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자 은행가] 페르난두 페소아
“독재는 (사회적) 허구에 귀속된다.”
모든 독재는 허구를 독점적으로 이용하면서 생겨난다. 보편적 다수가 독재를 하는 상태, 즉 과점적 독재 상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이다. 이건 다른 말로 불평등이 크게 불거지지 않은 상태이거나 불공정을 다수가 눈치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과거엔 언론 탄압과 정보 차단으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쉽지 않다. 독재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면 이런 언론, 출판, 집회, 결사를 통한 정보 공유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 아닌 정보의 혼란과 교란을 야기시킨다. 정보의 교착상태를 유발하는 것이다. 두 가지의 상반되는 혹은 대립하는 정보가 홍수처럼 동시에 불어나서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게 되는 현상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관건은 단지 독재를 만들지 않는 게 아니야. 새로운 독재, 기존에 있었던 독재를 만들지 않는 게 관건이라네.”
- 페르난두 페소아 [무정부주의자 은행가] 중에서 –
우리는 독재를 싫어한다. 과거 역사 속에서 군사 독재를 경험한 트라우마가 뼛속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지금을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예수가 죽고 나서야 예수가 바라던 것이 이뤄진 것과 같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희생 없이는 뉘우치거나 깨우치지 못한다.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이다. 그저 그 희생이 나와 내 가족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우리는 독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좀 더 정교하고 치밀한 독재로 옮겨온 것뿐이다. 무슨 말인가 할 것이다. 정치란 결국 소수의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것이다. 물론 그 소수를 국민들이 선택하지만 선택 이후 그들의 언행과 활동은 전적으로 그들의 양심에 의거한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은 다르다. 우리는 정치인들과 삼시 세끼 밥을 먹으며 삶을 함께 하지 않았다. 즉 잘 모른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같이 사는 식구도 서로 마음이 안 맞는데 하물며 그들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결국 우리는 소수의 독재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독재가 보편적 다수의 권익을 크게 침해하지 않고 혹여 침해당하더라도 피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고 치밀하다면 그들은 정치를 잘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다수를 위한 정치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국민이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배를 불리든 말든 크게 상관이 없다. 문제는 그들의 배만 부르고 보편적 다수의 권익과 자유가 침해당한다고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독재라는 옷을 입게 된다. 드러나 보이게 된다. 안 보이는 독재 속옷을 입었을 때는 누구도 몰랐다. 그런데 이제 대놓고 입고 다닌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우리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는 자에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소설을 더 잘 쓰는 거 같다. 그들은 예측과 추측과 가설과 같은 다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듯한 말로 소설을 쓴다. 그들은 공중파와 대중 매체를 통해 아주 빠르고 신속하게 소설을 판매한다. 부럽다. 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 쥐어짜서 소설을 써도 읽어주는 사람이 몇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TV와 유튜브에 나와서 읽어내려가는 소설의 수명은 길어봐야 하루 이틀이다. 빠르고 짧고 강력하게 독자와 청자의 주의를 흔들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쉽게 쓴 소설은 쉽게 잊힌다는 진리는 변치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먹고사는 존재들이다. 소모성, 즉시성, 자극성에 의존해 대중의 말초신경만 자극하고 그들의 분노와 슬픔을 먹고사는 존재들이다.
허구와 약속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 허구로 구성된 곳이다. 소설이나 온라인 게임 속 세상이 허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가 사는 가장 큰 규모의 허구 속의 또 다른 작은 허구일 뿐이다. 미국, 한국, 중국,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삼성, 현대, SK, 달러, 한화, 위안화,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등 이건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이면서 약속이다. 허구를 먼저 만들고 거기에 약속을 추가한 것이다. 원래는 허구로 인해 자연스럽게 약속이 생긴 거지만 약속을 만들기 위해 허구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부자연스러운 허구이다.
