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스물일곱 번째 -
“쓴다는 것은 망각이다. 문학은 삶을 무시하는 가장 기분 좋은 방식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는 삶을 무시하고 있다. 삶을 무시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삶도 나를 무시한다. 적잖은 시간 삶에서 동떨어진 시간을 보냈다. 사색과 독서 그리고 글쓰기, 2개월이 넘는 시간 나는 삶을 살지 않고 삶에서 동떨어져 살았다. 기분이 좋더라. 그런데 이것에 빠져 있을 때는 기분이 좋은데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현실의 삶이 눈에 들어온다. 불안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나는 그 불안까지도 무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불안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왜냐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면 대부분 현실의 문제들로 대화를 채워가기 때문이다. 집값, 월급, 정치, 자녀교육, 주식, 음식, 건강 등 그런 얘기를 듣다 보면 대부분 돈을 더 많이 벌어서 그것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똑같은 결론에 이른다. 이제 나이를 먹어서일까, 대놓고 돈돈돈 하진 않지만 그들의 말의 종착지는 결국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어야 하는가이다.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무리 중에 누가 그것을 가장 많이 그리고 잘 해결해 가는 인간인지 속으로 순위를 매기고 있다. 그럼 대충 자신의 순위가 나오고 그것이 마치 그 무리의 서열처럼 되어버린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계층 아니던가. 그럼 모임이 끝나고 다음 모임이 있을 때까지 그 서열을 올릴 수 있는 갖은 노력을 해야 한다. 다음 모임에서 순위가 밀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대게 그렇게 순위가 밀려나는 친구는 어느 순간부터는 그 모임에 나오지 않더라.
웃기지 않은가? 사람들은 모여서 대화하고 함께하는 시간은 현실적인 주제들 뿐이다. 일상이 항상 현실의 수많은 일들로 채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모인 지인들과의 대화마저도 그런 현실의 문제들로 대화를 채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에게 현실에서 벗어나는 시간은 오직 잠자는 시간뿐이다. 그것마저도 줄여가며 더 오랜 시간 현실에 머물려 한다. 어쩌면 신은 인간이 스스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잠을 선사한 것이리라.
나는 사람들과 잠시 떨어져 있기로 했다.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그 현실의 불안이 싫어서. 그래서 나는 계속 쓰는 것이다. 망각으로 불안이 스며들지 않게.
섞이지만 섞이지 않는
그렇다고 내가 은둔 외톨이처럼 칩거하거나 수도사처럼 어디 산속으로 숨어버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사람들 속에 섞여 있되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진 않는 상태, 즉 불특정 대중 속에 섞여서 그들을 관조하는 상태를 즐겼다. 이른 아침 카페 혹은 공공 도서관에 앉아 사람들의 오고 가는 풍경과 대화하는 풍경,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을 잔잔한 뉴에이지 음악과 함께 보고 있으면 때론 내가 그 사람이 되어 내 눈에 보이지 않던 그 사람의 시각을 내가 가지는 상상을 한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의 뉴에이지 음악에 덮여 들리지 않는 그들의 대화가 내 머릿속에 만들어지고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사람들이 보고 있는 책과 노트북 화면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렇게 관조하며 상상하는 시간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건 때론 내 글감이 되어 나의 손가락 끝을 따라서 한 편의 이야기가 되곤 한다. 물론 그 이야기들이 모두 완전한 플롯을 갖추고 결말까지 이어지진 않는다. 짤막한 단상의 이야기로 나의 글 속에 묻어간다. 그럼 나는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입가에 미소가 돌고 얼굴에 생기가 돌며 머릿속은 꽃밭이 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문학을 즐기는 방식이고 삶을 망각하는 방법이며 삶을 무시하는 시간이다.
단톡방의 의미
호주에 오랜 시간 머물면서 내가 속해 있던 한 단톡방이 하나 있었다. 호주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어디 도움 구할 곳과 정보를 구할 곳이 없어 들어갔던 방이었다. 그 방에 6년 동안 있었다. 그 단톡방은 거의 오프라인 교류가 없었다.
[굿모닝]
그들은 마치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 그 방에 머무는 듯했다. 그 단톡방에 남겨지는 대화는 아침인사 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거기에 골수 멤버들은 그 방을 나가지도 않는다. 그 이유가 뭘까?
