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프란츠 카프카
“자아, 이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겠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문학동네) 중에서 -
누군가의 죽음이 나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 될 수 있을 거란 상상은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만약 나에게 해코지를 했던 사람이거나 나를 배신한 혹은 큰 상처를 준 사람이 죽었다면 그 소식은 겉으로는 표현할 수 없겠지만 속으로 기쁨을 느낄 것이다. 만약 그 대상이 가족이라면 아주 슬픈 일이지만 그때의 상황이 만들어내는 기쁜 감정은 죄책감과 함께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반대의 상황이라면 어떨까? 내가 죽었는데 누군가가 나의 죽음에 감사하고 기뻐한다면... 더군다나 나는 그 누구도 괴롭히지 않았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희생하며 온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 되어버린다면…
당신을 어떤 기분이겠는가?
카프카의 [변신], 독서토론에서 선정한 도서였다. 독서모임의 장점 중 하나라면 약간의 강제성을 가지고 고전을 읽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은 읽고 나면 후회가 없다. 하지만 참 손이 잘 가질 않는 책이기도 하다. 시중에는 수많은 베스트셀러들과 흥미로운 책들이 즐비하다. 시간은 제한적이고 보고 싶은 것들은 너무 많다. 그럴 때 집단 이성이 그런 많은 유혹들 속에서 결정 장애의 불치병을 잠재울 수 있다.
독서 후 독서와 연관된 활동이 있다면 그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생긴다. 그래서 독서 모임은 책을 읽게 되는 동기 유발 효과가 있다. 만약 그 모임의 사람들이 좋다면 더욱더 그렇다. 관계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관심을 가지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이 좋으면 싫은 일도 하게 만든다. 일도 좋고 사람도 좋다면 금상첨화이다. 나에게 독서모임은 그런 것 같다.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까지 인간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모든 언어활동포함한다.
초연히 홀로 즐길 수 있는 순수한 독서는 위대하다. 위대함은 어렵다. 쉽게 다가가야 한다. 관계를 통해 접근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바로 인간(人間) 아니던가. 책이라는 매개체로 관계가 연결되면 독서의 관심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다. 나는 그 과정이 반대로 되긴 했지만 이젠 상호보완적인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읽고 쓰기만 하던 독서는 이제 듣고 말하는 토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서론이 길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과거 어린 시절 바퀴벌레에 대한 공포의 회상으로 썼던 에세이(앞만 보는 바퀴)가 다시 떠올랐다. 그 에세이는 나의 어린 시절 공포스러운 추억이긴 했지만 나중에 그 기억이 새로운 통찰을 가져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는 하찮은 미물과 사소한 일들 속에서 그런 통찰을 얻을 수 있지만 일상의 분주함과 수많은 유혹들에 끌려다니며 그것에서 멀어진다. 이번에 읽은 [변신]은 한 단계 더 나간 통찰을 가져다준다.
앞만 보는 벌레
카프카는 왜 하필 벌레를 선택했을까? 그가 묘사하는 벌레는 마치 커다란 바퀴벌레를 연상케 한다. 바퀴벌레에 사람 얼굴을 한 그런 괴물 벌레가 떠오른다. 내가 고른 책은 더욱이 그런 그림(삽화)이 들어간 책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카프카는 출판사에 책 표지를 만들 때 벌레의 형상을 묘사하지 말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그 상상을 독자에게 맡기려 했던 모양이다.
바퀴벌레는 후진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어린 시절 나의 귀 속으로 들어간 바퀴벌레가 참기 힘든 고통을 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전진하기 위해 나의 고막을 뚫어버릴듯이 긁어댔다. 바퀴는 그 대가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나의 어린 시절 이 이야기가 마치 카프카의 벌레와 닮아있다.
앞만 보고 가족과 직장을 위해 달려온 ‘그레고르’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진짜 앞으로만 전진하는 바퀴 벌레가 되어버렸다. (나의 상상을 위해 바퀴벌레로 특정 짓는다) 말도 안 되는 비현실과 현실이 공존하는 소설이다. 이런 소설의 배경설정을 이해하려면 카프카의 삶을 조금 드려다 보면 눈치를 챌 수 있다. 그는 ‘노동자 재해 보험 공사’에서 일을 오랜 시간 일을 했다. 아마도 직장에서 수많은 산업재해를 당한 가장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아마 거기서 영감을 얻어서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노동 현장에서의 사고로 인해 더 이상 정상적인 일과 생활이 불가능해진 가장들의 모습은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바퀴벌레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부모와 여동생을 부양하며 정신없이 살아온 영업직원 그레고르, 그는 자신이 부재한 삶을 살았지만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바퀴벌레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버린 것이다. 바퀴 벌레처럼 앞으로만 달리며 살다가 진짜 벌레가 되어버렸다.
“‘내쫓아야 해요!’ 여동생이 소리쳤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 저것이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 프란츠 카프카 [변신], (문학동네) 중에서 -
처음에 바퀴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본 가족들은 경악했지만 그가 아들이고 또한 오라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에게 음식도 내어주고 한동안 그를 보살펴 준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해 그레고르가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 더 이상 돈도 벌어오지 못하고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자신들에게 전혀 도움도 되지 않으며 주변의 시선과 불이익에 그를 버리기로 결정한다. 그것도 그가 다 듣고 있는데 말한다. 그들은 바퀴벌레로 변한 그가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동물에게 못 알아들을 거라고 막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물도 미물도 모두 느낄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어린 아기가 말을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지만 말 못 하는 어린아이가 그것을 더 오래 기억하고 무의식 속에서 평생을 가지고 살아간다. 오히려 말귀를 알아먹는 어른들이 그런 걸 더 잘 잊어버리며 살아간다. 남일 신경 끄고 살아야 한다면서…
존재의 이유를 끊임없이 증명하는 존재
카프카는 인간의 존재의 이유를 한 인간을 벌레로 만들어 버리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선 국가와 사회와 가정에서 그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설명하고 증명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닐까? 자본을 창출하지 않고 일을 하지 않고 음식만 축내는 바퀴벌레 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순간 그동안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다는 앞으로 그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그리고 그 삶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로 그 존재를 평가한다.
