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을 이렇게 만든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할 당시에 목수일을 하며 집을 짓고 있었고 글과 하는 일을 연결해서 즉흥적으로 만든 필명이었다. 별생각 없이 지었던 이 필명이 며칠 전 읽었던 책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너무 잘 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연이었지만 절묘했다.
소설을 쓰면서 글쓰기에 대한 책들을 많이 찾아서 읽었다. 기억에 남는 책들이 많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읽은 책의 서평을 다 쓰진 못했지만 적지 않은 깨달음과 도움을 받았다. 최근에 읽은 글쓰기 책에서 얻은 공감과 깨달음은 기존에 읽었던 글쓰기 관련 책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심오함이 있어 독후감을 적어본다.
"소설은 쓰는 게 아니고 짓는 것이다"
- 박상우 [소설가] 중에서 -
어린 시절 우리는 교내에서 진행하는 글짓기 행사나 대회에 한 번쯤을 참여해봤을 것이다. 왜 글쓰기 대회가 아니고 글짓기였을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글짓기와 글쓰기는 무엇이 다른가에 대해 생각해 봤는가? 사실 나 또한 필명이 글 짓는 목수임에도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글을 쓰고 혹은 짓고 있었다.
쓰고 짓다
'글을 쓴다'는 문장의 주체는 '나'이다. 내가 쓴다는 것에 더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내가 쓴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글을 짓다'는 내가 아닌 대상에 더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마치 집을 짓는 것처럼 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얘기하자면 쓰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고 짓는 것은 대상을 위한 것이다. 쓰는 것은 기존의 사실(몰랐던)을 위주로 한 나의 지적 소양의 발산이지만 짓는 것은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창작(創作)의 과정이다. 간단히 말하면 쓰는 것은 논픽션(Non-fiction)에 짓는 것은 픽션에 가깝다.
"영어로 의미를 다시 풀면 writing 하는 것이 아니라 spending 하는 것이다."
- 박상우 [소설가] 중에서 -
쓰다는 마치 돈을 쓰며 소비를 하는 행위와 그 맥락이 비슷하다. 우리는 소비의 욕구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분출한다. 소비의 욕구는 마치 글 쓰는 욕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돈을 쓰듯 글을 쓰며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둘 다 자신의 부와 지적 소양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전문 서적(과학, 의학, 경영 등)이나 자기 계발서, 철학 인문서, 다양한 주제의 칼럼 같은 글들은 바로 자신의 지적 소양을 드러내는 글쓰기의 유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글쓰기는 'writing'을 통해서 'express'으로 냐아간다면 글짓기는 'compose'를 거쳐 'make'로 가는 과정이다. 그렇다고 쓰기의 영역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쓰기의 영역이 없다면 짓기의 영역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짓기의 영역은 기본적으로 쓰기의 영역 위에 존재한다.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학문(學文)과 문학(文學)
이 두 가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가? 둘 다 배울 학(學)과 글 문(文)의 조합이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다. 책 속에서 저자의 학문과 문학에 대한 이해가 참 신박하다. 분명히 두 가지 단어의 의미가 다른 것은 알겠지만 그것을 말로 풀어서 얘기하기는 쉽지 않다.
"학/문=학문, 문/학=문학"
저자는 두 가지의 차이점을 수학 기호로 표현했다. 학문은 글에 기초하여 배움을 쌓아가는 행위이고 문학은 배움에 기초하여 글을 쌓아가는 행위이다. 학문은 전문적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문학은 포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글(Input)이 없이는 학문을 익힐 수 없듯이 배움이 없이는 글을 써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릇이 되는 분모의 양이 담을 수 있는 분자의 양을 좌우하게 된다. 학문의 그릇은 글에 기초하고 문학의 그릇은 배움에 기초한다. 그렇기에 문학을 하는 자는 배움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문학의 깊이는 바로 배움에 있는 것이다.
