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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불충분

평범한 남자 EP 9 (개정판)

by 글짓는 목수

“때르르릉~ 때르르릉”


요란한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간밤에 누가 나에게 멍석말이라도 한 것인가? 온몸이 욱신거린다. 목도 칼칼하다. 지난밤에 추위 속 떨면서 잠복근무를 한것 때문인지 감기 몸살이 찾아온 것 같다.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칼칼한 목을 달래려 따뜻한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둠 속에서 아직 눈이 내려고 있다. 간 밤에 눈이 꽤 쌓인 모양이다.


"아~ 큰일이네. 이래서야 그 엿 놈들 숙소까지 갈 수 있을까?"


시계는 새벽 4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발목에 쇠사슬이 묶인 죄수처럼 힘든 몸을 질질 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려 수도꼭지를 틀어도 물이 나오질 않는다. 수도관이 얼어버린 모양이다. 사다 논 생수로 양치를 하고 대충 고양이 세수로 눈곱만 떼어내고 방을 나섰다.

오늘은 정말 강력한 한파가 닥친 모양이다. 어제보다 더 춥다. 5시 반이 넘어가고 있다. 샤오왕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눈길을 헤치고 오는 게 만만치 않으리라.


"띠리리 띠리리"

"喂 喜宅! 我是小王,昨晚雪下得很厉害,我在车上,堵车很厉害都走不动了 (여보세요~ 희택 씨! 샤오왕이에요, 밤에 눈이 엄청 내렸어요, 차 안인데, 차가 움직이질 않네요"

"啊?那该怎么办?" (예? 그럼 어떡해요?)

"你现在宾馆里边儿等着吧,我尽快到你那儿,我到了就给你打电话” (우선 호텔 안에서 기다려요,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도록 해볼게요, 도착하면 전화드릴게요)

"什么时候能到呢? “ (언제 도착하는데요?)

"我也不知道,道路情况不好,我会尽力吧” (나도 모르겠어요,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서, 최선을 다해볼게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 오늘 왜 날씨가 이런 건지… 그냥 기다리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너무 야속하게 느껴진다. 밖에 서 있다간 눈사람이 될 것 같다. 몸을 녹이려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호텔 로비에 놓여있는 히터 옆 소파에 앉았다. 감기 기운 때문일까 히터의 온기 때문일까 스르르 눈이 감긴다.


"띠리리 띠리리"


얼마 동안 잤던 걸까? 전화 소리에 벌떡 깨어나 7시가 다 되어간다. 밖은 어느새 어둠에서 벗어나 있었다.


"喂~喜宅! 我们到了不好意思太晚了吧,你下来吧 “ (여보세요 희택 씨 우리 도착했어요, 죄송해요 너무 늦었죠, 내려오시죠)

"嗯~好吧,稍等一下,我马上过去" (아~ 알겠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바로 갈게요)


그렇게 우리는 7시가 다 되어서야 출발했다. 속도를 낼 수가 없다. 호텔에서 귀빈 숙소까지 가는데도 쌓인 눈 때문에 도로가 아수라장이다. 이대로 라면 9시나 돼서야 도착할 분위기다.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타들어간다. 앞에 앉은 부부는 이런 나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침을 못 먹었다며 차예단(찻잎으로 삶아낸 달걀)을 먹으면서 나도 하나 먹으라며 건네준다. 참 속도 좋다.


'아~ 나 참! 얘네들은 지금 계란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나? 이런 절박한 순간에 나는 지금 범인들(총경리와 방과장)이 사라지면 어쩌나 노심초사인데…’


혼자 속으로 울분을 삭힌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귀빈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전날 밤 주차되어 있던 총경리의 차가 사라졌다.


"咦! 车怎么不见了" (... 아~ 차가 어찌 안 보이지?)

"是啊~,难道他们一大早都出去了?” (그러게, 설마 이 아침에 나간 거야?)

"你看!车不在人会在嘛?" (이봐요! 그럼 차가 없는데, 사람이 있겠어요?)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해 신경질적인 말투로 대꾸했다. 그들은 나의 반응에 당황했는지 다음 말을 잊지 못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의 실수다. 어젯밤에 혼자서라도 남아 있었어야 했다. 나의 안일한 생각이 결국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내일 귀국인데 내가 한 일은 뭐란 말인가?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정녕 불가능한 임무였다 말인가? 사장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리다니…


"你觉得总经理会再过来吗?" (당신 생각에 총경리가 다시 여기로 돌아올까요?)

