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도 참나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면 절대로 참다운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 책 속 인용문 -
참다운 나를 찾는다는 것은 도토리가 참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도토리는 참나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식하지 않기에 참나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의식하는 존재이기에 참다운 내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서론이 길었다. 오랜만에 다시 글을 쓴다. 한 동안 글을 쓰지 못한 것 또한 내가 의식의 세계에 더 오랜 시간 머물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를 의식 상태 속에 오랜 시간 잡아놓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하다. 참다운 나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무의식과 자주 마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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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와 참나무
참나무의 열매가 도토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부끄럽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처럼 도토리라는 열매는 소소한 존재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사용되곤 한다. 사실 도토리 열매는 열매라고 보기에는 그 유용성이 떨어진다. 도토리는 그대로 섭취할 수 없을 정도의 쓴맛 때문에 다른 견과류와 달리 별도의 복잡한 가공과정을 거쳐야만 먹을 수 있다. 한국을 제외하고는 여느 나라를 찾아봐도 도토리로 뭘 만들어 먹는 나라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도토리는 다람쥐에게나 어울릴 열매이다. 하지만 사실 다람쥐도 먹을 게 없어서 먹는 것이라고 한다. (다람쥐도 아몬드 같은 맛있는 견과류를 더 선호하며 밀웜 혹은 귀뚜라미같이 육식을 경험한 애완용 다람쥐는 도토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인간과 닮아 있다) 인간도 본격적인 농경시대가 도래하기 이전 수렵시대에는 도토리를 주식으로 이용했지만 농경사회로 시작되고 도토리는 찬밥신세가 되어버렸다.
"참말로 버릴 게 하나도 없네"
하지만 참나무 얘기를 하자면 상황은 달라진다. 참나무는 '참'이라는 단어에서도 느껴지듯이 버려질 게 없을 정도로 유용한 나무이다.
영어로는 오크나무(Oak)로 탈 때 매연이 나지 않고 오래 잘 타기 때문에 오랜 세월 인간이 추운 겨울을 견디게 해 줄 땔감으로 사용되었다. 서양에서는 포도주나 위스키의 숙성을 위해 사용되었고 목재로써의 질도 최상급이라 대항해 시대 범선 재료로 주로 이용되었다. 또한 참나무로 만든 참숯은 항균, 정화, 해독, 냄새 제거 등 수많은 효능을 가지고 있다. 참말로 버릴 게 하나도 없는 나무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나무에게 나무 중에서 가장 참다운 나무라는 뜻에서 참나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 욥기 8:7 -
도토리와 참나무의 관계를 써 내려가다 보니 성경 속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며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좌우명이다. 여기서 미약한 존재의 대명사인 도토리와 여러모로 창대한 존재인 참나무라는 것으로 생각을 확장시켜 보고자 한다. (한국인의 특성인 확증편향을 적극 활용해 보기로 ㅋㅋ) 이것이 이 책의 저자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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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무의식
누구나 의식이 없는 상태, 즉 의식불명 상태에 있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의식 불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산소호흡기를 달고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를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우리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지배적이다. 의식적인 생각과 행동이 인간이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의식 속에서 보내고 있으며 현대사회로 오면서 그 의식에 지배당하는 시간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내 손안에 은하계(Galaxy)와 사과(Apple)가 우리를 의식에 세계에 계속 잡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최면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며 무의식의 세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의식의 세계가 결국 의도치 않고 원치 않은 세상으로 자신을 내몰아 가고 있고 무의식이 의도치는 않았지만 궁극적으로 원하던 세상으로 자신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의식이 나를 잃어버리고 무의식이 나를 찾는 길로 안내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사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항상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지만 그 과정 속에서 항상 시련과 고통을 겪으며 의도한 계획과는 다른 결과에 좌절하며 살아간다.
