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나눈 이야기 3] 닐 도널드 월쉬
"우리는 모두 '하나'다... 너희가 모두 하나인 듯이 행동하라. 내일부터 그냥 그런 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라."
- 닐 도널드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 3] 495p -
우리는 하나가 될 수가 없다. 하나 되면 나는 당신보다 우월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보다 낫다는 생각이 없다면 물질적 진보를 이룰 수가 없다. 물질적 진보는 정신적 진보와 그 방향이 다르다. 물질적 진보는 구별하고 분류하고 분리하면서 이루는 것이고 정신적 진보는 혼합하고 합류하고 통합하면서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들에 명확한 경계를 만들려는 것은 진보인 동시에 퇴보이다. 중요한 사실은 고도로 진화된 존재(고진재 -저자曰)는 물질이 아닌 정신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경계가 없고 더 풍요로운, 아무런 기준선도 그어지지 않은 그곳을...”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필로그 중에서 –
인간이 가진 구분하고 분류하고 분리하려는 습성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것이 또한 과학이 발전하는 방식이기도 한다. 정확히는 생명을 가진 대상을 연구하는 학문에서는 아주 명확하다. 백인과 흑인과 황인을 구분하는 뚜렷한 경계가 없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언어(네이밍: Naming)로 규정해 분류하고 분리시킨다.
왜 그럴까? 책을 읽으며 세상이 왜 이렇게 끊임없이 분열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 그것을 명확히 하려 글을 쓴다. 이 행위가 어쩌면 또 다른 분열의 씨앗일지도 모름에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나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좀 더 명확하게 세상을 인식하고 기억하고 발전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 나도 모순적이다.
왜 분열이 생길까? 내가 이 글을 기록하고 업로드하고 공유하면 이 글을 읽는 자들로 하여금 호감(긍정)과 반감(부정)이라는 서로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한 개인의 남다른 의견과 생각이 자신의 이해와 상충할 때 분열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신과 나눈 이야기], 책의 제목 때문인지, 이 책에 대한 선입견과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 때문인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듯하다. 그건 이 책이 과학자도 철학자 그렇다고 문학인도 아닌 자가 과학적이고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자는 그저 감성 에세이나 쓰는 것이 세상의 이치에 맞다.
증명된 사실도 과학적 증명도 없는데 사람을 홀릴 수 있을 여지를 주는 글에 소중한 시간을 할애할 순 없다. 사람들은 왜 그리도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나에게는 이런 류의 책이 더 많은 영감과 상상의 원천이 된다. 아마도 사람들은 상상을 하기 귀찮고 명확한 정보와 지식 습득을 위해 독서를 하는 자자가더 많은가 보다.
분류와 나누기 능력 = 실력
나는 그 반대이다. 명확한 정보는 더 이상 나에게 큰 의미가 없다. 정보와 지식은 AI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나는 차라리 AI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을 던지길 선호한다. AI도 그걸 더 원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건 AI가 단순히 분류를 통해 찾아주는 기능이 아닌 (머신) 러닝의 과정으로 돌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색인 능력(분류, 구분)은 이제 가치 없는 능력이다.
법학과 의학이 AI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직군이라고 한다. 적잖은 세월 동안 수 없이 쌓여온 수술의료 데이터와 판례와 법조문 데이터에서 현 상황(조건)에 맞는 것을 찾아내는 것은 AI에게 누워서 떡먹기처럼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왜 그리도 분류하고 나누려 했는 지가 이해가 되지 않는가? 판사, 의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 아닌가? 전문직 고소득에 존경과 추앙을 받는 직업이다. 그들이 잘하는 것이 바로 색인이다. 환자를 상태를 보고 병명을 판단하고 치료법과 수술법을 찾아내는 일, 사건을 보고 적절한 판례를 찾고 법조문을 찾는 일이다. 그렇게 잘 분류하고 분리해서 부와 명예를 얻는 방식이 이제 위태롭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가진 기존의 기틀이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그건 그들이 가진 사회적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그들도 그들이 이뤄놓은 부와 명성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기 전에는 그 자리를 스스로 짓밟는 멍청한 짓을 할리 만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건 시간의 문제일 뿐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성공한 자 = 나누는 자
잘 나누는 자가 성공해 온 시간은 세상을 너무 많이 쪼개고 나누어 놓았다. 우리는 그렇게 명확하게 정의되고 분류되는 세상이 발전된 세상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명확해질수록 분열도 심화되어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 세계는 분열의 도가니처럼 서로가 반목하고 공격하고 있다.
이건 모두 내가 너 보다 우월하다는 우열을 가르는 데서 기인한 것 아닌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말하고자 한 것도 그것 아닌가? 인간이 분류한 정의가 너무 오랜 세월 인간의 관념을 지배해 왔고 그로 인해 많은 비극이 벌어졌다. 우월한 종족은 열등한 종족을 죽일 명분을 얻었고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를 억압하고 지배할 수 있는 질서를 만들었다.
과거 회사에서 내가 가장 많이 쓰는 업무 툴은 엑셀이었다. 수없이 나눠진 격자의 칸 안에 데이터를 넣고 서로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또 다른 분류의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일, 오랜 세월 그렇게 수많은 경계선으로 분리된 데이터를 보다가 지금은 경계를 알 수 없는 언어의 세계로 옮겨왔다. 사실 나는 글을 쓸 때 무의식적으로 써 내려가는 버릇 때문에 초고에는 문단의 구분도 마침표나 쉼표 같은 것이 없이 막 써 내려가는 경우가 많다.
