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마리 루티
겨울 산은 황량하다.
산에는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즐비하다. 넓고 푸른 잎사귀를 가진 나무들은 겨울을 견디지 못한다. 요즘 공기가 좋은 날이면 산에 오른다. 겨울이 되면 운동량이 부족해서 몸에 지방이 축적된다. 태워야 한다. 곰이나 뱀은 긴 겨울잠을 자기 위해 살을 찌운다지만 인간은 그렇지도 않은데 겨울만 되면 살이 오른다. 추워지면 살이 오른다. 잠만 자면 살이 찌지 않겠지만 인간은 계속 먹는다. 그래서 나는 먹고 오른다.
집 근처에 산이 있어 다행이다. 한국은 4계절이 있어 계절마다 달라지는 숲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다. 봄에는 싹이 트고, 여름에는 숲이 가득 차며, 가을에는 색이 번진다. 그러나 겨울은 감상할 것이 적다. 앙상한 나무들로 뒤덮인 산에서 감상거리를 찾으려면 눈이 아니라 태도를 바꿔야 한다. 그때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나의 감수성은 오히려 더 예민해진다. 무언가를 볼 때 더 오래 보고, 더 천천히 생각하게 된다. 풍성함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겨울 산은 결핍과 상실로 가득한 것 같지만 그래서 구조가 드러나는 계절이다.
굽이치는 자와 곧게 뻗은 자
요즘 집 근처 산을 오르며 두 종류의 푸르름을 본다. 소나무와 삼나무이다. 같은 침엽수이지만, 이 두 나무는 겨울을 견디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나는 매일 이 두 푸르름을 지나다니다가, 어느 순간 그것들이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방식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발견했다.
소나무는 굽이치며 자란다. 바람을 맞으며, 바위 위에서도 홀로 선다. 피부는 거칠고 단단하다. 마치 철갑을 두른 것처럼 보인다. 소나무는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 다른 식물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영역을 고집스럽게 지키며 살아간다. 소나무는 해가 지기 전까지 태양을 볼 수 있는 자리를 좋아한다. 볕이 좋은 대신, 바람이 거센 자리다. 겨울의 소나무 곁은 햇살은 따뜻하지만 찬바람이 피하긴 어렵다.
삼나무는 다르다. 삼나무는 수직으로 뻗어 있다. 키가 크고 곧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다. 군집을 이루어 자란다. 바람이 비교적 덜 드는 산 중턱에 모여 서 있다. 서로가 서로의 바람막이가 된다. 삼나무의 피부는 손가락 거스러미처럼 신경에 거슬리는 질감을 가지고 있다. 뜯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칠다. 그런 나무들이 따닥따닥 붙어, 경쟁하듯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다. 삼나무 숲 아래는 겨울에는 차갑고 어둡다. 햇빛이 쉽게 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름이 되면 그 숲은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짙은 그늘과 피톤치드로 가득 찬, 시원한 휴양림이 된다. 그 아래에 들어가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름이면 삼나무 숲 속에 누워서 낮잠을 즐기고, 겨울이면 소나무 옆 바위에 앉아 떨어지는 노을을 보며 볕을 쬔다. 계절에 따라 내가 기대는 나무가 달라진다. 하나만 좋아할 수는 없다. 둘 다 좋다. 다만 시기가 다를 뿐이다.
살다 보면 그렇지 않은가. 예전에는 이런 사람이 좋았다가,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사람이 좋아진다. 어떤 이는 그것을 보고 줏대가 없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그 말이 기분 나빴지만, 이제는 다르게 느껴진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쩌면 삶이 조금 더 고단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 가지 방식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삶은, 계절을 바꾸지 않는 숲과 닮아 있다.
소나무와 삼나무 사이
소나무와 삼나무는 같은 침엽수이지만 살아가는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나는 과거엔 삼나무였고 지금은 소나무가 된 듯하다. 그래서 삼나무의 마음도 소나무의 마음도 이해된다.
