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희망: MAID] 스테파니 랜드
“수 세대에 걸친 학대의 고리를 끊으려고 하는지도요”
- 스테파니 랜드 [조용한 희망: MAID] 중에서 -
우리는 무의식 중에 누군가로부터 학대받았고 그 학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행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건 내가 처한 벗어날 수 환경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학습된다. 그리고 이건 내가 가장 무력하고 연약한 시기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된다.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되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 그 학습된 행동은 누군가에게 발현된다.
“자신이 약할 때 당한 수동적 경험을, 힘이 생겼을 때 능동적인 경험으로 만들면서 트리우마의 대물림을 지속하는 것이다. “
- 권혜경 [감정 조절] 중에서 -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고 누군가는 가해자가 된다. 하지만 사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사라진다. 피해자는 가해자였고 가해자는 또한 피해자였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살아간다. 우리가 그 수 세대에 걸친 학대의 고리를 끊으려면 그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럼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것만이 수 세대에 걸친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유일한 길이다.
장편의 드라마를 시청했다.
좀처럼 장편 시리즈 드라마는 손을 대지 않는 나지만 지인의 추천으로 보게 된 드라마는 끊어낼 수 없었다. 그건 아마도 그 드라마가 품고 있는 내용과 그 배경이 나의 과거를 계속 상기시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해마 속의 기억을 떠올리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보통 영상시청은 시신경에 의해 입력된 영상을 전두엽에서 그대로 찍어내는 과정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생각 없이 영상을 따라서 즐기는 쾌락적인 활동이 될 수 있다. 물론 오락영화나 액션영화 같은 경우엔 그럴 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 그런 영화나 드라마는 계속 멈추게 된다. 그래서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데 러닝타임 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영화관 혹은 다른 사람과 함께 시청을 한다면 그럴 수 없다. 그럼 순간순간 떠오르는 상념들과 생각들을 잡아둘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상념을 던져주는 영화는 혼자서 시청해야 한다. 나에게 영화나 드라마를 함께 본다는 것은 (깊은) 감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관계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것이다. 만약 영화를 보면서 계속 내가 멈추고 싶을 때마다 멈추고 화면을 캡처하고 메모를 한다면 상대는 짜증 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영화의 감상을 생각으로 옮겨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난 영화관을 잘 가지 않는다. 멈추고 찍고 생각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주입하기 바쁘다.
서론이 길었다.
지인의 추천으로 보게 된 이 영화는 동명의 소설 같은 에세이를 장편의 드라마로 만들었다. 작가는 자신의 삶 속에서 겪은 일에 자신의 기억을 불어넣었다. 장르가 에세이인만큼 모든 이야기가 사실에 근거한 것들이다. 기억이 어떻게 얼마만큼 변형되고 창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상상의 정도가 커질수록 작가의 소설가적 기질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저자는 문예창작 전공 작가이다. 모든 이야기는 사실과 경험에서 시작해 상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왜 일기를 쓰는 훈련을 하는지는 이것과 연관이 깊다. 일기는 모든 글쓰기의 시작인 동시에 상상의 근원이 된다.
알렉스, 남자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여성의 삶은 남성의 삶 못지않게 거칠고 터프하다. 그녀는 가난과 학대의 대물림이 만들어낸 자신의 삶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끊임없이 기록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록하면서 계속 반추(反芻) 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주관적인 것 같지만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쓰면서 기억 속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분리시켜 관조할 수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뭔가 깨닫는다. 그리고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을 느낀다.
낙타로 살아간다
낙타처럼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를 주인이 밧줄의 끌려 같은 길을 계속 오고 가는 자신의 삶이 보인다. 낙타는 자신이 낙타인지 모른다. 분리시켜서 볼 수 있는 건 인간만 가능하다. 그럼 자신이 낙타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럼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알렉스는 남편의 학대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 기록하는 삶 속에서 해마 속에 갇혀 있던 과거 학대받던 어머니의 기억이 스멀스멀 편도체의 감정과 함께 전전두엽으로 올라온다. 그리고 자신을 본다. 비슷하다.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의 삶을 대물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반항하는 야수가 되어 날뛴다. 남편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려는 그녀의 처절한 투쟁이 시작된다. 그 시작은 경제적인 독립이다. 홈클리닝이라는 직업은 그녀에게 여러 가지 다른 인간들의 삶을 드려다 보며 자신의 삶과 비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다준다. 나 또한 호주에서 적잖은 시간 청소일을 하면서 많은 특별하고 쇼킹한 경험들을 했다. 그 경험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타인의 은밀한 공간을 본다는 건…
