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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02. 2024

산책과 등산 사이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스물아홉 번째 -

“나의 말없는 산책은 끊임없는 대화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산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나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나는 잠시도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거리에 수많은 간판들과 손안에 울리는 수많은 알림과 메시지들, 그것들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와 대화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소리와 이미지들에 눈과 귀가 팔려서 내 안에서 두드리는 대화의 문을 열지 못한다. 그럼 나는 그 수많은 유혹들을 떠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들도부터 벗어날 곳을 찾아야 한다.

승학산 정상


한국에 온 이후 계속 폭염이 이어졌다. 찌는듯한 폭염은 내가 여행했던 동남아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 폭염이 추석까지 이어졌다. 태어나서 이렇게 더운 추석은 처음이었다. 6년의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매일 아침 글을 쓰는 나의 모습도 그렇고 시기에 맞지 않은 이 폭염도 그렇고 나도 환경도 모두 바뀌었다. 


“’ 세상에 바뀌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는 ‘진리’란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라는 단어의 정의와 모순된다. 진리는 모순을 품고 있다.”


글짓는 목수 -


추석이 지나고 나니 이제야 폭염이 조금씩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한국에 오면 항상 산에 먼저 올랐던 나였지만 찌는듯한 폭염을 뚫고 오를 자신이 없었다. 이제 오를 때가 되었다.


글을 쓰는 것을 제외하면 나에게 도시의 번잡함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산에 오르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어색하다. 호주에선 집 근처 공원만 가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지만 한국은 환경적 요인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살아가는 환경은 중요하다. 한국에서 사색을 즐긴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산책은 사색의 원천이지만 한국은 주변에 산책을 즐길 곳이 많지 않다.

산에 핀 들꽃들 (승학산)

산책과 등산 사이


산책을 하면 사색이 깊어지고 등산을 하면 신체가 강해진다. 둘 다 좋은 습관이다. 하지만 둘 다 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만약 둘 다 할 수만 있다면 문무를 겸비 (칼럼참조)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도… 내가 꿈꾸던 그런…


“산책은 사색으로 가는 길이고 등산은 무념으로 가는 길이다.”

- 글짓는 목수 –


산을 오르면 생각이 사라진다. 온몸에 열기가 올라오며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진다. 몸이 등산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나의 모든 신경은 몸에 집중한다. 발을 디딜 곳을 계속 주시하며 흐르는 땀과 빨라지는 심장 박동에 집중한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무념무상의 시간이다. 이때는 귀에 이어폰을 끼고 오디오 북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등산은 머리를 비우는 과정이다. 세상의 어지럽고 번잡한 소리와 잡념들로부터 잠시 떠나 모든 것을 잊게 한다. 한국인들에게 아주 필요한 과정이다. 그래서 난 과거 주말마다 그렇게도 산을 찾았던 모양이다. 

시드니의 드넓은 공원 (Castle Hill Heritage Park)

공원을 걸으면 사색에 빠져든다. 걷다 보면 여러 상념들이 떠오르고 그 상념들이 연결되고 융합된다. 그래서 산책과 등산은 둘 다 좋지만 완전히 다르게 좋다. 나는 이전엔 산책을 몰랐다. 한국에서 한국사람들이 하는 산책을 보면 운동인지 산책인지 모르겠다. 마치 '경보' 운동선수를 떠올린다. 그게 아니면 연인이나 가족들이 함께 걸으며 대화하거나 반려견을 운동시키러 나왔거나 그중 하나이다. 홀로 적당한 걸음으로 주변을 사색하며 걷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래서 한국인의 산책은 사색을 가지지 못한다.  


'운동도 아니고 공부도 아니고 그냥 걷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등산이나 다른 스포츠를 통해 단시간에 효율을 올려 근육과 심장 그리고 폐에 적절한 과부하를 주어서 운동을 하면 신체기능이 향상된다. 수험서와 각종 전문 서적을 보며 공부를 하면 지식이 쌓이고 관련 자격취득을 위한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 지식 인증을 통해 자격과 권위를 가진다.   

산책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공부란 모름지기 책상 앞에 앉아서 진득하게 엉덩이의 힘으로 버티는 것이다. 나에게 산책이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의미가 없다. 

