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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Dec 07. 2021

경계에 선 자

슬럼프를 이겨내며

일주일이 넘도록 글을 쓰지 못했다.


  키보드에 손을 얹으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린다. 다시 찾아온 것인가? '번아웃'이다. 뭔지 모를 불안감과 수많은 잡념들이 머릿속을 잠식해 상상이 펼쳐져야 할 머릿속은 현실의 고민들로 가득 차 상상이 피어날 틈이 없다.


  아이들이 상상력이 뛰어난 건 어찌 보면 현실의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들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고민해야 할 수많은 것들을 다 배제된 머릿속엔 무궁한 공상과 이야기가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비워야 다른 것을 채우지만 어른들은 더 채워 넣기에만 바쁜 일상을 살아간다. 현대인은 고민과 걱정과 불안만 채워 넣다 보니 상상과 꿈과 이야기는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닐까?


"소설가는 에고(ego)가 강하다. 에고가 강하다는 건 만사를 자기 본위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전반적으로 소설가들의 사회성이 약하다는 지적은 그와 같은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 박상우 [소설가] 중에서 -


  소설가는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럼 난 현실감각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쳐서 소설이 잘 안 써지는 걸까?...ㅋ;;)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이야기꾼은 정작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현실)에는 무감각해진다. 사회에서 부딪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계획하고 대처하고 헤쳐나가야 할 지에 대한 관심과 적극성이 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대처하고 앞으로 이야기를 어떻게 계획하고 진행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관심 때문에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관심을 가진다면 현실 너머의 세상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두 종류의 소설가


 그래서일까? 소설가도 두 종류가 있다. 그냥 주야장천 글만 쓰는 전업 소설가와 생계를 이어가며 틈틈이 혹은 몰아서 쓰는 소설가로 나뉜다. 


  주야장천 쓰는 소설가는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계속 쓴다. 가끔 읽으면서. 그런 소설가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며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는 중상급의 소설들을 꾸준히 출간한다. 반면 현실을 살아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겸업 소설가는 짬짬이 혹은 몰아서 쓰기에 자주 책을 출간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무라카미 하루키, 김영하 같은 소설가들은 많은 작품을 쓴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대부분 평타 이상은 친다. 그래서 꾸준한 작품으로 꾸준한 인기를 누린다. 


  반면 과거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베르 카뮈, 생텍쥐베리 등 위대한 소설가들을 보면 많은 작품을 썼기보다 임펙트 강한 몇 작품들을 남겼다. 세속인들처럼 현실을 온몸으로 직접 살아내면서 겪은 것을 글로 생생하게 풀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그러고 보면 노벨문학상에는 인기 있는 대중 소설가의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떤 소설이 좋다 나쁘다를 논할 수는 없다. 전업 소설가는 문학적으로 뛰어난 소설을 쓰고 싶어 하고 겸업 소설가는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밥 벌어먹고살고 싶어 한다. 둘은 서로를 부러워한다. 


경계에 선 자


 이건 비단 글 쓰는 것에 문제에 국한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곳 호주의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에 충실하며 항상 현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살아가려 노력한다. 요즘은 이런 나의 의지가 혹여 스스로 정체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부인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면 나 자신은 한 없이 초라해져 보인다. 인생의 중반부를 넘어가는 이 시점에 누군가는 가정을 일구고 자신만이 아닌 가족과의 행복한 미래를 계획하며 하루하루 숨 가쁘게 살아간다. 그 속에서 아내와 자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가 느끼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또 누군가는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 부와 명성을 얻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정된 삶으로 누리며 이제는 진보에서 보수로 색깔을 바꿔간다. (지켜야 할 것들이 하나 둘 많아지면 변화(위험)보다는 안정(안전)을 찾게 되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후자의 경우에서 대작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 자신은 항상 변화를 추구하려 발버둥 친다. 세상은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기에 항상 변화하려 노력하지만 변화 속에서 시간이 지나도 정착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시선이 이곳에서도 느껴진다. 세상의 변화에 뒤처지지 않으려 주변에 귀 기울이고 책을 읽으며 현실에서 도태되지 않으려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서서 이곳저곳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것에 조금씩 지쳐가는 듯하다. 


"소설가는 언제나 경계 지점을 사는 존재이다."

                                  - 박상우 [소설가] 중에서 -


  지금은 On-off line이 혼재되어 있지만 사람마다 어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살아가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곳 호주같이 변화의 속도가  느린 곳은 아직도 많은 이들이 오프라인 생활에 더 많은 비중을 가지고 살아간다. 일도 생활도 오프라인이 대부분이다. 이민자들이 상당수가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계를 위해 오프라인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일과 이후에는 나만의 가상 세계로 빠져든다. 그러다 보니 둘 중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곳에 집중하자니 다른 하나가 소홀해진다. 꿈을 쫓으면 현실이 옥죄어 오고 현실을 쫓으려니 꿈은 요원해진다. 이건 나뿐만이 아닌 글을 쓰는 모든 작가들이 안고 가는 딜레마 일 것이다. 결국 소설가는 경계에 발을 걸친 채 양쪽을 드려다 보는 관조자의 삶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소설가의 삶을 알아가며 깨달은 것은 상상하며 글을 쓰는 일이 결코 멋있고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머릿속의 상상이 풍부해질수록 현실의 삶은 피폐해져 간다. 


"It is better to be a human dissatisfied than a pig satisfied"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론] 중에서 -


  이 말이 가슴 깊이 와닿는 건 왜일까? 정말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실제로 배가 부르면 글이 안 써진다. 허기가 지고 빈 속일 때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고 무의식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인지 글을 많이 쓰는 작가들 중에 비만인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쓴 글도 잠에서 깨어난 직후 공복 상태에서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감사하다.  오늘 드디어 일주일의 공백기를 부수고 글을 썼다. 이 에세이를 비롯해서 많진 않지만 소설의 새로운 에피소드까지 써내려 갔다.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리고 글을 쓰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어 뿌듯하고 감사하다. 앞으로도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고 두 세계의 평형을 이루며 꾸준히 글과 삶을 이어나갈 수 있길 다짐해 본다. 


"긍정심리학이 발견한 여러 가지 긍정성 증진 훈련 중에서 단연 최고의 효과를 지닌 것으로 입증된 것이 바로 감사하기 훈련이다."

                                                         - 김주환 [회복탄력성] 중에서 -

                   

  그동안 중단했던 감사 일기도 다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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