허구를 함께 믿고 따르자는 사회적 약속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유지 존속시킨다. 이것이 체제이고 규범이고 또한 시스템이다. 이건 지역적일 수도 국가적일 수도 전 세계적일 수도 있다. 전 세계적인 허구 중에 가장 강력한 예를 하나 꼽으라면 지금은 비트코인이 아닐까? 그전에는 달러였는데 이제 달러의 허구적 위상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뭐 이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다. 반대로 그럼 실제적 위상은 큰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건 ‘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금은 오프라인에 유한한 실체이고 비트코인은 허구 속에 유한한 허구이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대변하는 것은 돈(자본)이다. 다만 돈의 가치보다 금과 비트코인의 가치가 교환 우위를 가진다. 돈은 무한히 찍어낼 수 있지만 후자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허구는 총으로 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이건 전쟁에서 한 병사가 적군 12명을 쏘아 죽인 것과 달라. 이건 한 병사가 적군 나라의 민간인 12명을 쏘아 죽이는 것과 같아”
- 페르난두 페소아 [무정부주의자 은행가] 중에서 -
과거 우리는 무력 민주화 혁명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만약 급진적인 혁명 세력이 정치인과 혹은 유력 인사들을 암살 혹은 제거하는 형태로 혁명을 도모했다면 과연 그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건 오히려 더 큰 탄압과 살육의 빌미와 명분을 줄 뿐이다. 오히려 양심에 거리낌을 가졌던 자들도 자신들의 안위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 탄압과 살육에 무언의 지지를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안타깝지만 인간은 내가 피 흘릴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지면 피해를 입지 않아도 상대를 미연에 제거 혹은 외면하려 한다.
당시 민중은 눈에 보이는 군인과 몇몇 군부 독재 정치인과 싸운 것이 아니다. 그건 보이지 않는 그들이 구축한 부당한 불공정한 허구와 맞서 싸운 것이다. 허구는 보이지 않는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이길 수가 없다. 비물리적(정신적)으로 이겨내고 버텨내어야만 한다. 그것이 다른 모든 이들에게 전이되고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킬 때에 비로소 그 허구가 힘을 잃게 된다
사회적으로 약속된 허구는 없앨 수가 없다. 특히 그 허구가 인류 역사와 오랫동안 함께 해서 그것에 너무 익숙해진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그것을 한 순간에 몰아내는 방법은 무력을 통한 물리적인 현상 변경이다. 전쟁이다. 지금 각국이 군비 경쟁을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세계적인 보편적 허구가 사라지고 각자의 허구가 상대의 허구를 위협하고 침해하려 하기 때문 아니던가? 그것을 과거에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해결해 왔지만 지금은 좀 더 빠른 현상 변경을 원하기 때문이다. 무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쟁이다. 그 희생은 누가 치르나? 입으로 그 허구를 떠들어 대는 자가 아닌 것을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나와 내 주변의 보통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이 희생당한다.
“가장 중요한 사회적 허구는, 적어도 우리 시대에서는, 돈이었어.”
- 페르난두 페소아 [무정부주의자 은행가] 중에서 -
허구 중에 가장 강력한 허구는 바로 돈(자본)이다. 돈은 다른 허구들 위에 존재하는 허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이것 위에 존재하는 허구는 없다. 자본주의 국가에 정치인들이 왜 자꾸 돈을 탐하는지는 이것과 관련이 깊다. 정경유착(政經癒着)이다. 다른 허구들로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은 국가 안에서만 작동하지만 돈은 전 세계적으로 작동한다. 자본은 국경이 없다. 범위가 더 넓고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이다. 권력(정권)은 교체되어도 자본(법인과 은행)은 영속한다. 그래서 권력은 돈과 결탁할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하나뿐이었어, 그걸(돈) 획득하는, 충분히 획득해서 그 영향을 느끼지 않을 만큼 되는 것이지. 더 획득할수록, 난 점점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지겠지.”
- 페르난두 페소아 [무정부주의자 은행가] 중에서 -
독재를 다른 독재로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허구는 바로 돈(자본)이다. 민주주의 보다 더 강력한 허구가 바로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누가 권력을 가지던 상관없지만 그 권력이 자본의 증식을 방해하는 허구를 만드는 권력이라면 가만 보고 있을 순 없다. 자본이 움직인다. 우리가 아무리 민주주의를 외치고 독재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현상을 바꾸기 쉽지 않다. 가난한 지식인은 너무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비로소 독재를 벗어날 수 있다. 과거 역사가 그걸 증명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자본은 그런 피를 흘리지 않고 독재를 벗어날 수 있다. 물론 또 다른 새로운 형태의 독재를 가져오겠지만 그것이 만약 민중들이 접해보지 못해서 정보가 부족해서 그 실체를 모르는 정확히는 그것이 독재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독재라면 당분간은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뭐 또 누군가는 그 보이지 않는 독재로 배를 불리겠지만 말이다. 만인을 위한 정치는 없다.
결국 독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들은 바로 돈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이 현재의 독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새로운 독재로의 전환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돈을 이용해서…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영구히 소유할 수는 없지만 잠시 임대할 수는 있다. 양심도 팔면 돈이 된다. 눈에 보이는 혁명은 인간들이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혁명은 자본이 한다.
가난한 혁명가는 피를 흘리지만 똑똑한 자본가는 돈을 흘린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글짓는 목수(Carpenwriter) 유튜브 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