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판단을 하지 말라. 그러면 네가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이 사라질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4권 7장 -
판단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판단을 하지 않으면 행동할 수가 없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인간이 아무 판단도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자연 속의 동식물처럼 태초에 순수한 본성으로만 산다?! 그러면 인간이 그토록 바라고 지향하는 평화가 생기지 않을까?
인간은 그럴 수가 없다. 자연 상태에 그대로 머무는 것을 거부하는 또 다른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이 모순적인 것은 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본성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생각이 판단으로 보이고 있는 과정이다. 생각에만 머물면 이것은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생각이 글이 되면 그렇지 않다. 글은 비평과 평론의 대상이 아니던가? 글은 화석화된다. 글은 자신을 드려다 보는 방법이지만 또한 타인이 나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어쩌면 글의 탄생이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면서 자연적이지 않은 문명의 발전으로 나아가는 시초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과거 성인(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들은 말을 글로 남기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
올해는 명상의 글로 시작하는 아침을 맞고 있다. 최근 산을 오르면서 오디오 북으로 [명상록]을 완독을 한 후 그때 귀 속을 울렸던 많은 문장들을 이제 아침에 눈으로 담고 있다. 로마의 오현제(五賢帝) 중 마지막 황제가 남긴 글귀가 매일 새벽 나의 명상의 시간을 함께 한다. 현자의 글은 세월이 흘러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지난 일 년간 매일 아침 불안[불안의 서]을 들여다보았다. 인스타피드와 독서 모임의 단톡방에 매일 불안에서 피어오른 글귀들을 남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현인들은 글을 남긴다. 성인과 현인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성인은 글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생각을 바로 말과 행동으로 옮긴 인물들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인들이 남긴 글은 모두 그들의 제자들이 후대에 기록한 것이다. 화자와 필자가 다르다. 대필이다. 화자가 검수하지 못한 대필이다. 무엇이 걸러지고 부연되었는지는 필자들만 알 것이다. 제자들은 성인을 만나 현인이 되었다. 성인은 현인을 길러내는 사람일까?
현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기면서 판단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그다음의 부차적인 문제이다. 대부분의 현자들은 글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언행이 일치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진다고 반드시 생각하던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글과 삶의 괴리다. 글은 이상적이고 삶은 현실적이라 그렇다. 현인들은 이 괴리를 줄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자라고 볼 수 있다.
행동하지 않는 현인
그래서 행동하지 않는 현인들도 있다. 이런 자를 우리는 문인이라고 표현한다. 문인은 생각을 글로 옮기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행동은 다른 이들이 한다. 공인(工人)과 상인(商人)과 무인(武人)과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문인의 글에서 지식과 지혜를 얻으면 더 나은 공인과 상인과 무인이 될 수 있다.
문인이 행동하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될 것이다. 하나는 앞에서 말했든 현실의 행동은 언제나 변수와 괴리가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둘째는 행동할 시간에 더 많이 생각하길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 서양의 문인들과 귀족들은 노비들과 상인들에게 여행을 시키고 그들의 말을 듣고 기행문을 썼다고 한다. 행동에는 시공간의 제약 따른다. 그들은 그 제약을 벗어나고자 한 것일 수 있다.
성인들은 그걸 알면서도 행동한 인물들이다. 그런 점에서 성인들은 용기 있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글을 쓰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을 쓰는 자는 사랑을 더 많이 알지만 사랑을 잘하지는 못한다. 사랑에 대해 많이 알수록 사랑할 수 없게 되는 되는 것과 같다. 중이 제 머리를 깎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꿈꾸기 혹은 행동하기.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이란 끔찍하다. 내 이성은 꿈꾸기를 혐오하고, 내 감수성은 행동하기를 역겨워한다. 행동이란 내가 부여받지 못한 천성이며, 꿈꾸기란 그 누구도 부여받지 못한 운명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2장 -
페소아도 행동하지 않기로 유명한 현인이다. 그래서 그는 문인 아니 문인보다 은둔 시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그는 끊임없이 글을 남겼으므로 절대 성인이 될 수 없다. 그의 글과 그의 삶은 서로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글 대로 삶을 살면 종종 위태롭다. 이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의 판단대로만 행동하면 삶이 힘들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시대를 앞서가는 자는 그 시대에 빛을 볼 수 없다. 그 빛은 언제나 후세 사람들에게 늦게 도달하는 빛이다.
생각의 차이
현인들의 생각은 앞서 있다. 현인들이 현세의 사람들과 같은 생각이라면 어찌 현인이 될 수 있겠는가? 그건 현세에 지배적이고 보편적인 생각과 충돌함을 의미한다. 회사에서 월급쟁이로 생활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페소아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기록으로 남겨 집 안에 있는 트렁크 속에 봉인해 버렸다. 생각과 판단은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그의 보이는 행동은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에 섞여 살았지만 섞이지는 않았다.
