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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력은 습관이다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 두 번째 -

by 글짓는 목수

"판단력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연습을 통해 정련될 수 있을 뿐이다."

-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서문 중에서 -


자녀를 가진 부모들은 아마도 자신의 자녀가 좋은 선생을 만나거나 과외를 받아서 판단력이 길러지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판단력은 배움과 습득의 영역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질 좋은 사교육을 받고 자라서 좋은 직업과 명성을 얻었다고 그 자가 결코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보통 전문가와 영향력 있는 권위자에게 우리의 판단을 맡기지만 사실 그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왜냐 그건 그들이 판단력이 뛰어나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정답을 잘 맞혀서 그 자리에 올랐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판단은 당장 보이는 것으로만 또한 그들이 가진 지식에만 근거하지만 그 판단으로 인해 벌어질 일은 알 수 없다.


그들이 만약 족집게 과외 선생을 잘 만나서 시험을 잘 통과한 사람이라면 그건 그 자가 가진 혹은 부모가 가진 부와 영향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자의 판단력이 뛰어나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이 아니다. 판단력은 오랜 시간 스스로 만든 노력, 즉 습관과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습관과 태도는 부모와 선생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을 부모와 선생이 만들어 주었다면 그 아이는 부모와 선생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것을 버리고 다른 습관을 찾아 떠나갈 것이다.


습관과 태도 – (스스로 만든)


세상에는 아주 매력적이고 달콤한 습관들이 많다. 그것들을 스스로 뿌리치고 인내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다. 통제와 가르침이 사라지면 스스로 통제하고 배우는 법을 모른다. 또한 전문가가 되고 권위와 명성을 얻고 난 후에는 자신을 통제하고 가르치려 드는 자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밑에서 눈치를 보는 자들만 있을 뿐이다. 그 눈치를 보는 자들이 오히려 더 판단력이 뛰어날 수 있다. 눈치도 판단력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눈치도 오랜 시간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형성되는 습관과 같다. 다만 이건 환경에 의해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습관이라는 점이다. 만약 그 환경이 긍정적이고 자율적이라면 그 자는 행운이다. 그 환경이 부정적이고 강압적이라면 안타깝다. 하지만 환경을 극복하고 개선하는 힘든 과정을 거친다면 더 좋고 강력한 습관을 만들 수도 있다. 고난과 역경이 인간을 더 고귀하게 만든다는 것은 경전과 고전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이다. 스토리만 다를 뿐 본질은 모두 비슷하다.


환경과 관계의 중요성


이건 당신이 예수나 부처를 만났느냐 혹은 히틀러나 마오쩌둥을 만났느냐로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양쪽 모두 인간의 본성과 마음을 아주 잘 아는 자들이다. 다만 전자는 선한 영향력이고 후자는 악한 영향력이다. 우리는 다만 선과 악을 구분하기보다 나에게 이익인지 손해인지, 즉 이해(利害) 관계로 판단하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고 따르느냐는 당시의 자신의 상황과 마음을 잘 이해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자가 나의 멘토가 되고 스승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인간을 멘토로 믿고 따르는 건 위험 요소가 항상 존재하기 나름이다. 그 자가 현재 선한 영향력을 가졌을지라도 그 선한 영향력이 언제 어떻게 또 악한 영향력으로 바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이 커지면 사람은 변한다.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와 히틀러

심플한 일상과 관계


3대 비판서(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를 쓴 칸트는 아주 심플한 삶을 살다 간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시계 로봇이라는 별명을 지녔을 정도로 하루의 일과가 단순하게 흘렀다. 당시 시계는 귀족이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지니고 다니는 귀중품이었는데 서민들이 칸트의 모습을 보고 시간을 짐작할 정도라고 한다. 그는 정해진 시간 정해진 활동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활동은 읽고 쓰고 사색하고 강의하고 토론(대화) 하기였다. 그는 연애도 결혼도 자녀도 없이 이 패턴의 삶을 살다가 죽었다. 마치 단순한 로봇 같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뇌는 그 누구보다 깊고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살았다. 지금의 현대인들이 깊고 넓은 현실 세계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살지만 정신세계는 단순한 것과는 반대이다.

임마누엘 칸트 (1724~1804)

다양한 경험이 다양한 생각을 불러올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의 다양한 경험은 제약이 크다. 시공간의 제약은 더 많은 다양한 경험을 차단한다. 다만 현실의 경험을 통해 생겨난 생각은 리얼하고 생동감 넘치며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뇌를 통한 경험은 무한하다. 칸트는 독서와 사색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대화와 토론 속에서 얻은 간접 경험으로 누구보다도 많은 생각들을 연결하고 융합하는 뇌 활동을 했던 철학자였다. 그의 저서는 그 흔적의 결과이다. 때문에 칸트는 서양 철학 역사의 전(고대와 중세)과 후(근대)를 나누는 가운데 위치하는 인물이 되었다. 종교로 치면 BC와 AD를 나눈 예수와 같은 존재이다.