나에게서 쓴 물 단 물을 다 뽑아낸 존재들로부터 소외되어 버린다. 무서운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단이도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 계속 벌고 쓰며 올라가고 또 올라가야만 한다. 가족과 사회와 국가에게 물질적 외형적인 성장과 풍요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산업자본주의 세상에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고 가치를 지닌다. 부가가치 창출과 자본증식에 기여하지 않는 존재는 바퀴벌레와 같다. 기생충이다.
사회에서 소외되는 존재들
요즘 등산을 많이 다닌다. 부산에는 산이 많아서 등산하기 좋다. 옛날에는 다니지 않던 새로운 등산로를 여기저기 누비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산에서 주택가로 들어서는 경사진 산기슭 주변에 왜 그리 요양원이 많은지 신기할 정도였다. 사회의 노령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늘어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노인 요양원이다. 집 주변이나 시내 같은 번화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 그것을 실감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이 요양원들이 대부분 외진 곳 특히 산 중턱의 등산로의 입구 근처에서 많이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늙고 병든 노인들은 이제 사회와 가족들로 분리되어 자연과 사회의 그 어떤 곳에도 속할 수 없는 그 사이에 존재한다. 그들도 한 시대를 호령하고 역사를 만들어온 자들이지만 이제는 그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고 죽음을 기다리며 소비만 하는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물론 그 덕에 실버산업과 연명의료산업은 호황을 누린다. 내가 속한 독서모임에는 간호사분들 몇 있으신데 그들은 일이 없어서 먹고사는 걱정은 전혀 없어 보인다. [변신] 토론에서 그들이 들려주는 거동이 불편하고 치매 같은 정신질환을 앓는 노인들과 그런 능력을 상실한 재해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카프가가 전해주는 이야기 보다 더욱더 현실적이고 잔혹하게 느껴졌다.
노동력이라는 경제적 가치로 존재의 가치로 증명하는 사회에서는 전자의 가치가 상실되는 순간 후자의 가치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왜 이렇게 앞만 보며 돈과 지위에 목숨을 걸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는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일을 어찌 알겠는가? 하루아침에 어떤 변고를 당해 불구의 몸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코로나19가 닥칠지 몰랐고 비행기가 추락할지 몰랐고 배가 가라앉을지 몰랐다. 오는데는 순서가 있을지언정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
불치병(쓸모없음)이 만든 상실감
카프카는 사랑하는 여인(펠리체)과 약혼을 하고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각혈을 하며 폐결핵이라는 당시에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을 가진 사실을 알게 된 후 연인과 헤어져야 했다. 둘의 헤어짐이 어떤 과정이었는지는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사랑도 결국 현실(육체)의 온전함이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카프카는 아마도 그런 상실감을 직장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처절하게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의 몸이 온전하지 못해 제 노동력을 상실하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가족과 연인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현실의 사랑이란 이런 많은 조건들이 부합해야만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사랑은 경제적이고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설사 그 시작이 순수하고 본질적이었을진 몰라도 사랑이 현실과 결합하려면 이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요즘 남녀는 사랑과 결혼을 분리해 생각하는 현명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세대들은 그것을 곱지 않게 바라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인식은 아직도 이것이 하나의 연결선 상에 있어야만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곳곳에서 모순적인 현상들이 벌어진다. 그럼에도 그 인식의 쉽게 바꿀 수 없다. 그건 그 인식이 기존의 사회와 국가를 지탱한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인간의 생각이 바뀌어도 그 시스템과 체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가?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에 따라 변해가는 인간과 그 변화에 저항하고 기존의 가치에 체제를 유지하려 하는 자들이 맹렬하게 싸운다. 이건 자신의 삶의 뿌리가 어디에 더 오래 있었냐의 문제와도 같다. 각자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100년을 더 살아야 할 소년(or 불치병 환자의 가족)과 10년을 더 살아야 할 노년(or 불치병 환자)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이 더 소중하다고 누가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만약 소중함과 우선순위를 경제적, 사회적, 국가적으로만 판단한다면 나는 절대 늙지 말아야 하며 다치지 않아야 하며 계속 노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계처럼...
“그는 가족들에 대해 감동과 사랑의 마음으로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그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아마 여동생보다 그 자신이 더욱 단호할 것이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문학동네) 117p -
가정과 사회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상실한 자는 결국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문화강국’인 동시에 ‘자살공화국’이라는 모순적인 오명을 가진 한국은 뭔가 잘못되었다. 화려함 뒤에 가려진 참혹하게 냉혹한 현실은 결국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을 조장하게 된다. 차라리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더라면 좀 덜했을 것이다. 왜냐 모두가 우울하면 우울함은 오히려 연민과 동질감이 된다. 하지만 세상에 각종 매스컴과 SNS에 보이는 다른 이들의 삶과 세상의 평균이라는 것이 나와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면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야 함이 모두를 위하는 길이라는 거라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생명체(동식물)들은 그 존재를 스스로 부인하고 스스로를 죽일 수 없다. 유일하게 인간은 그것이 가능한 동물이다.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영장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가장 불행한 생명체 일지도 모른다.
왜냐 존재의 이유를 계속 증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숨 쉬고 있다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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