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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09. 2024

갖지 않은 것과 원하지 않는 것 사이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서른 번째 -

“나는 내가 갖지 않은 것과 내가 원하지 않는 것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갖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것은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고,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는 것은 성장하는 것이다.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냥 따뜻한 햇살 아래 물 한잔을 마시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성장한다는 것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가지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삶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누가 그런 삶을 살려하겠는가?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것을 깨닫고 행하는 자는 그 안에서 행복하다. 그 삶은 고귀하고 거룩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고귀함과 거룩함을 타인에게서 얻어내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부유함과 유명함을 잘못 착각한 것뿐이다.




[불안의 서]를 완독 했다. 이제 이른 새벽마다 그의 책을 랜덤으로 펼치고 들어오는 문구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지구 반대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끝냈다. 그전엔 시각과 청각만을 이용해서 글을 인풋(Input) 했다면 이젠 책장의 감촉을 느끼며 시각과 촉각을 이용해 문장을 음미한다.


어렵다.


오늘 아침 눈에 들어온 서두의 문장은 좀 더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해가 되지 않더라. 그래서 정리가 될 때까지 생각을 했다. 보통 페소아의 문장을 읽고 나면 생각에 잠기지만 그 생각 속에서 조금씩 윤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그것을 메모한 후 그것을 노트북에 얹힌 손가락을 통해 윤곽을 확정 짓고 그 안에 디테일한 스케치를 완성해 낸다. 마지막으로 물감으로 여러 가지 색깔을 입혀 감성과 기교를 입힌다. 그럼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이 문장은 한참 동안 생각했는데 희미한 윤곽조차도 잘 잡히지가 않더라. 오기가 생겼다. 짐을 싸고 집 밖으로 나왔다. 몰입을 방해하는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카페 문이 열자마자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에 홀로 앉아 잔잔한 뉴에이지 음악을 재생하고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며 되새김질했다. 그러자 조금씩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쓸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삶 속으로 계속 걸어 들어갈수록, 모순적이긴 하지만, 두 가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점점 더 강해진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the way people in literature and art run away from life

첫 번째, 문학과 예술은 삶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고귀하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현실의 삶보다 더 아름답고 즐거우며 이상적이다. 그것은 문학과 예술이 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은 우리를 꿈꾸게 만든다. 이건 우리가 스스로 꿈꾸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문학과 예술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소설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꿈을 꾸기 위해 필요한 매개체이다. 스스로 꿈을 꿀 수 있는 자는 직접 글을 쓰고 예술을 한다. 그들은 스스로 꿈을 꾸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을 보고 꿈을 꾼다. 이것이 문인과 예술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이다. 하지만 세상엔 그것을 보지 않는 자들과 봐도 모르는 자들이 훨씬 더 많다.


스스로 꿈꾸는 자의 현실은 파리하다. 그건 스스로 꿈꾸지 못하는 자들의 현실이 화려한 이유이다. 문인과 예술가는 꿈을 꾸면서 파리한 현실을 견뎌야 하는 자들이다. 운이 좋은 몇몇의 문인과 예술가들은 꿈을 꾸다가 꿈처럼 화려한 현실을 얻어내기도 한다. 제2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나는 궁금하다. 더 이상 파리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예전처럼 꿈꿀 수 있는지… 그건 아마도 그 당사자만 알 것이다. 다만 현재 문인으로 예술가로 화려한 삶을 영위하는 자들은 그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페소아도 꿈꾸는 자가 꿈을 이루고 제2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페소아는 파리한 삶을 견디고 글과 예술을 끊임없이 지속하는 자들만이 고귀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체험하는 자는 삶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고귀하다.


얼마 전 장기간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여행 정보와 팁을 얻기 위해 유행 유튜버들의 영상들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몇몇 유튜버들이 나의 이목을 끌었다. 여행 유튜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지더라. 하나는 관광용 또 하나는 체험용이다. 관광용은 유용하지만 기억에 남지 않는다. 체험용은 그리 유용하지 않지만 기억에 남는다. 왜일까? 전자는 일시적인 쾌락과 편의를 위한 것이고 후자는 편도체를 자극하는 감정을 일으키는 추억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더라.