"可能不会吧,今天是星期天,他会回家吧" (아마 아니겠죠, 오늘 일요일이니 그는 집으로 갔지 싶은데요)

"…"


그때였다. 샤오왕이 소리를 질렀다.


"你看! 你看!她出来了!" (봐, 봐요~ 그녀가 나왔어요!)

"你说谁?" (누구 말이에요?)

"方科长, 穿黑色的毛皮大衣的,那个女人就是她!" (방과장, 검은색 모피코트 입은 저 여자요!)


어젯밤 그들이 들어갔던 아파트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급스러운 검은색 모피코트를 입고 그에 걸맞은 검은색 윤기 있는 생머리가 차분히 코트 위로 내려앉았다. 코트 아래로 검은 스타킹에 얇은 다리가 풍성한 코트 때문에 더욱 가냘파 보인다. 빨간색 립스틱을 짙게 바른 입술은 구두와 깔 맞춤이 되어 시선을 가로챈다. 고급스러움에 색기가 더해진 그녀의 첫인상은 뭇 남성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녀는 불어오는 찬바람에 코트를 가슴 안으로 끌어당기며 걸음을 재촉한다.


“삐빅”

“부릉~”


걸어가는 방과장에게서 10m쯤 떨어진 곳에 눈처럼 새하얀 BMW 차량이 비상등을 깜빡거리더니 시동이 켜진다.


"噢~她竟然买了一辆新车呀,她上班的时候没开过来那辆车" (오~ 새 차를 샀네~, 그녀는 저 차로 출근한 적이 없어요)

"是吗? 她就是方科长?看来很年轻啊" (그래요? 저 여자가 방 과장이에요? 젊어 보이는데요~)

"他三十三岁没结婚,她拿到的钱竟然买了豪华车,肯定是的,可恶!" (그녀는 33살이고, 미혼이에요, 회삿돈 빼돌려서 고급차를 산 게 분명해요, 괘씸한 년!)

"原来如此" (그렇군요)


난 잠시 멍하니 자신의 차로 이동하는 그녀를 한동안 주시했다. 그녀는 한껏 치장을 하고 어디를 가는 걸까? 우리는 그녀를 뒤쫓았다. 그녀는 시내로 향했다. 도로에 쌓인 눈 때문에 1시간이 훌쩍 넘어 도착했다. 그녀는 시내 쇼핑몰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你们在这儿等着吧,我自己跟踪她" (당신들은 여기서 기다려요, 나 혼자 따라가 볼게요)

"好吧,那我们在这儿等你回来" (알았어요, 그럼 우린 여기서 기다릴게요)


나는 그녀의 뒤를 밟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간발의 차이로 그녀가 탄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내가 누군지 알리 없는 그녀의 신경은 들고 있는 손거울로 향해 있었다. 알 수 없는 향수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그녀의 것이 분명했다. 엘리베이터엔 그녀와 나 둘 뿐이다. 시선을 돌려 힐끔 쳐다본 그녀는 백옥 같은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빨간 입술 한쪽 위에 내려앉은 작지만 선명한 점이 하얀 피부 때문에 더욱 도드라진다. 빨강과 하얀 그리고 검은색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哎! 小伙子! 你看什么呀?别偷看人家好不好?” (헤이! 이봐요! 뭘보는거야? 그렇게 훔쳐보지 말지)

“我..我都没看什么呀” (제가... 저 아무것도 안봤는데요)

“屁呀!你警告你,你得小心啊” (웃기시네! 경고하는데 조심해)

“你这误会,我不是个那种人” (오해예요, 저 그런 사람아닙니다)

“那你是哪一种人啊?” (그럼 넌 어떤 사람인데?)

“我这不必告诉你我是什么人啊” (제가 어떤 사람인지 그걸 당신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요)

“哈哈,你真可笑啊,听你的声音你不是这里人的吧?” (하하, 너 웃긴다, 목소리를 듣자하니 여기 사람이 아닌듯 한데)

“这跟你有什么关系”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예요?)