나무는 기질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바뀐다. 혹은 바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원래 기질을 찾아가는 과정인지 아니면 맞지 않는 환경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춘 결과인지는 쉽게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기질과 멀어질수록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워진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견디는 것이 자신의 성질이라 믿고 산다. 참고, 맞추고, 버티는 것이 성숙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그 믿음은 종종 사람을 병들게 한다. 기질을 죽이고, 자질만 남긴 삶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하지만 인간은 식물이 아니라서 삼나무와 소나무의 속성을 다 가져야만 살아갈 수 있다. 삼나무로 태어났어도 소나무와 같은 홀로 서야 할 시기도 필요하고 소나무로 태어났어도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하기도 하다. 타고난 속성과 기질은 있지만 그 속성과 기질대로만 살 수가 없다.
인간의 삶이 비극일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저마다 타고난 기질을 발현하고 유지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 나의 기질이 누군가에겐 불편함을 줄 수 밖에 없는 세상의 구조 때문이다. 얼마 전 독서 토론을 위해 다시 읽은 [채식주의자]에서는 그것이 보였다. 한 개인의 기질이 드러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어울려 살려면 기질을 죽여야만 한다. 그걸 죽이지 못한 주인공(영혜)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인의 실패라기보다 구조의 선택에 가깝다.
모순으로서의 인간
내가 최근 글 속에서 ‘모순’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동식물처럼 고유의 속성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긋난 상태로 살아간다. 모순이 없다면 오히려 생존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모순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모순적이 아님을 증명하면서 살아간다. 이것 또한 모순이다. 그래서 인생은 연기와 같다. 배우처럼 연기(演技)하다가 연기(煙氣)처럼 사라진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 사람들은 모순적인 사람은 곁에 두면 안 된다고 교육받고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교육하고 훈련시킨 자들 역시 모순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모순을 제거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삶을 좀 덜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이 모순을 관리하고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의 기질만을 우선시하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지만, 기질을 따르지 않는 삶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7장 열정의 방향전환’중에서 -
자신이 타고난 기질과 사회와 공동체가 요구하는 자질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개인의 기질과 공동체가 요구하는 자질이 비슷하다면 그 자는 행운아일 것이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물론 그 자의 영혼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실존의 생명은 후천적으로 생겨난 사회와 민족과 국가라는 허구의 구조와 성질에 맞춰서 태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교육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허구와 구조에 맞는 인간을 만들려는 것이다. 한 국가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가 교육이란 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구조와 질서와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필수적이다. 기질을 살리자니 자질이 부족하고 자질을 살리자니 기질이 죽어버리는 삶이 바로 비극의 시작이다. 인생이 왜 고해(苦海)라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가?
“창의적 기질을 기르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질서 정연한 실존 상태와 무질서한 실존 상태 사이를 오갈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9장 에로스적 삶’중에서 -
나는 작가다. 작가는 창의적 기질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작가는 소나무에 가깝다. 홀로 생각하고, 홀로 읽고, 홀로 쓰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읽고 쓰는 일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행위다. 읽지 않고 쓰지 않는데 어울리기만 한다면, 그는 작가라기보다 사교인에 가깝다.
그러나 작가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삼나무가 되어야 한다. 작가는 독자가 필요하다. 사회와 공동체는 작가와 독자의 소통을 요구한다. 그 사이에서 부가가치와 소속감, 시너지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모순적인 존재가 된다. 기질은 소나무인데, 자질은 삼나무여야 한다.
나는 다리가 달린 나무가 되고 싶다. 소나무이지만 삼나무 숲에도 갈 수 있는 존재. 홀로 설 수 있지만, 필요할 때는 군집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존재. 소나무도 삼나무도 모두 가치 있지만 인간은 하나의 가치만 추구할 수가 없다.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왜 나무가 되려고 했는지, 그리고 왜 모두가 그것을 막으려 했는지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된다….
당신은 소나무인가 삼나무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