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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Feb 23. 2022

느낌을 사랑하는 자들

[연애 실험 : 블라인드 러브]를 보다가 문득...

 "느낌을 믿는다는 것은 '이성'과 '경험이라는 우리 안의 신(神)들을 놔두고 할머니, 할아버지, 그 윗대 할머니,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 


내가 좋아하는 니체의 말로 글을 시작해 본다. 


  소설만 쓰다가 오랜만에 이곳에 글을 남긴다. 글과 삶은 닮아있다. 지속하는 것이 힘겹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한다. 그건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사랑에 대한 감상이 떠올라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느낌을 맹신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 강력한 느낌이라는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쉽진 않다. 하지만 이 느낌이 종종 잘못된 판단과 생각으로 이어져 후회를 낳은 경험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사람은 느낌이 오지 않아"


우리는 이성을 볼 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당신은 사랑을 하는 데 있어서 느낌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는 이성과의 첫 만남에서 순간의 느낌으로 상대방과의 만남을 이어갈지 아니면 헤어질지 결정한다고 한다. 단 몇 초 만에 느낌은 근거 없는 확신을 만들어 준다. 그건 엄밀히 말하면 상대방이 나에게 성적 매력을 지녔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과정과 같다. 인류는 수만 년을 거치면서 더 나은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오감을 통해 전해지는 이성의 정보를 가장 빠른 시간에 분석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뇌 속에 탑재했다. 이건 모든 동물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번식의 본능이다. 그 말은 지극히 동물적 본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도 동물이지만 이성(理性)이라는 동물이 가지지 않은 또 다른 능력을 탑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말한다.


이성(理性)은 이성(異性)에겐 무력하다


 문제는 이 이성이라는 것이 이성에겐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녀관계만큼 어지럽고 복잡한 것도 없다. 오감을 통해 전해지는 이성의 매혹적인 느낌은 이성(理性)과 경험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다.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또 헤어지고 또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은 그런 느낌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좋게 얘기하면 순수하며 감성적인 것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성에게 어필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자신의 성적 존재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성의 오감을 자극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패션과 미용 그리고 성형 산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그런 외모지상주의에 가장 선도적인 국가 중 하나이다. 물론 외면과 내면이 잘 조화를 이룬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이 또 양극화에서는 한 가닥 하는 국가가 아니던가.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내면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알기도 쉽지 않다. 내면은 성숙되는 것도 알아가는 것도 모두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외면은 시각적이고 즉각적이다. 외면은 바꾸는 것도 감추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외면을 가꾸는 것이 효율면에서 가성비가 뛰어나다. 그건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선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안타까운 건 이 외면이라는 것은 단기간의 효율성은 높을지언정 지속성이 떨어진다. 짧은 시간에 이성에게 호감과 원하는 행동을 유발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약발이 떨어진다. 서로의 관계를 지속할  연료가 떨어진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나아가는 차 안에서는 앞을 보지만 정체된 공간은 서로를 바라본다.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는 부실한 내면이 서로를 갈아먹는다. 


"성격차이예요"


  남녀의 헤어짐의 원인을 두리뭉실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성격 또한 내면의 한 종류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격은 사실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상대방의 가치관, 생활습관, 성적성향, 언행 등을 포함한다. 


"성격 좀 죽여라"


  성격은 잠시 죽일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은 사회에서 매일 성격을 죽이며 살아가고 있다. 마음에 드는 이성을 유혹할 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나 조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면 성격이 드러난다. 이건 이성을 유혹한 후에 성격이 드러나는 것과 유사하다.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와 관계의 구속성이 견고해지면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원래부터 성숙한 내면을 지녔다면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관계는 파국으로 흘러간다.