“我记住你了,你小心!” (너 기억했어, 조심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4층 여성복 매장이다. 그녀는 두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으로 나의 얼굴을 가르키며 사라진다. 나는 그 상황에서 그녀를 따라 내릴 수 없어 한층을 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비상계단으로 내려와 다시 4층 여성복 매장으로 내려왔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그녀를 찾아 매장 안을 돌아다닌다. 그러다 한 여성캐쥬얼복 매장안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니~ 나왔어"

"와 이리 늦었니?"

"눈이 이래 왔는디… 아니 늦을 수 있깐?"

"내 밥무러 갈라니, 가게 잘 보라"

"알았소 천천히 일 보고 오오"


연변 말인지 이북 사투리인지 모를 조선족 모녀의 대화가 정겹게 들린다. 그녀는 어머니랑 둘이 산다고 샤오왕의 통해 전해 들었다. 그녀는 가방을 매장안 카운터 아래에 내려놓고 가게에서 옷을 구경하는 손님에게 다가가 익숙한 장사꾼처럼 살갑게 말을 건넨다. 난 반대편 가게 쪽에 서서 전화를 받는 척하며 슬쩍슬쩍 가게 안의 그녀를 훔쳐봤다. 그녀는 미모와 패션감각을 겸비한 옷가게 사장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선 그녀와 총경리 사이에 그 어떤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다. 잠시 뒤 방과장은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그리고 잠시 뒤 매장 복도 끝에서 중국 공안 두명이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인다.


"警官! 就这里就是他!”(경찰아저씨! 여기 저 놈이예요!)


그녀는 어느새 매장 문 앞으로 나와 내 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공안들에게 소리친다. 그 소리를 들은 공안은 호르라기를 불며 나에게 뛰어온다.


"이런 제길!"


이렇게 계속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출장왔다가 경찰서로 끌려갈 판이다. 나는 공안의 시선을 피해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간다. 사력을 다해 공안을 따돌리고 지하주차장에 대기 중인 샤오왕의 차로 돌아왔다.


"你来了! 有什么事了吗?" (왔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快出发呀,快快!" (빨리 출발해요 빨리빨리!)


혼비백산해서 돌아온 나를 본 샤오왕이 무슨 일이 없었냐며 물어본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길 뻔 했다. 첩보요원에서 치한으로 바뀔뻔 했다. 숨어서 몰래 그녀를 찍은 사진 때문에 만약 공안에게 잡혔더라면 빼도박도 못하고 치한으로 몰려 감방갈뻔 했다.


결국 미행 잠복 작전은 이렇다할 수확이나 증거도 없이 끝나버렸다. 알아낸 것이라곤 불륜 드라마의 여 주인공이 나랑 겨우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홀어머니를 모시는 살아가는 미모의 여성이라는 사실 말고는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샤오왕에게 내일 귀국한다는 사실을 알리자, 당황한 듯 왜냐고 묻는다. 나는 대충 사장님의 호출로 직접 상황 보고를 해야 한다고 둘러대었다. 다시 연락할 테니 걱정 말고 기다려달라고 당부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뭔가 아쉬움이 남는지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가서 사장님께 잘 보고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나의 손을 잡는 게 아닌가. 도착한 호텔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 찰나 그녀가 차 뒤 트렁크에서 종이 가방을 꺼내 나에게 건넨다.


"这是我的小心意,请收下,这是在烟台出名的白酒和樱桃" (작은 성의니 받아주세요, 연태에서 유명한 술이랑 앵두예요)

"别别~ 别这样嘛,我不能收这一些" (아니 아니, 이러지 마세요, 받을 수 없어요)


난 한사코 거절했지만, 순식간에 내 손에 쥐여주고 미소를 지으며 떠나버린다. 나는 멀어져 가는 그들의 차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비밀 출장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귀국날이 밝았다. 일찍 도착한 공항, 출국 심사를 마치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공항 대기실에 앉아 노트북으로 무료함을 달래려 영화 한 편 보고 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喂~ 喜宅你在哪儿?不好了!我有事儿了,怎么办?" (여보세요 희택 씨, 어디예요? 어째요, 큰일 났어요, 어떻게요?)


갑자기 걸려온 샤오왕의 전화,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쏘아댄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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