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전까지 서평과 에세이만 적던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서평과 에세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실 여기 브런치라는 플랫폼은 소설보다는 단편적인 에세이나 서평 혹은 영화평 등이 인기가 높다. 나의 글도 에세이와 서평이 높은 조회수를 차지한다. 소설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순수 문학인 단편 혹은 장편 소설은 신춘문예나 각종 소설 공모전등을 통해 등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웹소설은 카카오페이지나, 네이버 웹소설 등의 특성화된 플랫폼이 있다.
브런치는 단편적인 공감 있는 에세이를 메인에 올리는 경향이 큰 것을 브런치 작가로 지낸 지난 6개월 동안 깨달았다. 글을 읽는 독자들은 느린 호흡과 스압(스크롤 압박)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플랫폼 운영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웹소설이나 웹툰이 유행하는 것은 빠른 전개와 생각 없이 가볍게 볼 수 있는 부담 없는 것을 선호하는 젊은 층들의 구미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웹소설, 웹툰은 주로 로맨스나 판타지류가 주류를 이루고 비현실적인 내용들이 주류를 이룬다. 현실의 따분하고 답답함을 또다시 소설 속에서 느끼고 싶지 않은 것 때문일까?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상에 익숙하고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심심풀이의 기분 전환용의 콘텐츠가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웹툰과 웹소설 시장은 급속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Kakao Brunch
왜 브런치에소설을 쓰는가?
단편적인 서평과 에세이는 머릿속에서 꿈틀거리는 수많은 생각과 경험 그리고 상상들을 엮어내기엔 부족해 보였다. 내가 알아낸 사실과 지식 그리고 그것들로 생겨난 생각들을 적어 내려가는 것은 일종의 공부였다. 스스로 학습법이라고 할까?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이다. 책을 읽고 느끼고 생각한 것, 일상에서 경험하고 깨달은 것을 적는 것은 일종의 생각 정리 과정인 것이다. 그 과정을 공개하고 타인의 공감까지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엔 상상과 이야기가 빠져있다. 난 세상과 책 속에서의 깨달음을 현실 속 이야기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글 속에 녹아내는 작업이 바로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그냥 글을 쓸 때 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물론 서평처럼 책 읽는 시간 대신 플롯을 짜고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시대적 배경 조사에 시간을 할애했다.)
인물과 시점, 시대적 배경, 사건들의 연결, 인물과의 관계 설정 등등 수많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소설 속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가 이어져야 했다. 따로 소설의 플롯과 인물 구도를 까먹지 않으려 별도의 메모장을 만들었고 그 메모장의 내용들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늘어나고 이제는 내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기 시작했다. 과거와 연결하기 위해 그 메모장을 자주 들여다보며 연결과 연결을 이어갔다. 그리고 독자들의 호흡을 돕기 위해 되도록이면 에피소드(Episode) 별로 한 가지 이상의 메시지를 담아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노력했다.
책을 써보지도 등단도 하지 않은 무명작가의 테스트 무대가 바로 이곳 브런치였던 것이다. 글쓰기에 아무런 배경지식과 경험이 없는 일반 직장인으로 쓴 글이 과연 유명한 작가들이 떼로 모여드는 문학 공모전에 입상할 이렇다 할 자신감이 없었고 그렇다고 웹소설 시장은 접근법을 몰랐다. 그리고 웹소설 장르와는 다소 동떨어진 듯한 나의 소설은 순수문학과 웹소설의 어느 중간 지점쯤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소설을 써내려 갈수록 짙어졌다. 나에겐 검증이라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검증을 위해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매회 올리는 에피소드를 공개해 독자들의 반응을 지켜보기로 했다.
거의 매일 빼먹지 않고 올린 장편의 연재소설은 이제 3개월째 접어들고 있다. 에피소드가 100회 향해 달려가고 있다. 처음에 시원찮던 반응은 회를 거듭할수록 고정 독자들이 생겨나고 폭발적인 조회수는 아니지만 나의 글을 찾는 꾸준한 유입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나의 소설이 그냥 나에게만 갇혀있는 글이 아닌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다.
다른 세상을 경험하다.
서평과 에세이를 쓸 때와는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소설의 시작은 상상이 제한적이었다. 현실과 기억의 프레임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현실 속에 갇혀 지냈던 시간만큼 나의 생각도 갇혀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만들어낸 허구가 소설 속의 이야기로 자리 잡아가면서 나 스스로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창조주의 경험을 하고 있다. 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볼까 고민을 하며 이른 새벽 컴퓨터 앞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 한잔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소설을 쓰면서 생긴 변화
소설 쓰면서 주변을 세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의 일상과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며 나의 소설 속 모티브(Motive)를 찾아간다. 얼마 전 교회의 친한 동생을 소설 속에 집어넣었다. 소설 속의 그와 현실의 그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였다. 그를 소설 속에 등장시킨 건 단순히 그의 이름이 소설 속 상황에 너무 적합하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단역이었지만 그의 적절한 출연으로 스스로도 너무 재미있고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나중에 그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는 적지 않은 실망을 했다. 소설 속 그의 이미지가 썩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상과 소설이 연결되면서 삶은 조금씩 풍성해진다. 삶을 바라보는 자세 또한 조금씩 바뀌어 간다. 내 삶의 모든 일들이 소설 속의 모티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매 순간이 소중하고 내 삶의 관찰자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매일이 똑같은 삶보다는 매일이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 과거 직장인으로 살아갈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삶이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매일 다른 삶을 산다는 게 쉽지 않지만 스스로 변화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소설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 Lewis -
스마트 폰으로 브런치 앱을 접속하면 처음 로딩 화면 중에 뜨는 문구이다. 이 짧은 글귀가 너무 공감 가는 건 글을 쓰면서 글 속에서 내가 어떤 것이든 만들어내고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글 속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다. 일을 하지 않는 날이면 더 많은 시간을 쓴다. 계속 쓰면서 글 속에서 논다.
한 번은 소설을 쓰다 문득 생각난 재미있는 상황을 소설 속에 적어 내려가며 혼자 웃던 나를 카페의 다른 손님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걸 그 장면을 다 쓰고 나서야 알아채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여야 했다. 몰입하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 직장 생활할 땐 이런 몰입을 경험할 수 없었다. 매 순간 울리는 전화벨 소리, 업무 메신저와 이메일 소리 그리고 시시때때로 불러대는 상사의 호출에 잠시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매일 밤 회사에 남아 업무를 처리하는 몰입이 아닌 쥐어 짜기를 경험했을 뿐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대중 큰 관심을 받고 있진 않지만 소설 쓰기는 분명 매력 있는 창작행위이다. 세상에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가는 소설가들은 그 이야기의 개수만큼 다양한 삶을 살고 가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이른 새벽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과 뜨거운 커피 한잔으로 또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