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은 예술의 모든 형태를 포괄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산문(散文)은 산만(散漫)하다. 산만해서 집중하기 쉽지 않다. 그에 비하면 회화나 음악 그리고 시와 같은 다른 방식의 예술은 시인성이 강하고 심플하고 직관적이다. 지나친 시간적 경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예술은 자유로운 생각에서 시작한다. 모든 자유로운 생각은 머릿속에서 추상적인 형태로 저장될 것이다.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구름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 그것을 기억하려면 시간이 지나도 그것을 떠올릴 수 있는 단서, 즉 언어적인 형태로 저장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예술은 산만한 산문의 상태에서 각각의 형태, 즉 미술(회화, 조각등)과 음악(소리), 무용(율동) 그리고 정제된 글(시, 산문)의 형태로 표현된다
free in prose 이 모든 예술 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산문이 가장 자유롭다. 그건 각각의 예술은 그에 걸맞은 형식에 부합하기 위해 자유롭던 생각들이 잘리고 깎이고 다듬어진다. 그래야 해당 예술의 프레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회화는 가지고 있는 도구(연필, 붓등)와 가지고 있는 색채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바탕의 재질 등에 구애를 받고 음악은 제한된 시간 안에 산문의 모든 생각들을 리듬과 장단 속에 압축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율동은 인간의 육체가 가진 한계를 넘어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시 또한 산문의 자유를 운율이라는 틀 속에 가둬 넣어 함축적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자유를 잃는다.
그런 점에서 산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예술은 각자 그만의 제한된 규칙과 방식 속에서 자신만의 주관적인 프레임을 덧씌우는 과정이다.
“나는 시가 음악에서 산문으로 넘어가는 중간적 형태라고 본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는 사실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나 문장이 짧고 너무 간략한 형태를 가지는 시를 읽으면 답답하다.
“메롱~ 어디 한 번 맞춰보시지”
이건 마치 작가가 나를 약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단서도 없이 범인을 잡아야 하는 경찰의 심정이 이럴까? 시는 온전히 감성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알기는 안다. 시를 쓰는 작가는 이성의 영역에 머물던 생각을 은유적이고 함축적으로 감성의 문장 속에 숨겨 넣는다는 것을... 시는 어쩌면 암울한 시대에 자신을 마음껏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던 작가들이 선택한 방식이 아닐까?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같은 시인들은 그 수많은 생각들을 산문으로 마음껏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짧은 운율과 함축적이고 추상적인 글귀 속에 담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산문을 쓸 줄 몰라서 쓰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함축적이고 은유적으로 쓴 글은 일반인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책과 글을 그리고 삶을 어느 정도 살아온 연륜 있는 자들에겐 이런 시가 더 가슴을 울리는 글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세속적인 삶에 찌들어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냥 뜬 구름 잡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시도 회화와 음악 그리고 무용 같이 특정 대상에게만 받아들여지는 예술이 되어버린다. 그 예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만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산문은 다르다.
“산문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음악적인 운율을 적용하면서도 생각을 펼칠 수 있다. 시적 리듬을 글에 도입하면서도 그것의 바깥에서 머물 수 있다. 종종 들어가는 시적 운율은 산문을 방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 들어가는 산문적 운율은 시를 비틀거리게 만든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산문은 그런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있다. 다만 산문은 그런 제약 대신 시간의 제약을 가진다. 왜냐 산문은 시간을 견디고 긴 글을 읽어내려가야만 비로소 이해와 공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장편의 소설과 수필을 시간을 견디고 읽어야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산문은 다른 예술처럼 기본적인 사전 지식이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작가가 늘어놓은 글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해에서 공감으로 연결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성 (Sense and Sensibility) 이성에서 감성으로
이해는 이성의 영역이고 공감은 감성의 영역이다. 산문은 다른 예술이 숨겨버린 이성의 영역을 숨기지 않고 서사한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인물과 배경과 상황과 시점을 설명하고 사건과 사고를 전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내려가야만 한다. 이 과정이 바로 이성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을 견뎌낸 자에게 작가는 이제 감성을 불어넣는 작업을 시작한다. 머리로 이해한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이것을 잘하는 작가가 진정한 문학가라고 볼 수 있다. 산문은 이성의 영역에서 감성의 영역으로 연결시켜 주는 예술이다.
현대인들이 이성과 감성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힘든 건 아마도 긴 호흡의 산문을 견디지 못함이 아닐까? 논리와 합리와 이성은 현대인들이 머무는 현실의 물질 사회가 돌아가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잘 맞춰진 기계의 톱니바퀴도 오래도록 잘 돌아가려면 윤활유가 필요하지 않던가? 서로가 부딪치고 갈려지며 고통받고 상처받지 않으려면 배려(비논리)와 양보(비합리)와 감성(비이성)의 윤활유가 필요하다. 기계도 그러할진대 인간 사회는 어떨까. 사회가 논리와 합리와 이성만으로 돌아간다면 그 사회는 인간이 사는 사회가 아닌 기계들이 움직이는 사회에 가깝다. 차갑고 냉혹하다.