코로나가 덮친 19년 이후 호주에 수많은 유학생과 워킹들이 짐을 싸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호주는 자국민과 영주권자 이외에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지원도 않겠다는 대대적인 공표를 날린 뒤였다. 그때부터 남겨진 학생들과 워킹들은 살기 위해 버텨야 했다. 일자리도 없이 그 비싼 렌트비와 생활비를 감당해 내며 언제 사라질지 모를 전염병과 락다운을 견뎌야 했다. 그때 그 단톡방 사람들은 매일 귀국으로 단톡방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외로움과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그때부터 아침마다 시작된 생존 신고가 바로 ‘귿모닝’이었다. 만남과 직접적인 교류가 없이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이건 아주 극단적인 상황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이와 같은 비슷한 목적과 동기를 가진 단톡방을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다. 이건 연결되어 있어야만 안도하는 인간의 본성이 작용한 것이다. 톡을 확인할 대꾸할 의무도 책임도 없이 내가 연결되고 싶을 땐 언제나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원한다. 간섭과 영향을 내가 취사선택 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불특정 다수가 시공간의 제약 없이 머무는 온라인 커뮤니티 공간이고 거기서 조금 더 강한 유대감을 느끼기 위해 선택한 곳이 바로 특정 목적 혹은 주제를 위해 모인 소수의 단톡방일 것이다.
우리는 원할 때만 연결되고 싶다. 원할 때 나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다. 원할 때 연결되고 표현할 수 있는 곳, 원치 않을 땐 언제나 숨고 떠나버릴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원한다. 그런 곳에서 내가 원할 때 상대도 원하는 기적 같은 환상을 꿈꾸기도 한다. 그래서 온라인은 오프라인으로 연결된다. 상상이 욕망을 불러내고 욕망은 실현을 꿈꾼다. 그리고 이 과정엔 언제나 불안이 함께 한다. 그렇게 불안의 삶이 반복된다.
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타인에 의해 지속적으로 생겨나는 이 불안을 막아낼 혹은 개의치 않을 멘털을 장착하는 훈련의 시간이. 그것이 나에겐 문학을 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무엇에 흔들리고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민감한지 그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과 무슨 행동을 해야 그 불안에서 휩쓸리지 않는지 알아야 했다.
올림픽이 시들해진 이유
세상은 인간의 비교 경쟁의 본성을 이용해 발전한다. 하지만 그것에 끌려 다니다 보면 항상 쫓고 쫓기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정한 경쟁 우위는 무엇일까? 그 경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쟁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내가 브랜드가 되고 트렌드가 되는 것이다.
요즘 올림픽의 열기가 예전같이 않다. 얼마 전 폐막한 파리 올림픽은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관심이 없었던 올림픽이었던 것 같다. 언제 개막을 했고 폐막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메달 순위도 모른다. 아직까지도. 이건 나만 그런 것인가? 아니라 생각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올림픽은 최고를 가리기 위한 경쟁이다. 올림픽이 산업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지구촌 사람들의 열렬한 관심의 대상이 된 건 왜일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규칙, 룰) 속에서 가장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가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콜로세움 경기장에 사자 한 마리를 집어넣고 그곳에 노예들을 집어넣어 누가 살아남는가를 보는 것과 같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경기장은 벗어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같이 들어온 노예들은 나 보다 먼저 죽어야만 하는 희생양이다. 그동안 나는 기회를 엿보며 좀 더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사자가 다른 노예를 잡아먹고 배가 부르면 나는 좀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사자는 다시 배가 고플 것이다. 언젠가 나도 사자와 싸워야 한다. 운이 좋아 사자가 다른 노예를 잡아먹을 때 녀석을 제압해서 죽였다. 최후의 생존자 되어 박수갈채를 받는다. 이것이 올림픽 우승자와 다른 점이라면 스포츠에서는 사자가 없다. 절대적인 강자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공평하고 공정하다. 그래서 더욱 열광한다.
최고가 아닌 최초
시대가 바뀌고 있다. 이젠 최고가 아니 최초가 되려는 자들이 많아지는 세상이다. 왜 최고의 1등이 되기 위해 내 삶의 모든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하는가? 1등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올림픽은 보험도 없다. 1등이 안되면 주는 최소 보험금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뭐 그렇다면 그렇게 필사적으로 운동을 하지도 않겠지만.
세상은 언제나 1등만 기억한다. 그럼 차라리 최초가 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내가 남과 다른 무언가가 된다는 것 비록 그것이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을지라도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세상이 만든 기존의 경쟁과 규칙의 시스템 속에서 1등이 되려고 노력하기보다. 내가 만든 규칙과 생각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사회와 공익에 해를 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건 반드시 선한 양심에 근거해야만 한다. 앞으로 올림픽은 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멀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유일한 자신을 찾기 시작했고 최고가 되는 것보다 최초가 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려 할 것이다.
최초는 최고와 같다. 손쉬운 최고이며 알아주지 않는 최고이다. 최초이기에 혼자라서 1등이고 만약 누가 나를 따라온다면 그래도 1등이다. 누가 따라온다는 것은 내가 오랜 시간 그것을 해왔고 그걸 보아온 누군가가 결심하고 따른 것이다. 그럼 나는 선점 효과와 경험 우위를 점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늘어나면 새로운 비교와 경쟁의 영역이 탄생한다. 이것을 경제학 용어로 ‘블루오션’이라고 표현하던가? 물론 그곳도 시간이 지나면 치열한 경쟁과 비교가 시작되겠지만… 그럼 또 다른 새로운 영역으로 기존의 것을 놓고 도전할 수 있는 그럼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이제 세상이 발전해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최고는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
진정한 멘털을 찾고 강화하기
결국 이 모든 것은 나의 정신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뇌라는 물리적인 매개체에 의해 존재한다. 뇌는 내가 보고 듣고 읽는 것들에 의해 지배당한다. 적잖은 시간 뇌과학, 인문학, 철학, 심리학 관련 책들을 읽었다. 그러다 이것들을 오묘하게 섞어놓은 문학을 만났다.