   결국 대부분의 남녀가 느낌에서 시작해 성격으로 파국을 맞이한다. 그 누구도 '얼굴이 못생겨서 헤어졌어요' '키가 작아서 헤어졌어요', '뚱뚱해서 헤어졌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게 싫었다면 애초에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선 내면의 성숙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Feeling and Timing


  과거 나 또한 이 강력한 느낌이라는 것을 맹신했다. 느낌이 오지 않는 이성은 애초에 이성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느낌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는 것을 몰랐다. 순간의 욕정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아닌 연애 상대 더 나아가 인생의 반려자 찾고자 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느낌은 순간의 감정이다. 느낌은 시시각각 변해간다. 계속 변해가는 느낌에 휘둘려서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 이제는 이성을 볼 때 순간의 느낌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 느낌이 지속되는지 관찰한다. 시간이 흐르고 시간이 만들어낸 느낌, 즉 경험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나는 쉽게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동안 사랑이 떠나간다. 누가 그랬던가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그 말이 틀리지 않다. 하지만 나는 타이밍을 맞추는 사랑보다 타이밍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랑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회가 오면 잡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삶의 원칙도 지키지 않으며 살아가는 내가 어찌 보면 어리석게 여겨질 때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이성의 벽이 커져버린 걸... 


  필링이 없다면 사랑 또한 없다.  이 느낌이라는 도화선이 있어야만 남녀는 서로를 끌어당기게 된다. 나 또한 이 느낌이 오는 이성을 만나면 통제력을 상실하곤 한다. 알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두근거림을 들키지 않으려 하는 행동이 평소와는 다른 어색함을 선사하곤 한다. 그 말은 평상시의 나의 몸과 정신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성의 통제는 갈수록 강해진다. 아무리 느낌이 오는 이성일지라도 이성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경험이 쌓이면 쉽게 이성에게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건 어찌 보면 자기 방어일 수도 있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일 수도 있다. 어찌 됐건 이 느낌의 유혹은 사라질 수 없지만 느낌이라는 것에 전적으로 휘둘리지 않게 된다.


느낌이 없었다면...


   과거 인류는 이렇게 빠른 번식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고도화 선진 사회로 갈수록 이 번식률은 떨어진다. 이성과 경험이 지배하는 사회는 더 이상 느낌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못 사는 나라일수록 출생률이 높다.  일부 선진국들은 각종 인구 부양정책을 통해 결혼과 출산이 이성적인 선택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이건 느낌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닌 이성적 판단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현재 한국도 그런 이성적 판단을 유도하려 하지만 한국은 상황이 같지 않은 듯하다. 근본적인 남녀 간 혐오와 양극화가 만연한 정서는 정책적인 걸로 극복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현재 한국이나 중국 일본의 상황을 보라. 이제 더 이상 이성으로부터 행복을 얻으려기 보단 스스로에게서 행복을 찾아가는 이들이 더 많다. 관계에서 얻는 느낌과 감정보다 경험과 이성의 판단을 더 중요시한다. 관계는 통제가 어렵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 중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개인의 자유과 권리가 강조되는 사회일수록 그 현상은 심화된다. 사실 국가라는 시스템은 공동체를 약하게 만든다. 국가가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치안을 보장함으로써 개인은 더 이상 어떤 공동체에 속하지 않더라고 기본적인 자유과 안전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 수렵 혹은 봉건 사회에 놓여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무리 혹은 집단 속에 순응해 안전을 보장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곳을 벗어나는 것은 바로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가 꽃피운 나라일수록 개인주의가 만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느낌은 서로를 바라보게 하지만

이성은 서로가 같은 곳을 바라보게 한다.

인생은 영화처럼 느낌 있는 장면만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인생의 대부분은 느낌 있는 장면 사이사이를 사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느낌적인 부분만 바라본다.

인생은 지루하고 힘겨운 일상을 살아야 하는 멀고 험난한 길과 같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서로만 바라보며 서 있을 순 없다.

걸어가야 한다. 같은 곳을 향해서...

이상형이 아닌 동반자와 함께


                                                                                    - 글 짓는 목수 -

   


 시각적 느낌을 배제하면...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블라인드 러브"라는 연애 실험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남녀 출연자가 결혼을 전제로 서로를 알아가는 내용이다. 오로지 대화만으로 결혼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문제는 남녀는 서로를 볼 수 없다. 모든 시각정보를 배제하고 이성을 판단해야 한다. 느낌이 배제되는 것이다. 물론 목소리라는 청각적인 느낌은 전달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성을 바라볼 때 78%(청각 13%, 촉각 3%, 후각 3%, 미각 3%)를 시각적 정보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성대결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청각적인 느낌은 그렇게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없다.