한국과는 달리 해외에는 홈클리닝 서비스를 이용하는 곳이 많다. 한국처럼 자신의 집을 누군가에게 드러내기 싫어하는 동양인에게는 다소 불편한 서비스이지만 해외 서양 국가에서는 보편적인 서비스이다. 물론 그들도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이런 홈클리닝 서비스는 보통 적잖은 시간 관계를 맺어온 신뢰할 수 있는 상대에게 맡긴다. 그래서 홈클리닝 비즈니스는 아주 폐쇄적이지만 또한 지속적인 수입을 보장해 주는 개인적인 신뢰가 기반이 되는 비즈니스다. 그래서 이 일은 쉽게 멈출 수 없다. 인간관계와 같다. 관계를 끊고 맺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나 또한 호주에서 청소일을 하면서 부잣집, 독거노인, 신혼부부 가정의 홈클리닝부터 초등학교, 이사청소, 이니셜(신축공사후) 청소까지 안 해본 청소가 없다. 목수일이 끊겼을 때는 전업으로 했고 목수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주말마다 투잡으로 뛰었다. 그리 오랜 시간 하진 않았지만 틈틈이 계속했다. 많은 에피소드들이 떠오른다. 기회가 되면 나도 작가처럼 청소일을 했던 기억들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쨌든 청소일을 하면서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은 저마다 가정에는 그들만의 삶의 형태와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집안을 계속 들여다보다 보면 그들의 삶이 보인다. 모두가 다 다르다. 우리가 겉으로 보는 다른 이들의 삶이 다들 비슷해 보이는 것 같지만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된다면 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게 홈청소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해야 할까? 남의 은밀한 공간을 공식적으로 훔쳐볼 수 있는 기회이다. 내가 한국에만 있었더라면 절대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타인의 삶 속에 나의 삶
저자도 홈청소를 하면서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때 그때 그 과정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이 단편에서 장편으로 늘어가고 사실에 상상이 뒤섞이고 타인의 삶 속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진한 감동을 가져다준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살다 보면 말 잘하는 사람들 그리고 글 잘 쓰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된다. 그런데 그 말과 글이 재밌고 흥미롭긴 하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이나 허전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건 그 말과 글이 자신의 삶과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은 배제된 타인의 삶과 다른 이야기(책) 속에 흥미로운 사실들을 인용해서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든다. 그런 말과 글은 실용적이고 유익하다. 다만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지 않아 공감과 감동이 덜하다. 이건 마치 깨달음을 주는 철학서나 인문서와 같다고 해야 할까?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문학이 지닌 공감과 감동이 부족하다. 하지만 우리는 감성을 지닌 동물이기에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감동을 곁들인 깨달음을 더 오래 기억한다. 깨달음이 감동과 함께 하면 영원히 기억된다. 그래서 앎과 삶이 연결된 스토리가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다면 철학과 교수나 인문학 강좌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야 맞다. 하지만 그들도 고통과 권태를 오고 가는 삶을 사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날 정말로 아는 사람은 너뿐이야! 내 본질을 아는 사람 말이야”
- [조용한 희망, MAID] 중에서 -
극 중에 알코올 중독자 남편인 ‘닉’이 알렉스에게 말한다. 나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은 어쩌면 가장 상처받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나를 모르는 완전한 타인은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물론 신체적 상해는 가능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나 묻지 마 폭행 같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정신적 트라우마와 감정적 상해를 주는 건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쇼펜하우어는 이걸 한 겨울의 고슴도치 한쌍으로 표현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가시가 서로를 찔러서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서로 떨어지면 얼어 죽는다. 죽지 않으려면 고통을 참아야 하는 관계이다. 종종 가족이 그런 존재로 비유된다. 영화 속에서도 알렉스에게 부모와 남편이 그런 존재이다. 다만 남편은 말 그대로 남이 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다는 것이 다르다. 끊어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몸은 섞었을지라도 피가 섞이지 않으면 끊어낼 수 있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가족이라고 모든 것을 드러낼 순 없다. 가족은 모든 것을 이해해 주리라는 생각은 어쩌면 가장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혹은 누군가를 이해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오직 사랑하거나 혹은 오직 미워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중략..) 이해한다는 것은 사랑을 잊는 것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사랑이 사라져 가는 과정이라는 이 말이 와닿는 것은 사랑은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생겨났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理解) 관계는 이해(利害:이익과 손해) 관계와 동음이의어지만 사실 이 둘은 아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상대를 이해하는 과정은 상대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이익이 되는지를 판단하는 과정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의 결합은 항상 경제 공동체로 나아가고 사회 공동체 기본 단위로 편입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랑은 이 샴쌍둥이 같은 ‘이해’라는 녀석과 친해질 수 없다. 그래서 과거 마르크스와 에리히 프롬은 이해(理解)가 필요하고 이해(利害)를 판단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랑이 지속되기가 힘들다고 봤다.
우리의 사랑이 현실의 삶 속에서 점점 식어감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사랑은 언제나 현실의 이해와 또 다른 이해 앞에서 파괴되고 분해되어 버린다. 그럼 또다시 사랑을 찾아 나선다. 사랑과 미움 그리고 다시 사랑과 미움을 반복한다. 그 과정 속에 누군가는 가해자가 되고 또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며 그 역할은 서로 바뀌어 가며 계속 반복될 뿐이다.
이 악의 대물림을 끊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당신은 알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