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이 찡해지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컥함이 가슴에서부터 목을 타고 밀려 올라왔다. 당황스럽다. 그 울컥함에 목이 잠겨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없었다. 소리가 터져 나오지 않아 입 모양만 스크린에 비친 가사를 따라 했다. 잔잔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넓은 강당의 군중 속에 섞여 누가 볼까 앞만 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렸다. 손을 들어 흐르는 눈물을 닦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는 눈물 흘리는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음악이 흐르고 눈물도 흘렀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선 끝에 모여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멈추지 않는 눈물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마음이 녹아내리며 가슴 안이 뜨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일은 여러 번을 망설이고 또 염려하며 내면 깊숙이 감춰두었던 생각과 감정들을 사람들 앞에서 토해낸 이후부터였다.
(자작 소설 중에서 발췌...)
눈물
우리는 머리로 이해하기 힘들지만 마음이 움직이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머리는 냉철함을 유지하려 하지만 뜨거워진 마음이 그 냉철함을 흐트러뜨리는 순간을 경험한다. 지금 내가 서두에서 쓴 글과 지금부터 쓰는 글이 다르듯이 앞은 심장이 시키는 데로 손가락이 따라간 것이고 지금은 그렇게 따라간 글을 머리로 다시 꼽씹으며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종종 이렇게 감성을 이성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설명하기 힘든 감성의 영역을 이성으로 풀어헤치며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게 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령으로 감화 감동받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누군가가 말했다. 자신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느낄 수 없는 하지만 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게 그들이 말하는 그것인지... 머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마음이 요동치는 순간이 있다. 항상 이성적인 상태에 익숙해져 느닷없는 감성이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이건 어떤 감동적인 장면(영화, 드라마 등)이나 상황을 접하고 난 후 나타나는 그런 류의 감성이 아니라 더욱 이상하게만 느껴진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다"
- [마태복음] 7:7~8 -
우리는 때론 불가항력(不可抗力, force majeure)적인 상황에 직면한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도 밖에 없다. 천재지변과 예상치 못한 인재(人災) 혹은 질병이 닥쳤을 때 우리는 눈을 감고 기도한다. 세상을 주관하는 전능한 존재를 향해 두 손 모아 기적을 바란다. 이런 기도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다. 사실 간절함이 없을 때 나타나는 기적은 기적이 될 수 없다.
예전에는 그랬다. 그 기도가 너무나 세상적인 것들이었다. 부와 명예와 지위 같은 성취와 성공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 기도는 간절함이나 절박함 보다는 시기와 질투가 만들어 욕심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게 했다.
"제 친구는, 제 동료는... 이러이러합니다. 저에게는 왜 주지 않으십니까, 저도 그것들을 갖게 하시고 그렇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기도는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나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게 만든 것이었다. 인간은 본디 사람들 속에서 비교하며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 끊임없이 타인을 바라보며 또 자신을 바라본다. 그래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본받을 존재를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이 땅에 만인이 본받아야 할 롤모델 내려보내신 것이 아닐까.
어린아이 시절 우리가 부모를 보며 말과 행동을 따라 하듯이 바라보는 대상을 눈으로 보고 듣고 만지며 그들을 닮아간다. 그래서 사실 '그 자식에 그 부모'라는 옛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오랜 시간 부모에게서 보고 배운 것들이 몸과 입에 배어 있어 은연중에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모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가장 첫 번째 영역이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의 보살핌의 대가로 부모의 색깔을 가져가야 하는 첫 번째 운명에 처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본(本) 받을 자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면 부모의 품을 떠나야 한다. 부모를 떠나면 또 다른 본(本)을 찾아야만 한다. 본받을 자를 찾아야만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집 밖으로 나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난다. 그 속에서 또 다른 본을 찾아간다.
"야~ 숙제 안 한 놈들 다 앞으로 나와"
"퍽 퍽 퍽!'
누군가는 학교에서 훌륭한 스승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학교는 본받는 공간이라기보다는 혼나지 않으려 애쓰는 공간이었던 것 같다. 선생들에게서 무엇을 본받아야 할지 몰랐다. 선생이라는 존재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고 피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가르침이 아닌 세뇌와 매질을 번갈아 가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학생들도 다시 이어가게 하려는 존재로만 느껴졌다. 물론 그들도 그렇게 배웠기에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을 바라봤다. 친구들은 동등하고 다양했다. 그들은 저마다의 색깔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와 다른 색깔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 친구들을 본받기 시작했다. 멋을 잘 부리는 친구, 싸움 잘하는 친구, 여자에게 인기 많은 친구, 운동 잘하는 친구, 등 개성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내가 가지고 있지 않는 색깔들을 부러워하며 나도 그 색깔을 가지고 싶어 했다.
"야~ 요즘 XX 주식이 핫하다던데..."
"아직도 주식하냐, 이제는 코인이 대세지"
"으이그~ 그러다 훅 간다. 머니머니해도 부동산이지 이 어리석은 중생들아"
시간이 흐르고 친구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자 그들은 점점 색깔을 잃어가는 듯 보였다. 다채롭던 어린 시절 그들의 색깔은 어느새 비슷한 색깔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는 너무 다른 친구들이 재미있어 모였다면 이제는 너무 비슷해서 모이게 되는 것 같았다. 옛날은 너무 다른 생각들로 만나면 티격태격하며 니 잘났네 내 잘 났네 하며 싸우던 친구들이었지만 이제는 비슷한 관심사로 했던 얘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그것이 공감이라고 생각했다. 공감은 나와 다른 이의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나는 항상 나와 같은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며 공감하고 있다고 느꼈다.