쉬지 않고 이어진 장문의 글은 한눈에 봐도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내가 쓴 글이기에 나에게는 잘 보인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런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독자도 고려하는 작가이다. 퇴고를 하면서 이 커다란 덩어리를 분리하는 작업을 한다. 보기 좋게 썰어서 독자님들께서 잘 씹어 드실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이 작가가 퇴고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특히 외모와 포장과 겉보기에 유독 민감한 한국인들에게는 불가피한 작업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빛 좋은 개살구가 많다. 그런데 한국은 이제 빛도 좋고 맛도 좋은 살구가 많다. 때문에 보기 좋은 것은 기본 옵션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보기에 그리 좋지 않은 잘 알려지지 않은 맛 좋은 살구를 찾아내는 것에 관심이 더 많다. 새로운 발견이다. 유행에 휩쓸려서 소비하는 독자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만들 수 없다. 앞으로 작가는 독창성이 생명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새롭고 흥미로운 관점을 많이 던져 주었다.
성장하는 자 = 합치는 자
이제 성공과 성장에 대한 내 나름의 개념이 생긴 것 같다. 물론 이 개념이 또 언제 바뀌게 될지 모르지만…. 성공과 성장은 함께 갈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이 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 대중은 명확한 것, 뚜렷한 것, 확실한 것, 증명된 것, 실패 없는 것에 대한 선호가 크다. 그래서 인간의 대부분의 활동은 그것에 초점을 맞춰서 움직인다. 보험 산업이 성행하는 것도 이런 불확실하고 불명확한 것들에 대한 명확한 보상(정량적=수치적 금액)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과 사람들을 통합하려 하는 자가 위험한 인물이 되어버리는 이유다. 여태껏 인류가 열심히 우열을 나눠 놨는데 그것을 무너뜨리고 섞어버리려는 행위는 어찌 보면 우등과 열등 중에 우등에 분류된 자들에게는 위협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쟁과 전쟁으로 서열과 승자를 구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법칙에 위배된다. 인간의 법칙은 자연의 법칙에 위배된다. 지금 우리가 자연의 재앙을 맞닥들이고 있는 이유이다.
천연자원을 분리 추출하는 과정이 자연이 훼손되는 과정이었다. 인간은 그것을 발전을 위한 활용과 유용이라 말하지만 책 속에서는 발전이 아닌 재앙의 씨앗을 뿌린 것이라 말한다. 책 속의 많은 사례들이 그것을 설명해 준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공존하면서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할 수 없는 것 또한 인간의 우열이 뒤바뀜을 두려워하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기존의 분리와 관념(프레임)이 만든 부와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것 때문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려는 욕심은 선의의 경쟁을 넘어 무력과 폭력을 이용한 분쟁과 전쟁을 부추긴다. 성공을 원하는 자는 언제나 협상과 논쟁의 언어를 쓴다. 공격적이고 수직적이다. 하지만 성장을 원하는 자는 언제나 대화와 토론의 언어를 쓴다. 평화적이고 수평적이다.
어린 시절 학교 복도의 게시판에는 항상 시험이 끝나면 1등부터 꼴찌까지 전교 석차를 붙여놓았다. 모든 학생들과 교사들은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교육이 올림픽 경기처럼 되어버렸을까? 그 당시 상위 10%의 학생들은 에어컨이 있는 따로 마련된 쾌적한 공간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그때부터 분리가 당연해졌다. 4지 선다형 답 맞추기 잘하는 인간이 우월한 것인가? 그렇게 성적이 우수했던 학생들은 명문대 학위 얻고 사회에 나와 전문가가 되어 부와 권력을 가진다. 법관이 되고 정치인이 되었다. 그리고 답을 못 맞히던 학생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자리에 앉는다. 학교에서 수평적이었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로 바뀌게 된다. 학생 때는 친구였지만 사회 나오면 더 이상 친구일 수 없는 이유이다.
누구나 삶을 살다 보면 계속 내편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그래야 삶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인맥이 많은 일을 해결해 준다. 관계는 안될 일도 되게 하는 힘을 가졌다. 인간관계가 중요한 이유이다. 문제는 관계가 보편적 상식을 초월할 때이다. 마음은 언제나 머리보다 앞선다. 머리는 마음에 맞는 명분을 찾을 뿐이다. 이해한다.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내 편이 아니라고 적으로 만들 이유까진 없지 않은가? 웃긴 건 공동의 적이 있으면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더라는 것이다. 더러운 본성이지만 버릴 수 없는 습성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눈다. 나누기는 계속 좁혀가는 수식이다. 그들은 밖으로는 넓은 마음과 생각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좁혀가는 방식을 쓴다. 모순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나누는 자가 아니로다. 그렇지 않은가?"
- [도마복음] 72:3 –
사람들이 지혜로운 예수를 찾아와 부모의 재산을 공정하게 나눠달라고 요청했다. 예수의 답이 기가 막히다. 법조인에게 물었어야 할 답을 예수한테 물었다. 사람들은 예수가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님을 몰랐다. 하지만 우리는 성인과 현인들에게 항상 답을 원한다. 답은 나누는 것이다. 성인과 현인들은 세상을 나누려고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다.
당신은 나누고 있는가 아니면 합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