사색하는 칸트

사색하는 칸트


칸트의 이런 습관은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다. 그가 스스로 지켜서 만든 습관이고 그는 그 습관이 불러오는 아니 점점 접근해 가면서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습관을 계속 유지했다. 그 훈련의 과정이 칸트를 만들었다. 후세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시험을 잘 쳐서, 강의를 잘해서, 자격증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가 남긴 저서에 담긴 철학 때문이고 그 철학은 그의 습관이 만들어낸 결과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철학에 찬사를 보내지만 사실 우리는 그의 습관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 맞다. 왜냐 우리도 그와 같은 습관을 가지고 살면 자신이 가진 그 어떤 능력이 빛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인간의 각자 타고난 기질이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것을 “천부적 능력”이라고 칭했다. 그 능력을 이끌어 내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 즉 습관과 태도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시간과의 싸움이다.


식사와 토론 (본성과 지성)


과거 나는 술과 담배를 자주 즐기는 직장인이었다. 지금은 그것들을 찾지 않는다. 술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조금씩 마시지만 스스로 찾아서 마시진 않는다. 나는 그 사람들과 대화를 위해 술을 함께 하는 것이지 술을 마시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과의 대화와 토론에서 많은 것을 얻기 때문이다. 칸트 또한 항상 지인들과 식사하면서 대화하는 시간을 습관처럼 즐겼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주 위트 있는 입담가였다고 한다. 맛있는 음식과 대화는 인간이 가장 자연스럽게 즐기는 방식 중 하나이다. 먹는 것은 생명(동식물)이 원하는 즉 본성(생존 본능)이고 대화는 인간이 원하는 본성(감성과 지성)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하는 행위가 바로 식사이다. 안타까운 현실은 지금의 현대인들에게 식사는 생명이 유지하는 행위로 변해가고 있다. 혼밥이 바로 그런 사회 현상이고 이건 대화와 토론을 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가 만든 현상이다. 대화와 토론이 즐겁지 않고 고통스러운데 밥까지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럼 체한다.

독서 토론 (서면)

"판단력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훈련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오히려 일종의 감각과 같은 능력이다. 판단력은 결코 배워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가다머 <진리와 방법>,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에서 발췌 -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법이다. 누군가는 그럼 또 드릴로 뚫으면 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나는 그런 자들을 많이 만나왔다. 그럼 나는 말한다.


“당신에겐 드릴이 없습니다.”

“사면되죠”

“당신은 바위를 뚫으려는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는 당신이 만들어 줬잖아요 방금”

“보세요 당신은 자신의 어떤 행위의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


그가 말을 멈췄다. 대화나 토론을 하다 보면 말 잘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에는 혼자서 말을 잘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이건 요즘 잘 나가는 사람의 한 형태이다. 1인 유튜버들이다. 혼잣말을 잘한다는 것은 혼자서 말해도 논리와 이성과 감성을 섞어서 조리 있게 잘 말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옛날에는 혼잣말을 수군대는 자들을 미친놈 취급했지만 지금은 그들의 대세이다. 이건 글쓰기도 비슷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혼자서 생각하고 표현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말이 아닌 글로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말과 글은 모두 언어이다. 개인의 언어활동을 통해서 성장하는 방식이다. 다만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는 점이 다르다. 글을 고칠 수 있다. 퇴고이고 편집이다.


토론과 논쟁 사이


잠시 다른 길로 샜다. 앞에서 대화나 토론을 잘하는 자는 사람들 앞에서 혼잣말을 하는 자를 의미한다. 청중의 표정과 마음과 태도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이 대화와 토론에 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타인의 발언에서 오류와 허점을 찾고 그것을 빌미로 자신의 의견을 펼치는 자들이다. 타인의 이용해서, 즉 타인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올리는 비열한 방식이다. 하지만 이건 효과적이다. 정치 토론이 비난과 논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단기간의 확실한 효과를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정치토론이다.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 그리고 독서 토론에 모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것은 타인의 생각을 듣고 이해와 공감을 확장하고자 함이지. 나의 지식과 우월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론과 논쟁은 다르다. ‘쟁’은 싸움이다. 싸우려고 소중한 시간을 내놓을 사람은 없다.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려면 상담사나 의사(정신과)를 찾아가는 것이 맞다.

정치 토론 - 논쟁, 비하, 인신공격

혼자 있는 올바른 방법


결국 혼자서 올바르게 지내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독서와 사색과 쓰기의 과정은 과거 위대한 철학자와 문학가 그리고 과학자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혼자 스스로 길러낸 올바른 습관을 지속하는 능력의 결과이다. 세상은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건 세상의 속성이다. 어쩔 수 없다.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이 속세를 떠나 산으로 가거나 무인도로 가지 않는 이상 이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 (올바른) 판단력을 기르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스스로 훈련을 통해 습관과 태도를 만드는 것이다.


그럼 언젠가 당신 안에 또 다른 당신을 찾게 될 것이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in M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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