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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l 04. 2020

인간은 길들여진다

고(故) 최숙현 선수의 투신자살을 바라보며

  왜 인간을 폭언과 폭력으로 길들이려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것이 가장 짧은 시간에 원하는 반응(결과 혹은 성과)을 불러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폭력과 폭언을 좋아할 인간은 없다. 싫어가기 때문에 피한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두 가지다. 적응하거나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기한 내에 해주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한다. 오죽하면 택배도 몇 시간 안에 받아야 하는 급한 성질은 전 세계 어딜 가도 찾아보기 힘들다. 로켓 배송으로 시장을 장악한 쿠팡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인의 성향을 잘 파악한 마케팅이다. 전 세계 어딜 가도 우리처럼 배달을 잘하는 나라가 없다. 상고시대(上古時代)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배달(倍達)의 민족이 어쩌다 배달(配達)의 민족으로 바뀌어 버렸는지 알 길이 없다. 

쿠팡과 배민

  얼마 전 호주의 한 쇼핑 앱에서 저렴한 가격의 제품을 구매했다. 생각보다 싼 가격에 서슴없이 구매창을 클릭하고 나서 며칠이 지나도 택배가 오지 않아 확인한 물품은 이제 배에 실려져 바다 한가운데 있다고 한다. 한 달 뒤나 되어야 도착한단다. 짧은 영어에 구매 컨디션(조건)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가격만 보고 구매한 내 잘못이지만 당황스러움은 감출 수가 없다. 이런 앱을 누가 쓸까 했는데... 여기선 쓴다. 이곳 사람들은 그냥 주문해 놓고 잊어버린다. 뭐 그만큼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에서였다면 아마 외면을 당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기다림은 시간낭비로 바뀌어 버렸다.


  기다림이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과거 편지를 쓰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요즘 세대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군 시절 수많은 편지를 썼다. 그것도 주말에 내무반에 앉아 손편지를 쓰던 것이 행복했다. 편지를 받을 사람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렇게 쓴 편지가 날아가고 답장이 오기까지의 기다림은 그 사람을 더 추억하게 한다. 답장이 늦어질수록 그리움은 간절함으로 변해간다. 기다리던 답장이 도착하면 그 편지를 받아 들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숨어 읽으며 그 사람과 나만의 세상 속에 빠져든다. 물론 답장이 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하염없는 기다림이 실망감으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기다림이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모든 것과 연결되는 초연결 세상 속에서도 단절과 소외는 깊어간다.


시스템에 길들여진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가르침이라는 미명(美名) 아래 명령과 지시 속에서 세상을 배워왔다. 스스로 무언가를 찾고 생각하고 만들어가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학교에서는 짜인 학사일정과 선생들의 지시와 명령, 사회에 나와서는 직장상사와 회사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살아간다.


  인간은 본디 나태한 존재이기에 당근과 채찍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에 익숙해져 있다. 자유를 주면 방종으로 변질되어버린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의 소명(召命)이 무엇인지 모른 체 국가와 사회가 만들어놓은 속성 시스템 속에서 산업자본주의 세상에 필요한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나의 인생에 아주 큰 혼란의 시기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였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합이 12년이나 되는 세월을 교사가 시키고 지시하는 것을 따르며 살아왔다. 모든 생활은 통제되고 감시되며 평가받아왔다.


  그리고 맞이한 대학교 캠퍼스의 자유는 결국 방종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 대학 생활은 자유로웠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누가 다가와서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무언가 스스로 계획하고 추진하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대학 1년을 춤과 술에 빠져 미친 듯이 놀았다. 학사 경고가 날아들고 비싼 학비를 두 번 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몽둥이와 싸대기를 날려대던 선생님들과는 달리 대학 교수들은 그냥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대학(大學)은 말 그대로 큰 학문을 해야 할 곳에서 초등(初等) 수준으로 떨어진다. 한국의 대학 문화가 다른 나라와 달리 변질된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대입 지상주의가 불필요한 대학생들만 양산해 내었다.


   두 번째는 12년간의 직장생활을 끝내고 나서였다. 대학에서 혼란의 시기를 보내고 사회로 나아갈 무렵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홀로 무언가를 차근히 해나가는 습관이 형성될 때쯤 직장인이 되었다. 다시 지시와 명령의 문화로 되돌아왔다. 지시의 주체만 선생에서 선임과 상사로 바뀌었을 뿐이다. 직장 생활은 결국 12년간의 학생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 보였다. 달라진 것이라면 돈을 받고 한다는 것일 뿐이다.

  

  어린 시절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따랐고 어른이 되어서는 돈의 노예가 되어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12년이 흐른 뒤 학교도 회사도 아닌 세상으로 나온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주어진 임무와 과제만 수행하던 직장인에게 멘붕이 찾아온다. 사회는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언제까지 해야 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퇴사 후 1년이 넘도록 내가 뭘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의 정체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24년간 길들여졌던 것이다. 길들여진 가축은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다. 주는 먹이와 보살핌(채찍과 당근 or 폭언과 폭력)에 익숙해져 스스로 먹이를 찾고 보금자리를 찾지 못한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야 돼"


  직장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야생에서 죽지 않으려면 주인에게 버림받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열심히 잘 일하고 건강해야 한다. 가축의 삶이랑 닮아있다. 직장을 잃은 중년의 자살이 증가하는 것은 그들이 오로지 직장에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도 길들여진 것이다.


  최근 이슈가 된 (故) 최숙현 선수도 철저히 길들여진 것이다. 자신이 인정받는 유일한 곳에서 떨어져 나가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그들이 자행하는 폭언과 폭력을 견디게 해 준 것인지도 모른다. 가해자들은 그 점을 악용했다. 그들은 그녀를 위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이익과 명성을 위해 철저하게 그녀를 이용한 것이다. 그렇게 얻은 금메달과 영광이 그녀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 그녀도 나중에 그들처럼 후임을 양성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배운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들도 과거 그런 식으로 배워왔을 가능성이 크다. 악순환의 되물림이다. 그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 용기를 내었지만 그 누구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상이 만만하냐? 최고가 되는 길이 쉽냐? 그 정도도 못 버텨서 어떻게 살아남겠냐?"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의 부조리를 개인의 결함으로 뒤집어 씌우려 한다. 결국 그녀의 죽음 그리고 그녀가 남긴 증거(녹취)가 공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그 일은 또 조용히 묻혀 더 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었을지 모른다. 안타깝다. 꼭 누군가가 희생되어야만 깨닫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 대신 희생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버틴다. 누군가(희생양)에 의해 변하고 바뀔 세상이 올 때까지 자신은 그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비겁하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하다. 나와 나의 가족의 안전과 행복을 담보로 정의 실현에 앞장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변해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인간을 가르치려 든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에게 길들여진다. 선(善)은 선을 낳고 악(惡)은 악을 낳는 법이다. 

어떤 인간에게 길들여질 것인가? 

고(故) 최숙현 선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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