 남녀는 오로지 서로의 대화만을 통해서 상대방을 판단해야 한다. 지극히 이성적인 뇌를 가지고 상대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남녀 출연자는 노트와 펜을 들고 상대방과의 대화를 기록한다. 그리고 대화방을 나와서는 그 노트를 다시 보며 상대방을 분석하고 또 분석한다.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상대방을 정보를 바라보고 그 정보에 의존해 자신만의 상상으로 상대방을 머릿속에 이미지화시킨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이미지화시켜야만 오래 기억되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글이 시각화되도록 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나 또한 소설을 쓸 때 그런 부분에 가장 많이 신경을 쓰는 편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시각화 과정 속에 있다. 전두엽은 글을 시각화하면서 활성화된다. 그렇기에 독서만큼 좋은 뇌 훈련이 없는 것이다. 영상을 볼 때 컴퓨터의 CPU는 열을 내며 돌아가지만 우리의 뇌는 일을 하지 않는다. 기계가 대신 일을 해서 뇌에 넣어주고 있는 과정이다.


  연애 실험에서 남녀는 시각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배제하고 상대방의 내면을 면밀히 드려다 보게 된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우선된다. 거기에 청각적인 요소와 상대방의 스토리텔링의 감성적 요소가 조미료가 된다. 


   시각적 느낌을 배제하면 상대방을 깊이 있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이건 마치 우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감동적인 사연을 들을 때와 같은 혹은 감동적인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흡사하다. 서서히 스며들며 은은한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의 즉각적인 그것과는 다르다. 듣기(listening)와 읽기(Reading)는 보기(Seeing)처럼 강력하진 않아 선호되진 않지만 듣기와 읽기가 우리의 뇌와 정서발달에 더 이상적이다. 이건 우리가 유튜브나 넷플릭스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붓지만 사람들의 공감 능력은 해가 갈수록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본다.


지속적 느낌 = 이성적 판단 


느낌이라는 것은 오감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성을 바라볼 때 가장 많이 의존하는 것이 이 바로 이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시각적인 느낌이다. 우리는 섹시하고 건강미 넘치는 이성에게서 섹스어필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거기에 달콤하고 다정한 목소리까지 더해지면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기에 알코올과 음악까지 가미된다면 그 효과는 배가되고 이성을 놓아버린다. 그럼 남녀는 서로의 촉각을 느끼고 싶어 진다. 정신적인 느낌을 육체적 느낌으로 재확인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가장 신속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도시의 밤은 이런 남녀를 끌어들이기 위한 완벽한 장소와 분위기 제공하고 느낌과 소비를 교환한다. 


  오감을 통해 전해지는 이성에 대한 느낌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이 시각적 정보에 의존하게 된 것은 원초적인 본능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더 나은 2세를 낳기 위해 우리의 머리에 새겨진 유전 정보인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남녀는 결합은 더 이상 더 나은 2세를 낳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서로의 통해 행복을 얻고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함이다. 하지만 무의식의 세계는 원초적 본능에 충실하다. 우리는 그것이 이성적 판단이라고 착각할 뿐이다.



"느낌을 믿으라고?  하지만 느낌은 제 스스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언제 어떻게 바뀔지도 모른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우리는 그 느낌에 이끌려 이성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 느낌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다. 모든 로멘스 드라마의 클라이맥스이다. 하지만 그 믿음 얼마 가지 않아 실망과 증오라는 다른 느낌을 선사할지 모른다. 사랑했기에 함께하고 사랑이 사라졌기에 헤어진다는 말은 느낌이 있고 없음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동물과도 같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느낌은 있다 가고 없고 없다가도 생긴다. 그건 서로가 그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에 달린 것이다. 느낌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에 대처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남녀관계는 그 자체로 수명이 있는 하나의 인격과 같다."

                                                                                 - [인간 본성의 법칙] 중에서 -



'영원히 너를 사랑할게'라는 지키지 못할 아니 지킬 수 없는 약속보다는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그래도 난 너와 함께 할 수 있어"라는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줄 수 있는 말이 더 와닿는 건 왤까?


어쩌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한 게 아니라 그 느낌을 사랑한 것일 것이다. 


느낌은 시간을 먹고 변해가지만 진정한 사랑은 시간을 먹고 짙어진다. 

우리는 사랑과 느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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