나도 소설이나 에세이(수필) 혹은 시를 읽을 때 그 깊이가 어디서 오는 걸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시대가 지나도 잊히지 않는 문학의 배경에는 분명 크고 넓은 배움이 있었다는 것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 물론 학문처럼 깊이 있는 배움은 아니겠지만 문학은 깊이보다 넓음이 더 중요하다. 문학은 인생을 얘기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천수만 아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생이 존재한다. 얕지만 넓은 배움 속에서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진정한 문학이 탄생하는 것이다.
문학보다 학문
안타깝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세상은 문학보다 학문을 선호한다. 그래서일까 글짓는 사람들은 가난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경지에 오른 문학가들은 그나마 경제적인 부를 누리지만 일반적으로 글쟁이들의 삶은 그리 평탄치 않다. 역사를 들여다 보아도 과거 대문호들의 삶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과학같은 학문 영역 위에 발전한다. 깊이 있는 학문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종 학위와 자격증을 위한 학문에만 몰두 한다. 과학의 발전이 기술과 의학 및 모든 삶의 영역의 편의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돈은 그런 곳으로 모이게 마련이다. 눈에 보이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에 돈이 몰린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가가치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세상의 무대 뒤편에서 한량 같은 인간으로 평가받는다.
쓰면서 배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나 문학을 하는 사람이나 모두 쓰는 행위를 거쳐야 한다. 학문은 배운 것을 쓰면서 심화 발전해 가는 과정을 겪고 문학은 쓰면서(논픽션) 짓는(픽션) 과정으로 발전해 간다. 지금 내가 적고 있는 서평 또한 쓰기의 과정이다. 이 쓰기의 과정이 배움인 것이다. 이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나의 분모는 커져가고 내가 담을 수 있는 글의 세계도 커져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1로 수렴한다.
저자의 이 관념을 이해하고 고민하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분모가 커지면 분자도 커지지만 둘 다 결국은 1로 수렴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분모와 분자의 크기가 같아지는 지점은 결국 1(One)이 되어 버린다.
그건 분모가 크건 작건 상관없이 모두가 다 일이다. 글(文)이 많이 쌓이건 배움(學)이 많이 쌓이건 결국 1이다.
"무지를 아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다."
"True knowledge exists in knowing that you know nothing."
- 소크라테스(Socrates) -
이 시점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다. 물론 이 명언은 소크라테스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공자나 석가모니 또한 무지와 무아의 깨달음을 설파했다. 인간이 추구하는 지적 호기심은 끝이 없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쌓아가도 결국은 똑같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는 아직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과거 성인들은 끝없는 배움의 과정 속에서 결국 원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자아의 부족함을 깨달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징어 게임 중에서
"자네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없다는 거야"
- [오징어 게임] 중에서 -
아무리 부(富)의 그릇을 키우고 쌓아도 심심한 것은, 아무리 배움의 그릇을 키우고 배워도 심심한 것은 왜 일까? 결국 가진 자의 부나 가지지 못한 자의 부나, 배우지 못한 자의 앎이나 배운 자의 앎이나 모두가 다 1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100, 1000, 10000, 100000...... 셀 수도 없는 숫자의 부와 지식을 쌓으려고 발버둥 치며 평생을 살아가지만 사실 그 모두는 결국 1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일 뿐인 것이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마태복음 18:3] -
우리는 무(無,0)에서 태어나 결국 1을 향해 달려가지만 1도 되지 못하고 어정쩡한 분수(分數, fraction)의 형태로 생을 마감한다. 1에 수렴한 성인들도 무지한 삶을 한탄했던 걸 보면 다시 무로 돌아가는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연히 접한 박상우의 [소설가]라는 책 속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처음 의도는 소설의 작법에 대한 호기심이었지만 그 안에 내용은 소설을 주제로 한 삶의 얘기를 같이 담고 있다. 소설가의 길을 가고픈 사람에게는 꼭 추천할만한 책이다.
우리 모두는 1로 달려가는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학문으로 누군가는 문학으로, 1이 되기도 힘들지만 더 힘든 건 다시 0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짓기는 1차원적 쓰기의 과정에서 '나'를 모두 비운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 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