산문 문명? “이상적인 문명세계에서는 산문이 유일한 예술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의 글은 산문이지만 시적인 요소들을 많이 품고 있다. 하지만 페소아의 수수께끼는 산문 속에 많은 단서와 실마리들을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풀어가는 재미가 있다. 이건 경찰이 단서를 하나씩 하나씩 찾아가며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쾌감과도 같다. 그런데 그 전말을 다 파헤치는 순간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그 사연이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딸이 아버지를 죽인 살인사건을 추적하다 그 전말을 알게 되었는데… 어린 모녀가 수십 년간 동물처럼 사육당한 사실들이 드러난 것이다. 그 잔혹하고 안타까운 과거의 흔적들을 눈으로 귀로 확인하는 순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로 피의자(범인)를 정죄하고 형량을 계산하던 뇌가 혼란에 빠진다. 살인이 용서될 순 없지만 우리는 살인의 결과만을 놓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의 시간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살인 도구로 얼마나 많이 찌르고 후려갈겼는가와 같은 자극적인 살인의 현장만 떠올릴 뿐이다. 그 과거의 수년간의 고통과 시련을 이해하고 공감할 시간은 없다.
“내 얘기 좀 끝까지 들어봐 주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됐고, 그냥 빨리 결론만 얘기해 시간 없어!”
과거 회사에 일을 할 때 자주 듣던 말이었다. 회사는 실적만 본다. 전진과 실적 향상만이 살길이다. 그것이 기업의 숙명이다. 그래서 기업에서 일을 하면 실적주의와 결과주의로 바뀔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러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가진 사명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사명에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갈아 넣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밸런스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고착된 사고의 프레임은 삶의 다른 곳에서도 드러날 수밖에 없다.
“아따, 빨리 결론부터 말해보소!”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만난 지인이 말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마치 그와 나의 오랜 공백의 시간을 마치 A4지 한 장의 짧은 결과 보고서로 설명해 달라는 것 같았다. 오랜 친구를 만났는데 또다시 그 옛날 회사의 부장님 앞에 서서 보고하는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그 친구와 퇴근 후 함께 소맥을 마시며 밤이 깊어가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던 친구였다. 그때 우리는 서로 같은 관심사 속에 공감의 폭풍 대화를 이어가던 사이였다. 하지만 그 공감은 너무도 좁고 얕은 프레임에 갇혀있던 공감이었다. 마치 우물 안에 함께 갇혀있는 개구리 두 마리라고나 할까?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고 나는 우물 밖으로 나와버렸고 그는 그 우물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 서로는 공감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더 깊은 우물 속에서 석유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가 타고 멀어져 가는 번쩍이는 최고급 세단이 그것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예술 장르 중에서 시보다는 산문을 더 즐겨 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나도 그러하다. 나는 시를 쓸 줄 모른다. 나는 이성의 사유과정 없이 감성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과거 글들에서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나는 항상 이성과 감성 사이를 오고 간다. 그 시작은 이성이고 마지막은 감성이다. 아마 페소아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시간이 걸린다.
Pessoa who is writing between poetry and prose "소설을 쓰는 작가들을 얼마나 나는 부러워하는가. 그들은 쓰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쓴다, 그리고 완성한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는 장편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을 부러워했다. 그가 썼던 글 중에는 드라마 초고부터 쓰다만 소설들이 많다. 하지만 한 편의 장편도 완성시키지 못했다. 대부분 그의 장편은 미완성으로 끝이 났다. 그래서 그는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서 한 가지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들을 그토록 부러워했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페소아가 장편을 쓸 능력이 없었다기보다는 그가 그 많은 사유의 것들을 최대한 많이 토해내고(표현) 싶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장편의 소설 속에서는 아주 간절한 몇 가지의 진리 혹은 진실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서사해 나가야 한다. 페소아는 그보다는 짧은 산문 속에서 더 많은 진리와 진실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너무 짧지도 그리고 너무 길지도 않은 호흡으로 허구 속에 진실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페소아의 글은 언제나 시와 (긴) 산문 사이에서 머물고 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우리에게 장편의 영감을 던져준다. 내가 쓰는 글 속에는 그가 던져준 영감들이 하나씩 묻어가고 있다. 그의 산문들은 지금의 내가 쓰고 있는 장편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페소아는 시와 산문 사이에서 머물려 언제나 나를 긴 산문의 여행으로 인도한다.
오늘도 그의 짧은 산문이 긴 사유의 시간을 던져주었다.
불안의 서 글짓는 목수(Carpenwriter) 유튜브 계정
https://youtu.be/ADhIPt1WMY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