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Jul 23. 2020

울지 말고 일어나 피리를 불어라

팔공 남자 시즌 2-53

"어떻게 그런 일이..."


  안 에스더는 검은 상복을 입고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내 앞에는 그녀의 약혼자인 요한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 미소 띤 그의 모습은 그녀와 대조적이다. 그녀는 내가 온 것을 확인하고 벽을 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운다. 눈가에 눈물자국이 선명하다. 얼마나 울었을까? 더 이상 울 힘도 없어 보인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하나님 곁으로 가셨을 거예요"


  나의 조문 인사말에 그녀는 다시 울컥했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아버린다. 나는 쓰러지듯 주저앉는 그녀를 부축한다. 더 이상 터져 나오지 않는 울음 대신 넘어갈 듯한 숨소리만 내뱉는다. 그녀의 팔을 부축한 채 그녀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다. 


"미... 안 해요"

"괜찮아요 더 울어요"


  불안정한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한쪽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고여있다 나를 올려다보는 순간 상기된 그녀의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요한은 이른 새벽 세탁물을 배달하다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음주운전을 한 덤프트럭과 충돌했다. 그의 차는 튕겨져 다리 아래로 추락했고 그를 차에서 꺼내었을 땐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그의 시신을 확인한 자리에서 바로 실신을 했다고 한다. 


  요한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랐다. 세상을 엇나갈 뻔할 때마다 그를 바른 곳으로 인도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둘에게는 그런 힘든 과거가 둘을 더욱 끈끈하게 이어주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둘은 교회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랑을 하고 또 다른 이에게 그 사랑을 실천했다. 그런 그들에게 그것도 과분한 행복이었을까? 하나님은 또다시 그들에게 시련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가족이 없는 요한의 빈소를 홀로 지키고 있다. 장례식장에는 안쓰러운 표정을 한 교회 사람들의 조문만 있을 뿐 그 이외 다른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언~니!"


  띠아오챤과 쑨샹도 빈소를 찾아왔다. 띠아오챤이 빈소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달려든며 그녀를 부둥켜안는다. 또다시 울음바다가 되어버린다. 띠아오챤은 정말 그녀의 슬픔을 나눠가지려는 듯 눈물과 울음을 쏟아낸다. 쑨샹도 그 둘을 내려다보며 눈시울을 붉힌다. 


"大叔,你也来了?”(아저씨도 왔어요?)

“응, 你没事吗?” (응, 너 괜찮아?)

“没事, 可你怎么一点眼泪都没有?” (괜찮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저씨는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려요?)

“我从来没有人家面前流过眼泪” (난 누구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어)

“为什么?” (왜요?)

“不为什么, 我也不知道,就这么过来的” (왜는, 나도 몰라)


  띠아오챤은 붉어진 눈시울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내 옆으로 와서 앉는다.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내가 이상한 듯 쳐다보며 묻는다. 나도 슬프다. 하지만 슬픔을 표현하는 게 익숙지 않다. 나도 슬퍼 울면 상대방이 더 슬퍼할까 걱정되어서 일까? 아니면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일까? 


[울면 안 돼!]


  어려서부터 울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아온 탓일까? 우는 아이에겐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주지 않고, 좋아하는 만화영화[개구리 왕눈이]에서는 울지 말고 일어서서 피리를 불어라며 슬플수록 즐거운 척 하라며 이해하기 힘든 노래를 계속 따라 부르다 보니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누구도 그냥 울도록 놔두지 않는다. 슬픔은 나쁜 것처럼 교육받았다. 하지만 슬픔은 온전히 그것을 느낄 때 사라지는 것이다.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고 아프면 아파하는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기뻐도 티 내지 말고 슬퍼도 안 그런 척, 아파도 참아야 하는데 더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 내 앞에 당사자보다 더 슬퍼하며 눈물짓는 띠아오챤은 내가 이상하게 보일만도 하다. 잠시 뒤 연변 아줌마 최 씨와 딸 향미도 조문을 찾아왔다. 최 씨는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이며 그녀를 위로한다. 향미는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빈소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고개를 숙이고 손톱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오셨네요"

"그럼 우리 하늘나라로 가신 요한과 그 누구보다 힘들어할 안 에스더 두 목자를 위해 기도할까요?"


  나는 장례식장에 모인 목장 식구들에게 기도를 제안한다. 왜 내가 기도를 하자고 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모두가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그 기도가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하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 창세기 3:19-


  장례식이 끝이 나고 목장 식구들과 같이 교회 근처의 산에 올랐다. 안 에스더는 화장한 유골함 속의 요한을 흩뿌린다. 요한은 바람에 흩날리며 숲 속의 흙 속으로 돌아간다. 요한은 평소 산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녀와 주일 예배가 끝나면 가끔씩 이 산에 올랐다고 한다. 우리들도 가끔씩 그를 따라 올라온 기억이 있다. 그녀는 그를 보내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몇 번 그의 유골을 흩뿌리더니 또다시 슬픔이 터져 나와 자리에 주저 않고 만다. 나는 그녀가 들고 있던 그를 대신 보내준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 품으로 갔을 거라며 그녀를 위로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녀도 그것이 위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습니다. 예수와 하나님을 믿으면 죽음의 형벌이 축복으로 바뀐다고 한다. 죽은 자는 천국으로 가는 축복인지 모르겠지만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형벌과도 같다. 그녀는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럼 그녀가 지금 고통받는 것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아서 인가?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 형상과 실체가 없는 무언가를 믿고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믿음과 사랑은 사실 형상과 실체가 있는 누군가를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상실감에 고통받는 것이다. 인간은 신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간을 믿음으로서 고통받는 것이 아닐까?


  땅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그녀에게는 차마 내뱉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섞여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달팽이의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