노마드 션 & 크리스땀

내가 즐겨보는 체험 유튜버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노마드 션'이고 또 하나는 '크리스땀' 이다. 둘 다 지극히 개인적인 여행 체험을 영상으로 담는 유튜버이다. 이건 타인에게도 흥미를 끌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더 큰 의미와 추억을 남긴다. 그래서 지속가능하고 하면 할수록 애착이 가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정보전달과 상품과 서비스의 소개 목적의 영상 제작이 아닌 자신의 체험을 공유하는 목적이었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오로지 여행의 관광과 유흥, 오락을 위한 꿀팁 소개 채널이라면 이건 그냥 그 자신도 오로지 생계 혹은 부업을 위한 자영업의 일환일 뿐이다. 이런 정보성 영상은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정보는 빠르게 변하고 소멸과 탄생을 반복한다. 하지만 체험적 영상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발할 수 있다. 추억이 시간을 먹고 더 짙어지는 것과 같다.


“고귀한 영혼들은 삶의 모든 것, 모든 장소와 모든 살아 있는 감정들을 포함한 삶 전체를 체험하고 싶어 하는데 이것을 객관적으로 이루기가 불가능하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는 이런 체험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자들을 고귀하다고 봤다. 하지만 이런 체험의 삶은 아주 고달프다. 다행히 위에 소개된 유튜버처럼 여행 체험을 영상으로 찍어서 다수의 인기를 얻은 자들은 나름의 현실의 많은 것들을 충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라면 이건 고행과 같은 여행자의 길이다. 사실 이런 고행 같은 여행이 날 것의 진실을 담고 있다. 카메라에 담긴 영상의 모습은 편집된 것이고 각색된 것일 수 있다. 물론 이건 현실의 체험에 기반하기에 그 편집과 각색의 크기와 영향력이 앞에서 말한 문인과 예술가에 비하면 턱없이 제한적이다.


체험으로 사는 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듣고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 모든 것을 체험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오프라인은 시공간의 제약이 크다. 그래서 이 체험으로 얻는 것은 객관화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주관적인 체험이 다수에게 공유되어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면 그건 객관화로 가는 과정이다. 그들이 갔던 여행길을 따라 하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팔로워는 바로 이런 것 아니던가. 상대가 체험했던 것을 나도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다. 간접 체험이다.


이런 여행의 삶을 일상처럼 사는 자들은 삶에서 멀어진다. 정착을 기본으로 하는 농경, 산업 사회에서 다시 수렵채집의 유목민과 같은 삶으로 돌아간 자들은 현대인의 삶의 법칙을 거르는 자들이다. 일상이란 모름지기 익숙한 패턴과 환경 그리고 관계 속에 머무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더 이상 일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삶에서 멀어진다. 그들이 만약 1만 년 전에 태어났었다면 그 모습은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해졌다. 일상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이 고귀해지는 이유이다.

이제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행복이 더 이상 조건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들이다. 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이건 뉴노멀이 될 수 있다. 그럼 이건 인간의 역사의 회귀인가 아님 복고(復古)인가?

 

The Imaginer and the Traveler

“두 개의 진리는 서로가 서로를 배척한다. 현명한 자는 이 두 가지를 통합하려는 희망을 포기하고, 둘 중 어느 하나를 배척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는 꿈을 꾸는 사람과 체험하는 사람이 꿈을 꾸지도 체험하지도 못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세상에서 고귀해질 수 있는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페소아는 전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후자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일상의 삶과 상상의 꿈을 분리해서 그 사이를 살아갔다. 나와 닮아 있다. 현실의 삶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고 이상의 꿈속에서만 살 수도 없는 그런…


“둘 중 어느 하나를 따라야 하고, 자신이 따르지 않는 진리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그래서 나는 항상 그리움 속에 사는 것이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머물 때 꿈꾸고 싶고 꿈꾸면 현실의 불안이 밀려든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두 가지를 모두 포기하기도 한다.

이건 초월로 나아가는 길이고 인간(人間) 임을 거부하는 길이다. 가장 고귀한 길은 불가능한 길이다. 하지만 그것에 도전하는 인간만이 가장 고귀한 모습으로 다가간다.


내가 갖지 않은 것은 영원히 꿈꾸는 것이고 원하지 않는 것은 현실의 불안이다.

나는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그리고 나는 이 둘을 오고 간다.


페소아가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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