정신과 몸이 분리되어 사는 삶과 같다. 이것 또한 쉽지 않은 삶이다. 보통은 생각과 판단을 행동과 일치시키거나(지성의 사상가), 생각과 판단만 하거나(지식인, 문인), 생각을 바로 행동(혁명가)으로 옮기거나 아니면 홀로 생각만(시인 혹은 수도자) 하며 속세를 멀리한다.
하지만 페소아는 이도 저도 아니다. 누군가는 두 번째, 지식인과 문인에 속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살아생전에 교수나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지 못했다. 그저 무역회사 보조회계원으로 월급쟁이의 삶을 살았다. 나도 월급쟁이의 삶을 살아서 알지만 회사에 소속되어 생계를 이어가는 자는 생각을 판단(글)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만약 그 판단이 사회와 기업(경제)과 국가(정치)와 연관이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생각이 깊은 문인은 개인의 감성에만 머물 수 없다. 그 개인의 감정과 감성을 좌지우지하는 구조와 환경까지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이 문학인과 철학자가 해야 할 역할이기도 하다. 개인의 삶에만 머무는 글은 독자 개인들에게 공감을 받을 수는 있지만 구조적 환경, 즉 사회와 기업과 국가에 그 어떤 변화와 반향을 불러내지 못한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회사를 떠나고 난 후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소속된 몸이 쓰는 글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도 글을 썼다면 아마도 페소아처럼 그 글들은 블로그의 비공개 공간에 저장되었을 것이다.
혹여 그 글들이 생계와 이해관계와 삶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보이면 벌어질 수 있는 상황들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자유롭게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엮여있는 것이 많으면 그만큼 글도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그럼에도 계속 써야 하는 것은 그 행위가 극복과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없으면 삶의 속박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스스로를 들여다볼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누구도 삶을 가르쳐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질문이 많은 아이는 해소되지 못한 질문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품고 자랐다.
“여기가 학교냐? 여긴 가르쳐 주는 데가 아니다. 묻지 말고 일해라!”
성인이 되고 나서도 물을 곳이 없다. 어른들이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린 이유이다. 학교도 회사도 사회도 그 어디서도 물어볼 수 없다. AI시대가 도래했지만 그렇게 자라난 어른들은 AI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알 수 없다. 이런 시대가 도래할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생각을 드러내는 것, 즉 판단(언어)이 훈련되지 않았다. 판단이 언어로 보일 때 비로소 변화될 수 있다. 말과 글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원리다. 쓰지 않으면 늘지 않는다. 글은 말을 보이게 함으로써 말을 다듬는다. 왜냐 사람들은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반복되고 있고 정리되지 않고 어색한지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니 고칠 수도 없다.
언어(말과 글)는 부딪친다.
한 사람의 말과 글은 다른 이들의 생각을 불러낸다. 독서 토론을 하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을 듣다 보면 새로운 생각과 다른 관점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다가 생각지 못한 부분과 놓친 부분들을 타인을 통해 깨닫게 되는 즐거움이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없진 않다. 타인의 생각이 불쾌함을 불러일으키는 경우이다. 이건 내가 가진 삶의 가치관과 태도가 충돌될 때 생기는 현상이다. 어쩔 수가 없다. 즐거움을 얻는 대가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만 그 불쾌한 타인의 생각이 논리 정연하고 합리적이라면 나는 기존의 나의 생각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건 내가 타인에게 설득되는 것이거나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나의 가치관과 태도는 변화한다. 문제는 그 타인의 불쾌한 생각이 논리도 감성도 없이 감정만을 쏟아내는 아집일 때이다.
“(서두에 이어서) 생각이 사라지면, 피해도 사라질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4장 7절 -
피해가 사라짐은 이득도 사라짐을 의미한다. 아우렐리우스의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너무도 이상적이다. 인간이 세속에서 판단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없다. 모두가 자신의 판단을 드러내고 인정받으려는 곳이 세상이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을 방어하고 타인의 판단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공방전(攻防戰)이다. 삶이 전쟁터인 이유이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다.”
- [마태복음] 5장 34절 -
판단하되 맹세하지 말라는 말이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스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판단은 언제나 틀릴 수가 있다. 세월이 가고 시대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하듯이 나의 판단도 변할 수밖에 없다. 과거 8년 전에 썼던 나의 글이 지금 나의 생각은 아닐 수 있다. 그것이 글의 맹점이기도 하다. 글은 화석화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의 과거의 글로 들춰내 나의 생각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아니게 되었을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타인의 과거를 들춰내 현재를 판단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기록을 남기기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지만 과거를 통해서만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 글을 쓰는 것은 판단을 드러내는 것인 동시에 생각을 변화시킨다. 기록한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변화도 없다. 그래서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을 기록하여 판단의 대상이 되더라도 비판과 이견을 수용할 자세만 있다면 그 판단이 자신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절대적인 맹신이다. 그건 변화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엇을 맹신하는가. 판단하되 맹신하진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