그 책이 바로 [불안의 서]였다. 페소아의 사유방식은 감성적이지만 이성적이며 낭만적이지만 고전적이며 과학적으로 문학적이다. 페소아는 둘 사이를 오고 가지만 그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줄 안다. 마치 시소 위 가운데에 홀로 서서 양쪽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라고 할까.
나는 누군가의 그럴싸한 말을 들으면 그쪽으로 한없이 끌려가서 거기서 헤어 나오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시소의 한쪽을 걸어가서 다시는 올라갈 수 없게 비대해져 버린다. 그 한쪽이라는 것이 바로 현실이었다. 삶의 모든 시간이 현실의 문제로만 가득 차 있는 상태, 이상이 사라지고 현실만 있는 상태, 이상을 위해 현실에 머문다고 하지만 이상이 닿지 않아 계속 현실에만 머무는 상태. 그것이 힘들고 괴롭다는 것을 알지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에서 잠시 벗어나려 술과 담배 같은 중독으로 잠시 잊으며 강화되는 멘털에 고삐를 풀어주곤 했다. 수시로 멘털의 고삐를 풀어준 결과는 육체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만족’과 ‘감사’라는 여유
나는 당장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의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언제나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상태를 힘들어했다. (물론 이건 사람마다 상대적인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절대적 빈곤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만족과 감사를 느끼긴 매우 어렵다. (물론 가능은 하다, 모두가 다 가난하거나 아니면 홀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도달하거나)
이 불안은 타인이 경제적 부를 쌓아가는 동안 내가 쌓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비교 불안인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을 채찍질하길 바란다. 비교와 경쟁이 발전의 원동력 아니던가. 그게 아니라면 내가 나이가 들어서 노후에 일하지 못하게 되었을 20~30년 뒤를 지금으로 가져와서 불안해하기 때문이리라. 이건 마치 글을 다 쓰지도 않았는데 ‘미리 보기’를 하는 것과 같다. 미리 볼 수 없기에 더 불안한가 보다.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늙어도 생명 연장의 의학기술 발전으로 인해 죽지 못해 써야 할 돈을 지금 벌어놔야 한다. 손발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 누워서 숨만 쉬어도 돈은 나간다. 생명을 가진 질량덩어리는 언제나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것이 생명을 얻은 대가이다. 생명이 끊어지면 비로소 그 대가를 치를 의무가 종료된다.
그러고 보면 생명 연장의 꿈은 지금 우리가 더 많은 돈을 벌어놔야 할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꿈인가 아님 악몽인가? 누구를 위한 꿈인 것인가? 당장 1년 뒤도 알 수 없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20~30년 뒤의 노후를 걱정하며 지금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다.
문학적으로 산다는 것...
“음악은 마음을 달래준다. 시각예술은 활기를 준다. 활동적 예술(춤이나 연극)은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문학은 삶으로부터 멀어짐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문학은 예술이지만 삶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으로부터 즉각적인 즐거움을 느끼고자 하는 동물이다. 그 점에서 청각 예술인 음악과 시각 예술인 만들기(그림, 조각) 그리고 활동 예술인 춤과 무용은 삶에 아주 가까이에 있다. 단순한 예를 하나 들면 농사를 지을 때 농요를 부르고 농사를 효율을 위해 농기구를 만들고 춤을 추듯 리듬과 장단에 맞춰 일을 한다. 그리고 풍년이 들면 또다시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며 즐긴다. 하지만 이 모든 일상의 삶 속에 글을 읽고 쓰는 예술은 없다. 글은 일상의 예술이 아니라 배움의 예술이다. 그래서 문학은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문학을 하는 자들이 삶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문학은 삶을 잠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머지 모든 예술은 삶의 편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문학은 꿈꾼다. 페소아는 외롭지 않기 위해 이명의 친구들을 만들고 최고(등단과 베스트셀러)가 되기보다는 최초가 되려고 기존의 문학이 아닌 자신만의 글을 쓰며 꾸준히 걸어왔으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 항상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래서 그는 현실도 이상도 아닌 알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을 완성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현실을 고민하는 정치인과 과학자 같기도 하고 때론 이상 세계를 꿈꾸는 어린 아이나 종교 지도자 같기도 하다. 그는 그 모든 사유를 거침없이 글로 옮겼다. 그 글이 마치 잠을 자며 쓴 것처럼 꿈만 같다. 그는 현실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꿈꾸는 잠을 잤다.
어쩌면 문학은 삶과 잠 사이의 꿈을 써내려 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