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서]페르난두 페소아 - 서른네 번째-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다. 심지어는 벗어나고 싶은 것조차, 나에게는 없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원하는 것이 없는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은 인간이 서로를 원하도록 만들었고 또한 그 둘이 하나 되는 고통을 겪도록 만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이걸 한 겨울 땅 속의 두 마리 고슴도치로 비유하기도 했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서로 붙어서 체온을 유지해야 하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가시가 서로를 깊숙이 찌른다. 얼어 죽을 것인가 아니면 가시가 파고드는 고통을 감수할 것인가?
하나이면 둘이 되려 하고 둘이 되면 다시 하나 되려 하는 건 고통을 회피하려는 행위이지만 사실 이건 고통을 다른 고통과 계속 맞바꾸는 행위일 뿐이다. 홀로 완전하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이 고통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독신자가 결혼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결혼한 사람이 혼자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과 같았다. 결혼을 할
때 우리는 단지 ‘혼자 사는 사람의 고통’을 ‘결혼한 사람의 고통’과 맞바꾼 것이다’”
어느 독서 모임의 단톡방에서 누군가가 올린 글이 나에게 글감을 던져주었다. 인류는 고통을 회피하는 방식을 선택하며 발전해 왔다. 추위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불을 피우고 옷을 입었으며 떠돌아다니는 방랑의 고통을 겪지 않으려 농사를 짓고 정착 생활을 시작했으며 모든 생활의 불편함(고통)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사물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고통을 계속 회피하지만 고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한 가지 고통의 회피는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계속 망각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럼 어디 예를 한 번 들어볼까? 자동차의 발명은 인간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이동시간의 단축으로 원거리 교류와 물류를 가능케 만들었다. 이 엄청난 편의는 우리에게 이동 시간과 에너지 소모를 줄여줬지만 두 발로 걷는 시간을 빼앗아 갔기에 인류에게 비만을 안겨주었다. 수만 년 전 과거 유목 수렵 채집인에게 비만은 없었다. 인류의 탄생 이후 수십만 년의 역사에 비하면 비만 유전자가 탄생한 건 그리 길지 않다. 삼시 세끼를 먹으며 포만감에 취해있는 육체는 잉여 영양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몸에 축적한다. 그건 오랜 시간 사피엔스 유전자가 유목 생활의 척박함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다.
비만은 만병의 근원임은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우리가 이동의 고통을 줄이려 이룩한 발명과 발전이 인류에게 가장 큰 질병을 가져다주었다고 연관 지어 설명할 수 있지 않은가? 수렵채집 유목생활에선 비만을 가질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몸은 유목 생활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날렵한 몸으로 사냥과 채집을 하지 못하는 인류는 생존을 보장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동에서 운동으로
이동하지 않는 인간은 운동하는 인간이 되었다. 운동은 목적 없는 움직임이다. 항상 이동하던 인간에겐 운동이란 없다. 삶 자체가 운동이다. 우리가 다시 자동차를 포기하고 다시 수렵채집 시대처럼 걸어서 돌아다닐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동하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다람쥐처럼 제자리 뛰기를 선택했다.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뛰는 방식으로 시대의 변화 속도에 따라오지 못하는 유전자를 속이는 방식을 통해 수렵인의 육체를 유지하려 한다. 탄력 있는 근육과 오랜 시간 걷고 뛰어도 지치지 않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매일 운동한다. 하지만 이 신체적 능력은 원래 수렵활동을 위해 필요한 능력이지만 이제는 그저 오래 건강하고 매력적으로 살기 위한 행위가 되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컴퓨터로 일을 하며 앉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지시 함에도 우리는 수렵인의 몸을 원한다. 모순이다. 필요 없이 과도한 신체능력을 가지고 전혀 상관없는 정신능력으로 일을 한다.
과거 회사를 다닐 때 우리 팀원 중에 몸짱 직원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각종 식이요법(고단백 저지방)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헬창 몸을 가졌다. 그런데 그도 나와 같이 거의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손가락만 움직이는 일을 했다. 그 많은 근육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것들이지만 그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일과 운동을 위한 매일을 살았다. 육체가 1차적이고 실제적 기능이 아닌 다른 기능을 위해 이용된다. 그는 말단 신입 사원이었지만 그의 몸은 사무실 안에서 최상위였다. 근육은 남성미의 상징이기도 하다. 나는 그 신입직원이랑 사이가 좋아서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의 근육이 여성들의 지속적 관심을 끄는 요인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는 아직은 사회적 직책이나 직위가 아닌 몸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찾고 있었다. 물론 그의 강한 체력은 더 오랜 시간 야근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회사에게나 자신에게나 여러모로 나쁠 것이 없다. 회사도 병치레하며 골골대는 직원을 원치 않는다.
사랑을 바라는 그릇된 마음 = 결핍된 사랑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무언가를 원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많은 돈을 원하고 누군가는 강한 몸을 원하고 누군가는 높은 직위와 권위 혹은 명예 같은 것을 원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들이 그것을 원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의아해 할 수 있다. 고귀한 사랑을 왜 그런 속물적인 것들에 비유하냐고. 그들은 그저 인기, 즉 사람들의 관심을 원하는 자들일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도 관심의 한 종류이고 사랑 또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다만 나는 그들이 사랑을 추구하는 방식과 그 본질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사랑도 결국 주관적인 것이다. 그들은 돈(물질)과 몸(육체)과 권력(지위)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들이 가진 돈의 양과 몸의 품질과 권력의 크기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 크기가 관심의 크기이고 인기이다. 국민의 사랑, 대중의 사랑, 팬들의 사랑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오류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그것들을 잃고 나면 그와 동시에 사라지는 사랑과 관심 때문이다. 물론 이제는 그들이 그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더욱 슬픈 현실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걸 알기에 그것에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과 분리되면 자신의 존재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과 몸과 권력을 계속 더 원할 수밖에 없다.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표정
나는 가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의 표정은 어떠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런 자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더라. 그건 아마도 내가 살아오면서 그런 자를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또한 그런 자가 이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그런데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난 후, 어쩌면 그 자의 표정이 내가 생각하려고 그렇게 애쓰던 얼굴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표정과 시선은 무심해 보인다. 그리고 몸 또한 부서질 듯 연약해 보였다. 그녀의 표정과 시선이 그런 것은 현실에 비치는 자신의 겉모습에 무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숨어버렸다. 그녀는 그 관심이 두려웠던 것일까? 아무것도 원하지 않던 자신에게 무언가를 집어넣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세상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그런 무심한 표정과 연약함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가 써 내려온 이야기들은 모두가 원하는 것이 많은 자들이 저지르는 폭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폭력과 권력에 짓밟히는 자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서사했다. 많은 것을 원하는 자들은 아주 작은 것을 원하는 자들의 그것마저도 모두 앗아가 버리려 한다. 크고 강한 욕망은 언제나 작고 약한 욕망을 집어삼키며 더욱 몸집을 불려 간다. 이건 인간 세상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와도 같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 [마태복음 25:29] –
무언가를 원하는 욕망은 인간세상을 유지하고 발전시키지만 또한 인간세상을 파괴하고 타락시킨다. 모순이다. 인간은 욕망의 모순 속에 갇혀 살지만 그것이 모순인지 모른다.
과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능력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