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뜨거우면 데고 너무 차가우면 얼어버린다. 관계도 그러하다. 그 관계는 나의 언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언어의 온도가 관계의 온도가 된다. 나의 언어인 말과 글을 되돌아보게 된다.
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글과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글이다. 이 책은 철저하게 후자에 가깝다. 잘 읽힌다. 그리고 따뜻해진다. 이기주 작가는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 같아 보인다. 일상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모습에서 의미를 찾고 글을 쓴다. 귀도 밝은지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많이 기억하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글이 적지 않다. 나 또한 편안하게 읽히며 감성적인 글을 좋아한다. 그건 아마 이성(理性)으로만 가득 찬 현실의 삶에 찌들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The temperature of language
"Sorry = Sore"
여기 호주는 'I'm sorry'가 일상이다. 그냥 길을 가다 스치기만 해도 'sorry', 심지어 스치기도 전에 미리 'sorry'를 말하기도 한다. 일상화된 미안함의 표현이 서로를 기분 좋게 한다. 한국에서 미안하다는 말은 그렇게 쉽지 않아 보인다. 마음이 아프기 싫어서일까? 아님 나를 낮추는 것이 싫어서일까? 쉽게 내뱉지 못하게 된다. 친할수록 더욱 그렇다. 친할수록 "미안하다"는 말은 더욱 필요하다. 진심 어린 사과는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느껴진다. 쉽지 않다는 것을 상대방도 알기에 그런 사과는 관계를 두텁게 만든다. 간혹 고개 숙여 사과하는 사람 앞에서 남들 보란 듯이 더 면박을 주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진심 어린 사과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 진짜 사과는 아프다(sore).
"타이어드(Tired) 하기 때문에 타이어(Tire)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 같아 보인다. 자동차에서 가장 마모가 심한 곳이 바로 타이어이다. 자동차의 하중과 노면의 거침 그리고 날씨의 변덕까지 거기에 운전자의 기분까지 다 참아내려면 얼마나 많은 인내심(내구성)이 필요할까? 정말 피곤할만하다. 우리의 신발도 그렇다. 주인을 닮아간다. 내 타이어나 신발이 닳듯 주변에 사람들도 나 때문에 닳아가고 있다. 주변 사람들과 오래 같이 갈 수 있는 좋은 습관과 성질을 만들어가야지 않을까? 평소 나의 행동과 말을 되돌아보게 된다.
"사랑도 자본주의 시대"
우리는 사랑을 하기 전에 계산을 한다. 받을 걸 생각하고 주는 식의 사랑이랄까? 주기만 하는 비영리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주는 만큼 받으면 이윤 없는 사랑이다. 준 것보다 많이 받아야만 존속(存續) 가치가 있는 사랑인 시대이다. 1인 기업으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는 게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사랑이 순수할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에게 계속 주고 싶다. 잘해주는데 집중한다. 그건 주면 상대방도 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든 마음이든 아니면 몸이든 말이다. 주고받으면 다행이다. 이젠 그런 남녀 간의 믿음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일까 이젠 먼저 받길 원한다. 은행이 돈 빌려줄 때 담보를 잡듯이 말이다.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는 것이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손해보고 싶지 않다.
요즘은 잘해주는 사람이 부담스럽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해주는데도 불편함이 없는 사람을 찾게 된다. 그건 내가 싫어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그럼 가까이 있어도 편하다. 계속 같이 있고 싶어 지는 것이다. 원하는 걸 해주는 사랑보다는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사랑이 더 오래간다.
'사랑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사랑이 끼어들지 않는 삶도 없는 듯하다'
- [언어의 온도] 중에서-
삶, 사람, 사랑 이 세 단어는 많이 닮아있다.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도 그걸 알고 만드셨을까? 사람과 사랑을 빼고는 삶을 얘기할 수 없다. 사랑이 빠진 사람은 기계와도 같다. 세상은 사랑이 배제된 사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만 같아 안타깝다.
human, love, life
"사람+사랑=삶"
'삶이란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 일전에 회사를 나오면서 썼던 퇴직 인사 메일에 위에 글을 인용했던 기억이 난다. 회사도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인데 너무 척박해져 가는 동료들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물론 누구도 탓할 수는 없다. 그냥 이 글귀가 바쁜 일상 중에 그들에게 잠시나마 삶에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 같다. 내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사랑은 감정과 타이밍이다.
아마도 나는 타이밍이 잘 맞추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면... 그래서 사랑은 어렵다. 감정과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옛말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 있다. 이젠 옛말일 뿐이다. 싫은 감정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진 않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현대인은 그런 시간과 노력을 아까워한다. 또 요즘은 스토킹 범죄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감정과 타이밍이 맞는 상대가 찾아나서기 보다 그가 '짠'하고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호감은 타이밍이 맞지 않고 비호감은 자주 마주치게 되는 이런 아이러니 한 상황을 나만 겪는 것인가? 그리고 힘든 시기에 옆에 있던 사람과는 인연이 되지 못하고 여유 있는 시기엔 그런 사람이 옆에 없다. 인연이 맺어지기 힘든 건 감정과 타이밍이 불확실성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행복과 아픔
사랑의 두 가지 얼굴이다. 우리는 행복만 가지고 싶다. 무엇을 가지게 될지 알 수 없다. 사랑은 예측 불가능하니까. 사랑을 포기하고 반쪽 뿐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건 행복은 없지만 아프지는 않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기 때문일까? 하지만 사랑의 아픔을 견뎌내면 더 강해진 나를 만날 수 있다. 감기가 지나면 면역이 생기듯이 말이다. 그러니 아플지라도 해보는 게 낫다. 아프다고 주사를 안 맞을 순 없듯이...
"사랑 = 사(생각할 思) + 량(헤아릴 量)"
둘이 비슷한 건 사랑을 하면 헤아릴 수 없이 그 사람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진실로 사랑한 사람은 평생 동안 잊히지 않고 가슴속에 안고 살아간다. 첫사랑이 잊히지 않는 건 진실로 순수하게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읽은 책이다. 2년 전쯤 서점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읽으면 읽을수록 따뜻해진다. 언어의 온도를 읽는 동안 내 마음의 온도가 1도는 올라간듯한 기분이다. 일상을 글 속에서 녹아내어 의미를 찾아내는 작가의 글쓰기가 마음에 든다. 아름답고 화려하진 않아도 잔잔하고 은은한 여운이 남는 글들이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언어(말과 글)의 온도가 올라갈수록 세상의 온도도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