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 토론에 관한 상념
성비 불균형의 토론이었다.
4명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시작된 독서 토론이었다. 독서 토론 모임은 왜 여자들이 더 많을까? 독서 토론에 참석하면 책이 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더 많이 참석한다.
내 나이 전후의 남자(40대 전후)라면 아마도 사회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사회와 조직에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시기일 가능성이 크다. 많은 일과 관계 속에서 주어진 역할을 소화해 내느라 책보다는 그것들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여가 시간이 생기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다른 정신적, 육체적으로 즉각적인 방법(레저, 술, 유흥, 오락 등등)들로 채워갈 가능성이 크다. 과거 나도 그랬다.
물론 여자들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이 있겠지만 결혼과 출산을 한 여성이라면 자녀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여자들은 이전보다는 많은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때가 되면 적잖은 여성들이 엄마와 아내가 아닌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럼 이 역할로 엮여 있는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와 환경을 찾게 된다.
변화는 언제나 환경과 관계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환경과 관계의 변화 없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은 아주 힘들다. 하지만 남자들은 기존의 직업적 사회적으로 연결된 관계를 더 확장하고 넓히면서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고 높이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상승하는 사회적 지위와 그에 따른 물질적 보상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는다. 이 존재감이 커질수록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진정한 자아는 계속 억압되고 그 억압된 자아가 다른 형태로 표출된다. 부와 권력으로 우월감을 표출하는 형태이다. 이건 수컷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부와 권력이 없던 때는 동물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를 보이다가 성인이 되고 사회화가 되면 이성적으로 시스템을 이용해서 발휘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성공한 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남자들은 사회에서 위대한 성공을 향해 달리느라 이런 소소한 성장에는 관심이 적은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시기에 차이만 있을 뿐 언젠가 이런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그것이 빠를수록 좋지만 성공에 취해서 너무 늦게 그것을 깨닫는다면 아마도 성공의 크기만큼 후회도 큰 마지막을 맞이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여튼 남자들의 부재로 여성들 틈에서 독서 토론의 호스트를 맡았다. 더욱이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남녀 간의 갈등으로 모든 사건 사고들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주제로 토론을 진행해야 하는 것이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제우스는 신이 아니라 짐승이에요"
"제우스가 왜 신들의 신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모든 일들이 생겨났어요, 제우스의 바람기 때문에"
여성들의 제우스에 대한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21명의 아내와 43명의 자녀를 만들었다. 제우스는 천둥(번개)의 신인 동시에 바람의 신이기도 하다. 바람처럼 이리저리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바람을 피운다. 이런 남자를 달갑게 생각할 여성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제우스가 없었다면 그리스로마신화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럼 서양 문학과 철학의 상당 부분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리스로마신화는 서양문화의 근원이다. 제우스는 그 근원의 핵심이다. 우리는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는 모두 호모데우스를 꿈꾼다. 전능한 제우스가 되고 싶다.
남녀의 갈등에서 시작
그리스 로마 신화는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벌어지는 외도와 질투에서 모든 스토리가 파생되어 나온다. 제우스가 열심히 바람을 피우고 헤라가 질투심에 불타 그것을 막고 수습하고 다니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발생했고 우리는 그 에피소드에 열광한다. 흥미진진하다. 그건 인간이 가진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신들의 모습에서 쾌감과 불쾌감이라는 모순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종합선물세트를 제공한다. 그리스로마신화는 불륜의 고전이라고 봐야 할까? 성경에서도 아담과 하와의 갈등으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신들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 제우스의 바람기와 헤라의 질투심이 신들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만들었다.
"다들 가장 마음에 드는 신을 한 명씩 얘기해 볼까요?"
수많은 신들 중에 가장 인상적인 혹은 자신의 이상향을 물었다.
"아프로디테요"
참석자의 과반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로마식: 비너스)를 선택했다. 나는 아테나 여신을 선택했다.여성들의 미에 대한 갈망 그리고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잘 드러는 부분이었다. 아프로디테의 러브스토리는 아주 흥미롭다. 그리고 그녀가 미의 여신이 되는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아프로디테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자의 미를 향한 욕망이 전쟁을 불러왔죠”
“남자의 미를 향한 욕망이 전쟁을 부른 거죠”
나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이 트로이 전쟁을 불러왔고 수많은 희생과 국가의 멸망을 가져왔다고 말했고 여자분들은 한 남자(파리스)의 여자의 아름다움(미모)을 향한 욕망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봤다. 파리스가 헤라, 아테나 그리고 아프로디테의 3가지 제안 중에서 아프로디테의 제안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같은 현상으로 봐도 남녀의 관점이 달랐다. 이것이 평등한 토론의 매력이다. 같은 책을 봐도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건 서로가 동등한 지위에서 동등한 발언권을 가질 때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4:1이라는 수적인 열세로 인해서 나의 생각이 조금 위축되긴 했지만 그들도 나의 생각을 존중해 주었다. 존중해주지 않을 수 없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서토론의 모토이기 때문이다.
