠른 변화는 무엇일까? 우리가 인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변화를 한 인물을 꼽으라면 누구를 떠올릴 수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예수와 부처를 떠올린다. 왜냐 이 둘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들이기 때문이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경전에 남아 종교와 신앙이 되었다.
이 둘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석가모니는 처자식을 버리고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고 평생을 떠돌아다니면서 중생을 구제했다. 예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정착하지 않았다. 이 말은 환경과 관계를 계속 바꾸면서 살았음을 의미한다. 이건 그들이 깨친 사람이라 백성들을 일깨우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상호 작용이다. 새로운 환경과 관계는 나를 변화로 이끌 수밖에 없다. 새로운 곳에 가면 그곳의 관습과 법 그리고 생활양식에 따라 나의 언행을 바꾸어야 하고 그곳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그곳 사람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을 알아야 한다. 이 과정이 나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우리는 예수와 부처가 자신의 깨우침을 알리려고 방랑한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그 반대의 경우는 생각하지는 못한다. 둘은 새로운 환경과 관계 속에서 그들 또한 발전하고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제자들이 없었다면 그들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가 지금 그들의 존재를 알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하지만 이 환경과 관계를 변화시키는 방식의 변화는 반드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처한 환경과 관계가 반드시 선하고 긍정적인 환경과 관계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선과 악 그리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게 선 자라면 흔들림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과 관계가 모두 악과 부정적인 것들로 둘러싸여 있다면 이 변화는 나를 파멸로 이끌어 갈 것이다. 당신을 이끄는 자가 히틀러 같은 사람이라면 어떻겠는가? 예수나 석가모니를 만났다면 행운이지만 당신이 반드시 그런 행운을 가진다고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이런 환경과 관계를 바꾸는 것은 나에게 가장 빠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왜냐 나를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50:50의 확률로 모험을 걸어볼 수 있는 자는 이 방법을 추천한다. 당신이 사람을 볼 줄 아는 선견지명을 지녔다면 이 방법이 가장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 적잖은 스트레스와 고난을 감수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떠돌이 생활이 어디 그리 쉬운가? 성경에서 고난은 축복이라는 말이 그래서 이해가 된다.
일상을 포기한 변화 – 토론
앞에서 말한 예수와 부처 말고 또 다른 두 명의 성인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공자이다. 이 둘은 좀 다른 성격의 성인이다. 예수와 부처는 성자의 느낌이지만 소크라테스와 공자는 스승과 같은 느낌이다.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도 물론 대화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이 네 명 모두 글을 읽고(독서) 성인이 된 경우는 아닐 것이다. 왜냐 당시에 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몇몇 귀족이나 왕들이 문자를 통한 학습을 했을 수 있지만 비천한 그들이 어디서 책을 구해 공부를 했겠는가? 예수와 부처는 수행(명상) 혹은 고행의 길에서 얻은 깨달음이고 소크라테스와 공자는 아마도 토론을 통한 사고의 확장을 통한 성장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떠돌아다니면서 제자들과 토론을 했을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날만 밝으면 아고라 광장에 나가서 하루 종일 토론만 하다가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때문에 아내 크산티페의 구박을 견뎌야 하는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반면 공자는 그런 아내를 버렸다. 상종 못할 존재로 여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공자 보다는 한 수 위의 성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공자는 떠돌이였기에 가정을 꾸리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평생을 살았다. 소크라테스의 방식이 현대 정착 사회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학창 시절 윤리 수업 시간에 그토록 서양 철학을 외웠던 것일까? 소크라테스가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볼 때 그나마 가장 이상적인 성인이다. 매일 학교에 가듯이 아고라 광장으로 출근하는 소크라테스는 등교하는 학생과도 같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광장에서 제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이들과 토론하며 사고를 확장하고 더 깊고 넓은 생각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 방식이 요즘 학부모들 사이에서 뜨고 있는 유대인들의 하브루타 교육방식과 같다. 기존의 주입식 암기 교육이 아닌 토론과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확장해 가는 방식의 교육이다. 전 세계 인구의 1/500 밖에 되지 않는 유대인이 노벨상의 20%를 수상했으며 전 세계 금융자산의 30% 정도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이런 그들의 교육방식의 영향이 적지 않은 것이다. 나와 너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행운이다. 왜냐 그건 내가 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이와 싸우지 않고 대화하고 토론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것이 헤겔이 말한 변증법적 사고방식이다. 서로 다른 생각이 부딪쳐서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정반합의 성장 방식이다.
당신도 변화하고 싶은가? 그럼 무엇을 해야 할지 이 세 가지 중에 선택해야 한다.
읽거나 떠나거나 토론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