무의식 = 몰입 = 꿈(최면)
얼마 전 읽었던 [슬로운 싱킹]에서도 이에 관련된 것을 내용(서평 참조_ 몰입할 수 없는 세상)을 경험했다. 몰입의 순간 인간은 이전에는 생각해내지 못하는 혹은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경우가 많다. 또한 꿈속에서 우리는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 전설의 명곡 예스터데이(Yesterday)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틀스 멤버인 폴 매카트니가 이 곡의 선율을 꿈속에서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꿈속에서 들은 그 선율이 현실 속 어디선가 들은 것을 배낀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또한 꿈속에서 소설의 영감을 많이 얻는다고 한다. 이건 우리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많은 것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공간을 떠나
나는 개인적으로 꿈을 잘 꾸지 않는다. 뭔가 생생한 듯한 꿈을 꿔도 잠에서 깨어나면 그 꿈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아무리 다시 그것을 떠올려 보려 해 의식적인 노력을 해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꿈을 통해 뭔가 현실에서 도움을 얻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나는 몰입의 순간에 생각지 못해던 수많은 기억과 생각들이 떠오르고 그것들이 뇌 속 시냅스들이 연결되는 것처럼 연결되고 또 연결되는 것을 느낀다. 사실 나는 그것이 몰입인지 무의식인지 가끔 헷갈리기도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 동안은 시간과 공간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감과 내가 어디에 있는지가 전혀 의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 체험을 제법 집중적으로 겪은 시기가 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이곳 호주도 락다운이 강화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거의 한 달간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시간은 오로지 운동을 위해 공원을 찾는 시간과 식료품을 사러 나가는 시간이었다. 그때 방 안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몰입의 시간을 경험했다. 글을 쓰고 있는 시간에는 시간이 가는지도 내가 어디 있는지도 인식이 되지 않음을 경험했다. 그냥 무의식의 세계에서 떠오르는 기억과 생각과 상상이 손가락을 타고 움직이며 나의 시선은 그 하얀 세상 위의 커서만 따라가고 있었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밀려오는 허기에 몰입 아니 그 무의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때 한 달 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썼던 적지 않은 원고가 나의 하드디스크에 잠자고 있다. (퇴고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몰입 혹은 무의식의 시간이 스스로에게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만족과 환희를 선사했다는 것이다. 그건 여태껏 살아오면서 경험한 다른 만족과는 다른 것이었다. 물질이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피동적이고 상대적인 효과가 아니었다. 오로지 스스로 내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무언가 였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창세기 1:3 -
우리 주변에서 절대적으로 변치 않는 존재를 꼽으라면 빛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빛을 신에 견주어 얘기하기도 한다. 빛의 속도는 299 792 458 m / s로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변함이 없다. 빛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다만 직진하는 것 같은 빛도 아주 멀리서 바라보면 중력(질량이 큰 물체에서 주변에서 발생하는)에 의해 휘어지며 또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이 미세한 수준에서 들여다보면 입자와 파동으로 다른 존재들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 두 가지 형태로 동시에 존재한다. 빛은 시공간에 제약 없이 일정한 속도이지만 그 모습은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이 빛이라는 존재는 절대적(고전역학)이면서 상대적(양자역학)이다. 우리는 신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빛은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이다. 그러면 신과 빛을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일까?
신(God)과 빛(Light) 그리고 인간(Man)
신과 빛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는다. 시간에 흐름에 취약하다. 그리고 춥고 덥고 더럽고 힘든 공간적 환경에 의해 계속 변화된다. 적도에 살고 있는 사람과 극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의 생활방식과 신체의 변화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제한된 시간 안에 무언가를 이루고자 끊임없이 분주하고 더 나은 환경과 공간을 찾아서(여행) 안되면 만들어(건축) 간다. 그것이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게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간다운 삶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 창세기 1:27 -
그럼 여기서 생겨나는 의문점이 하나 생겨난다.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인간을 창조했다. 그럼 인간도 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인간도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난다는 것을 다르게 해석하면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바로 무의식의 세계가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상태인 것이다. 왜냐 우리는 무의식의 상태에서 시공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몰입 혹은 꿈) 상태에서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이뤄내고 생각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Thanks God!"
사람들은 몰입에서 얻은 성취와 성과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건 신의 힘을 빌려서 그것을 이뤄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이 우리를 만들었기에 우리에게도 분명 신이 가진 능력,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능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무의식이다. 그 무의식은 의도적인 몰입과 최면을 통해 혹은 비의도적인 꿈을 통해 발현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고 이뤄내는 것이다.
3시간 반이 흘렀다.
몰랐다. 창 밖에 어둠이 깔린 것을 보고서야 시간이 흘렀음을 알아차렸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인기척이 사라져 감을 인지했을 때 비로소 나는 빈 도서관에 혼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한다. 모처럼 글을 쓰며 몰입 속의 무의식을 또다시 경험했다.
서문에서 도토리가 참나무가 되는 과정처럼 의식이 없는 미미한 존재가 참나무가 되는 것은 무의식을 통해서이며 인간도 무의식을 통해 참다운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항상 의식과 각성상태를 유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의 제약이 결국 인간이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