두 가지 친구, 같은 종족
시간이 또 흐르고 친구들은 이제 두 가지의 색깔로 나눠지는 듯 보였다. 세상을 잘 본받은 친구는 그 대가로 부와 지위와 명예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세상을 잘 본받지 못한 친구는 그것들에서 멀어지면서 그것들을 부러워하며 시기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 또한 그렇게 변해가는 듯했다. 세상을 본받고자 열심히 노력해도 그게 쉽지 않았다. 어쩌면 세상을 닮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잘 본받으며 그 대가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둘씩 갖춰나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면서도 그들을 본받고자 하는 나의 이중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처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에 대한 실망감이 커져갔다. 나는 뱁새 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하는 말이 왠지 나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럴수록 더욱 송충이로 살고 싶지 않았다.
친구는 세상의 주인이 되어가고 나는 세상의 노예가 되어가는 듯 보였다. 그래서일까 더욱더 자유를 갈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나 또한 그들처럼 세상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것을 시기하는데서 비롯된 핑계 같은 것이었다. 물질 세상에서 나의 존재의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자유를 갈망한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대의명분과 같은 것이다. 결국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들이나 모두 같은 종족들이다. 물질에 모든 가치를 두고 있는 자들이다.
이해관계자들
학교를 떠나 사회로 나오자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다.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사회에서 만난 자들은 겉으로는 친절하고 상냥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친절과 상냥함 뒤에 숨겨진 것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단지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이었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는 행동양식일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사회라는 무대에서 리얼한 연기를 하는 존재들 같아 보였다. 그것을 확실히 알게 된 건 내가 그 사회라는 무대를 떠나고 나서였다. 그들과 경쟁과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그들에게 의미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걸 너무 잘 알기에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과 이해관계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였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고...
새로운 본을 찾아서...
언제부터인가 부모와 내가 속한 세상(학교와 친구 그리고 사회) 속에서 본을 찾는다는 것이 어쩌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없는 세상으로 떠났다. 그물망처럼 엮여있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니 하릴없이 한가한 시간이 펼쳐졌다.
책을 읽었다. 내가 속해보지 않았던 환경과 상황에 있었던 자들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자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속한 세상이 나를 속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그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을 머릿속에 정리해 나가는 시간을 가졌다.
자신이 처한 환경은 내가 세상을 보는 틀(프레임)을 만들고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나와 다른 환경과 생각을 가지 자들의 것들을 보고 느껴야 했지만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이 바쁘게만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 세상이 우리를 끊임없이 바쁨 속에 몰아넣고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산업자본주의 사회가 노예(노동자)를 길들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노예는 그렇게 물질의 쾌락과 편리의 보상으로 누군가의 주인이 되어가는 듯 느끼지만 결코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함을 알지 못한다.
그 어디에서 소속되지 않은 인간에게 하릴없는 무료한 시간이 이어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긴 무료함이었다. 무료함이 계속되자 나태함과 불안함 밀려들었다. 나태함을 없애려 몸은 운동으로 혹사시키고 불안함을 없애려 정신은 책과 글 속으로 몰입시켰다. 그러자 평온함이 찾아들었다. 이제 그 시간이 오히려 감사하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바꾸고 있는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배움과 깨달음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좋고 나쁨을 이야기 하긴 어렵지만 무엇이 나에게 더 나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는 알게 되었다. 지식으로 얻은 깨달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과 귀를 주었다. 하지만 뭔가 허전함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또 다른 본을 찾다
홀로 있는 시간은 자신을 드려다 보는 시간이었다.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으며 타인에게 이성적인 척하던 모습에서 철저하게 자신에게 이성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과거 읽었던 칸트 철학 [순수이성비판](서평참조)에서 말한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과 같다. 세상과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어가며 멀어지고 잃어버렸던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과정을 넘지 못하고 삶과 이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왜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유혹과 타인의 시선이라는 프레임에 못 박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세상이 제시하는 성공의 롤모델만을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은 자들의 말과 행동만을 추앙하고 따라간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보면서 오죽 답답했으면 롤모델까지 내려주셨겠냐?"
누가 말했다. 이 말이 참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머릿속을 맴돈다. 성경은 예수가 오기 전(구약)과 온 이후(신약)의 이야기로 나눠져 있다. 예수가 이 땅에 오기 전 신은 여러 선지자(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등등)와 예언자들과 직접 대화하며 일일이 모든 것들을 알려주고 지시하며 소통했다. 하지만 예수가 온 이후에는 그런 소통이 거의 모두 사라졌다. 아마 신도 지쳤던 모양이다. 이제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알려주기 귀찮았던 것일까? 아예 롤모델을 땅 위로 보내버리고 그가 자신을 대신하게 만들었다. 그를 통해서 인간들이 본을 받길 바랐다. 하지만 결국은 인간들은 그를 본받을 자가 아닌 본받지 말아야 할 죄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신께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부탁하며 세상을 떠났다. 이게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대속(代贖)이다.
우리는 노래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신이 내린 이 롤모델을 닮아갈 수 있을까? 누구나 우러러보지만 누구나 따라갈 수 없는 길이다. 왜냐 세상과 반대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속하여 살지만 세상에 속하려 하지 않는 자를 본받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모순적이고 비논리적인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