아름답다는 것에 관하여
남자나 여자 모두 아름다운 존재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외적으로 드러나는 외모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외적 아름다움은 건강과 젊음을 전제한다. 젊고 건강하지 않은데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경우는 드물다. 건강하고 젊은 여성이 화장과 성형 거기에 패션이 더해지면 (외적) 아름다움이 최고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모든 여성들이 안티에이징과 헬스케어 그리고 뷰티패션에 열광하는 이유이다. 그럼 왜 여성들은 그것에 열광하는가?
남성이 그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뭇 여성들은 이 말에 반감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리스로마신화 속에서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헤라와 아테나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는 글자가 적힌 사과의 주인을 놓고 제우스에게 판결을 해 달라고 요청한다. 아내(헤라)와 맏딸(아테나)이 두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는데 아프로디테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우스는 책임을 전가한다. 인간 중에서 가장 잘 생기고 공정하기로 유명한 '파리스'라는 남성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이건 결국 여성이 아름다움을 남성에게 인정받고 싶어 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굳이 남성에게 그 판단을 맡기겠는가. 차라리 최초의 여신이자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찾아가야 맞지 않은가?
여성의 아름다움의 추구는 결국 남성의 관심을 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남성이 그것을 선호하기 때문이고 그건 남성이 아름다운 여성이 즉 젊고 건강한 여성이 자신의 유전자를 잘 잉태하고 보존하고 양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한 생명체의 본성을 이용한 것이다. 아니 유전자 그 자체가 본능이다.
인간은 그저 그 본능에 충실한 것이다. 다만 인간은 이성적이라는 가면 때문에 그런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동물 같은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본능적임을 이성적인 것처럼 보이려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난 이것이 여성이 아름다움을 대하는 모순적인 태도라고 본다.
“자신을 가꾸기 위함이죠”
“자존감을 올려주기 때문이죠”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이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칫 남성에게 의존적으로 보일 수 있는 원초적 본능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다. 현대에는 여성들이 스스로 부와 권력을 가질 수도 있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의 부와 권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헤라는 제우스가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여신들과 여인들에게 무례하고 가혹한 해코지를 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녀가 제우스를 떠났다면 아마 다른 여신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태 전말에는 한 여성이 등장한다. 최고 권력자의 뒤에서 그 힘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여자이다. 여성은 은밀한 둘 만의 공간에서 남자를 컨트롤한다. 그건 여성이 가진 아름다움의 위력이 아니던가? 그래서 지혜 없는 (외적)아름다움만 추구하는 여성은 위험하다.
헤라가 제우스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그와 같다. 이것이 정실부인의 권력이다. 제우스는 요즘 같으면 당장 이혼 감이지만 부와 권력을 지닌 남성을 ‘사랑’없이도 자신에게 묶어두어야 함은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부귀와 권력을 놓을 수 없기 때문 아니던가?물론 현대사회에서는 권력은 몰라도 부는 떼어올 수 있다.
“결국 돈 때문에 못 헤어지는 거죠 뭐”
얼마 전 누군가로부터 들은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뇌리에 맴돌고 있다. 결혼은 사랑의 공동체가 아닌 경제적, 전략적 공동체로서의 기능만 남게 된다. 보험이나 채권 같은 노후 안전망이라고 해야 할까? 사랑은 사라진 지 오래다. 관련 호르몬 분비(도파민, 세로토린등)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화가 날 때 분출되던 호르몬(아드레날린, 코르티솔등)도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미움조차도 남지 않았다. 에너지를 쓰는 것이 싫다. 무관심이다.
인간관계의 최악은 바로 무관심이다. 관심이 있다면 사랑 혹은 미움의 뉘앙스를 가진 감정이 생기지만 길에서 지나가는 행인에게서 우리는 이런 것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옆에서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상대에게서 지나가는 행인과 같은 무관심으로 대할 수 있다면 이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남과 다를 바가 없다.
적지 않은 부부와 연인들이 이 모순적임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다. 신인류의 신관계가 탄생한 것이다. 산업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고 400년이 지난 시점에 새로운 인간관계의 형태가 생겨난 듯 보인다. 감정(비물리적)과 물질(물리적)의 관계가 나뉜 것인가? 그건 현재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과 엮여있는 수많은 이해관계(물리적)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우리에게 만들어준 연결의 고리이자 구속의 족쇄이다. 그것을 연결이냐 구속이냐 판단하는 기준은 ‘사랑’과 ‘믿음’의 소멸 여부이다.
“현대의 산업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교환의 공정성이라는 원리다. 사회와 기업은 개인과 소비자들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서 실질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이기심과 소유욕 그리고 소비욕이다.”
- 박찬국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읽기] 중에서 -
사랑은 공정이라는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공정하게 사랑하려 한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사라진 것이다. 사랑은 더 주고 싶고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사랑은 고귀하다. 고귀한 것은 언제나 이용당하게 마련이다. 고귀한 사람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그것을 이용해 득을 보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고귀함을 추구하는 저속함은 새로운 모순적인 인간관계를 만들어 내었다. 함께 살지만 함께 할 수 없는 관계 하지만 과거에는 그런 모순을 고통스러워했다면 이젠 그것이 마치 숨 쉬듯이 자연스러워진 인간이 나타났다.
그런 사람을 정의하는 단어는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관계를 중도적 인간관계 혹은 사이 인간이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