호수가 있는 공원 (Bicentennial Park in Sydney)

사색은 연속적인 통찰을, 등산은 일시적인 일탈


한국인이 왜 깊은 사고와 멀리 내다보는 통찰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 아닐까. 환경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은 신속, 정확, 효율에는 특화되어 있지만 창의, 통찰, 몰입과는 거리가 멀다. 금방 달아오르고 식어버리는 (양은) 냄비정신은 한국인의 전매특허 아니던가? (그래서 라면은 잘 끓인다)


한국의 기업들이 왜 IT 소프트웨어 산업에 취약한지는 이와 관련이 있다. 근시안적 사고와 단기적인 성과 위주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한국인이 살아가는 환경적 요인이 큰 역할을 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과 조밀한 인구밀도와 주거환경 속에서 이렇다할 지하자원도 없이 노동력만으로 나라를 일으켜야 했던 지형적, 지정학적 이유 때문이다. 탁 트인 시야로 산책하며 사색할 넓은 공원이 많지 않기에 우린 깊고 넓은 통찰보다는 일상의 번잡함을 잊고 어지러움에서 벗어나고자 산속으로 올라가 잠시 일탈을 꿈꾸는 것이다. 


사색과 산책은 몰입으로


호주에 온 이후 집 근처 공원을 자주 찾았다. 곳곳에 드넓고 풍경 좋은 공원들이 많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산책하며 오디오 북을 듣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걸으면서 듣고 보고 생각한다. 그러다 문득 책 속의 문구들이 다른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럼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것을 메모한다. 그리고 다시 또 걷고 듣고 생각에 생각 속으로 빠져든다. 이런 것이 바로 산책과 사색의 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을 때와는 다르다. 

공원에 핀 들꽃 (Castle Hill)

“밖에서 산책하는 동안 완벽한 문장들을 많이도 떠올렸는데, 집에 오니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는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도 공감한다. 과거 페소아도 그렇게 깊은 상념 속에서 많은 것들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아마 페소아도 지금 태어났으면 그때 떠오른 완벽한 문장들을 간편하고 빠르게 스마트폰에 남기지 않았을까? 물론 종이와 펜을 들고 다니면서 메모를 할 수도 있겠지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연속적인 사유(flow state)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종이와 펜을 꺼내고 글을 쓰기 위해 받침대를 찾아야 하고 너무도 번거롭다. 그러다 보면 떠오른 것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순간의 기적적인 영감과 글감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물론 그것들이 나중에 다시 문득 떠오를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다시 의도적으로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때는 메모가 필요하다. 메모는 그때의 기억을 나중에 의도적으로 상기시킬 마중물이다. 페소아는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영감과 글감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 몇 개쯤 놓친다고 크게 아쉬울 것도 없었으리라.


“나는 산책을 하듯이 잠이 들지만, 나는 깨어 있다. 마치 잠을 잔 것처럼,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나는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산책을 할 땐 신체적 과부하가 없다. 그리고 앉아 있을 때처럼 먹먹함과 지루함도 없다. 이럴 때 생각에 잠기면 내가 걷고 있는 것을 인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건 마치 주변의 사물들이 아웃포커싱되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때 한 가지에 몰입하게 된다. 이건 마치 잠을 자는 듯한 느낌과도 같다. 걸으면서 잔다는 것, 잠은 무의식을 의미하지만, 걷고 있다는 것은 의식을 의미한다. 이건 의식적으로 무의식에 도달하는 방식인 것이다.


등산을 할 때는 산속 평지를 걷더라도 항상 땅과 주변 지형지물을 보면서 안전에 유의하고 걸어야만 하기에 이것이 불가능하다. 산책은 풍경을 즐기다가 사색으로 다시 풍경으로 오고 가면서 연속적인 사유가 가능하다.

적당한 신체 움직임과 천천히 변해가는 풍경은 고정된 사고와 틀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왜 과거 위대한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산책과 사색을 즐겼는지 십분 이해가 된다. 유럽의 고풍스러운 산책로와 넓은 공원들은 그들의 사유를 넓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한국은 가뜩이나 좁은 길에 놓인 수많은 입간판들과 고개들 들라치면 시야를 덮어버리는 건물의 간판들로 인해 생각에 빠져들 수 없다. 또한 밤이면 그것들은 화려한 조명과 네온사인들로 무장하고 더욱 눈을 현혹시킨다. 

"현혹되지 마소" - 영화 [곡성] 중에서 - , 유흥가

그리고 이건 지금 우리 손안(스마트폰)에 까지 들어와 있다. 도망칠 곳이 없다. 그래서 산으로 간다. 이것들로부터 벗어날 곳이 산 밖에 없다. 그래서 과거 난 그렇게 산을 찾았나 보다. 땀이 흐르고 숨이 가파지고 근육에 고통이 느껴지면 스마트폰이고 뭐고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무념무상의 세계로 불가피하게 빠져든다. 의도적으로 그 상황에 나를 가져다 놓는다. 그 상태를 정신이 원한다. 


한국에 온 이후 난 다시 예전처럼 산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드넓은 공원을 산책하며 사색에 빠져들 수 있는 사치는 끝났다. 이젠 다시 유혹과 불안에서 벗어나는 일탈로 돌아왔다.


내가 다시 사색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산책 없이 사색과 몰입은 계속될 수 있을까?


억새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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