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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l 07. 2020

사랑은 판타지 속으로

팔공 남자 시즌 2-49

"하아~ 희택아! 씨X! 사는 게 왜 이리 힘드냐?"

"그게 인생이야 인마!" 


   주말 저녁 C가 찾아왔다. 나의 원룸 근처의 막창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대구에 온 뒤로 초창기에는 내가 힘들어서 녀석을 자주 찾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된 것 같다. 나는 직장생활 5년 차에 접어들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깎이면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나만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C는 달랐다. 마치 방금 낚싯줄에 걸려 올라온 물고기처럼 온몸을 파닥거리며 거세게 저항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안다. 내가 무슨 말을 한들 그에게 소용없다는 것을. 그냥 빈 잔이나 채워주며 그의 푸념을 들어주는 것이 그에게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이다. 그런 위로마저 없다면 녀석은 폭발해 버릴지 모른다. 오늘도 녀석의 한풀이를 들어줘야 할 분위기다.


"그 년이 날 쫓아내려고 작심을 했나 봐"

"왜?"

"이젠 사무실에 들어와 앉을 시간도 안주네. 완전 무슨 노가다 인부 된 느낌이다. 이제 학교 학생들도 숙덕거리면서 놀려댄다. 수학선생이 졸지에 공무 아저씨 됐다고..."

"진짜가?"

"나 그만둘까 봐"

"마! 안된다. 참아라. 백수생활을 또 하고 싶나? 어머니도 생각해야지"

"씨X! 세상 정말 X 같네"

"마! 그걸 이제 알았냐? 다들 그냥 그렇게 산다. 니가 좀 늦게 안 것뿐이다. 자! 한 잔 하고 잊어뿌라!"


 소주는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려고 발명한 술이 분명하다. 경기가 나빠지고 먹고살기 힘들수록 소주는 더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삶의 무게와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가장 저렴하고 합법적인 방법이다. 소주는 국가와 산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매개체가 분명하다. 자본가는 소주로 노동자들의 스트레스와 분노를 잠재우고 정치인들은 세금(주세)을 걷어드려 나라의 곡간을 채우는 일석이조의 효과이다. 


  연탄불 위에 노릇하다 못해 거뭇하게 타들어가는 막창을 집어 입 속으로 집어넣는다. 뜨겁게 달아오른 막창은 차가운 소주와 같이 들이부어 달래주며 삼켜야 한다. 


"희택아 넌 연애는 안 하냐? K도 장가갔는데 니도 가야지 이제"

"결혼은 무슨 얼어 죽을... 일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일은 일이고 연애는 연애지"

"난 너처럼 멀티태스킹이 잘 안되네, 참! 넌 미숙이랑은 우째돼가노?"

"하아~"

"왜? 먼일 있나?"

"아~ 씨X!"


  C는 미숙이 얘기에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소주잔을 들이켠다. 얼마 전에 그녀와의 술자리에서 그녀의 임신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녀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쩔 줄 몰라했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미숙이는 대수롭지 않은 태연한 표정으로 같이 병원 좀 가자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C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사로 잡혔지만 내심 그녀의 무덤덤한 반응에 안심했다고 한다. 미숙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냥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C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몸도 매일 술과 담배에 절어 아기를 낳을 몸이 아니란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산부인과를 찾았고 주변에 흥분과 기쁨의 표정을 한 부부들과는 달리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들의 차례를 기다렸고 작은 생명은 조용히 사라졌다. 그는 수술을 마친 그녀를 부축해 원룸으로 돌아온 뒤 배를 끌어안고 신음하는 그녀를 위해 미역국을 끓여주었다고 한다. C는 그때 처음으로 미역국을 앞에 두고 이렇게 슬플 수도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다고 한다.


"사실 나도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하나 있긴 한데..."

"진짜? 누군데?"

"교회 누나"

"오 정말? 연상? 요즘은 연상연하가 대센가 봐 큭큭! 잘해봐라!"

"근데 임자 있다 하하하"

"뭐 결혼했어?"

"아니 아직, 남자 친구도 같은 교회에 있어, 뭐 나하고도 친하고"  

"야~ 난 애엄마도 만나는데, 한번 들이대 봐라!"

"됐어! 둘 다 좋은 분이고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이야"

"음... 쨔쉭! 닌 꼭 골라도 어째 그런 여자를 고르냐? 휴~ 여복은 지질히 도 없어요 하여튼"


  녀석의 한풀이를 듣기만 하며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술기운이 올라온다. 말없이 마시는 술은 취기가 더 빨리 오른다.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 넋두리를 꺼내 놓는다.

 

  인생을 오래 살지 않았지만,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자에 대해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여자는 절대로 내 맘대로 고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나타나면 나를 싫어하거나 아니면 이미 누군가의 여자였다. 그것도 아니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랑이었다.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처럼 내가 집는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사랑은 운명처럼 나타나는 것 같지만 그 운명을 잡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들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 장애물은 이성(理性)의 통제와 현실의 제약이다. 그것들을 거스르며 운명을 이루려는 것은 쉽지도 않을뿐더러 때론 죄악으로 변질될 수 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한 사랑을 이루려는 과정이 다른 이들에게 고통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현실의 사랑은 쉽지 않다. 그걸 반영하듯 당시 판타지 멜로드라마가 대한민국을 안방을 휩쓸고 있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은 판타지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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