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도 ep12
"와 새벽부터 사람들이 많네"
택건은 이른 새벽 출근을 위해 집 근처 트레인 역으로 향했다. 택건이 사는 곳은 한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리드컴이었다. 지금은 중국사람과 베트남 사람들이 많아져 한인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역전에는 여전히 한인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식품점이 모여있고 한류 때문인지 한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한인식당과 식품점을 많이 찾았다.
새벽부터 역전은 안전화를 신고 알록달록한 형광색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대부분 건축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개중에는 젊은 한국 여성도 몇몇 눈에 보였다. 워킹 홀리데이로 온 여자들 중에는 간혹 노가다 일을 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호주에서 전문기술 없이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상점이나 음식점 같은 서비스 업종이 대부분인데 급여가 많지 않다. 그래서 간혹 노가다 일을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몸은 고되지만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순수한 육체노동은 언제나 외력의 강도와 위험의 높고 낮음에 따라 그 대가가 결정된다. 한인 여성들이 노가다 일을 하면 대부분 타일 그라우트 쪽이나 페인트 일이 많이 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고 육체적으로도 덜 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같은 자세와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한국에서 젊은 여자가 이런 일을 한다는 걸 생각도 못했을 텐데... 참~ 환경이 사람을 바꾸는구나"
택건이 한국에서 자동차 회사에서 일을 할 때였다. 하청업체의 부품 생산 조립라인에 갈 일 한 번씩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중년의 아주머니들이었다. 간혹 젊은 여성이 한 두 명씩 보이긴 했지만 그들은 고된 반복 노동을 견디지 못했다. 다음번에 다시 그 조립 라인을 찾았을 땐,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힘들고 재미없고 의미 없이 반복되는 노동을 견디지 못했다. 하지만 가정을 가진 어머니라는 또 다른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힘듦 속에서도 자식얘기, 남편 뒷담화, 시댁이야기를 하며 그 속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그때 택건은 어머니와 여성의 다른 점을 체험했다. 어머니는 여성이지만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될 수는 없다. 그건 아마도 여성이 누리고 누렸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포기 없이 가지고 누리려고만 하는 여성은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저기 젊은 여자들은 노가다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건축 쪽 일을 하는 사람들은 새벽 출근 전 이곳에 들러 도시락과 커피를 사고 각자의 일터로 향했다. 그래서 호주에서 한인 음식점과 식품점은 새벽 장사를 무시할 수 없다. 그만큼 많은 한인들이 관련 업종에 종사한다는 말이다.
"김밥 한 줄 얼마예요?"
"5불이요. 뭘로 드릴까요?"
"참치김밥 한 줄 주세요"
인심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하얀 비닐봉지에 젓가락 하나와 김밥을 넣어서 택건에게 건넸다. 택건은 김밥을 손에 들고 포장된 은박지 한쪽을 뜯어낸 뒤 김밥을 하나씩 떼어먹으며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트레인 플랫폼에는 형광색의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즐비하다.
호주는 현장 노동자와 사무노동자의 출근시간이 구분되어 있다. 건설 현장은 보통 7시에 일을 시작하기에 다들 새벽부터 움직이는 반면 사무노동자는 보통 9시에 시작이다. 그렇기에 출근시간의 번잡함을 피할 수 있었다. 출근이 빠르면 퇴근도 빠르다. 그래서 현장직과 사무직은 출퇴근 시간이 크게 겹치지 않는다. 나름 도시 교통 시스템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사회적 조치인 셈이다. 노가다는 어딜 가나 새벽을 먼저 여는 사람들이다.
2층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트레인 안에도 형광색으로 화사하다. 눈이 어지럽다. 트레인 좌석에 않은 노동자들은 전날 쌓인 피로 때문인지 아님 오늘 쌓일 피로를 조금이라 덜어볼 요량인지 잠에 빠져들어 있다.
'오늘은 무슨 일을 시키려고 스트라(Strathfield)까지 오라는 거지'
써니는 스트라필드에 있는 한인 상가에 내부 보수공사 건으로 택건을 그리로 불렀다. 택건은 써니가 일러준 주소지에 도착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직은 이른 아침 번화가 거리이지만 한산하다. 십여분이 지났을까 문이 작업용 픽업트럭을 타고 나타났다. 차에는 써니가 같이 타고 있었다.
"일찍 왔네"
"예 사장님 근데 오늘 무슨 일 하는 겁니까?"
"어 오늘 넌 여기 남아서 다른 일을 좀 해야겠다. 우리는 가던 곳에 하우스 지붕 공사하러 갈 거고, 넌 여기 일 끝나면 바로 퇴근해"
써니는 열쇠 꾸러미를 들고 상가 뒤쪽 문 열쇠를 찾아서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안으로 식당의 주방이 드러났다.
"저기 벽이랑 천장에 빠데(Putty) 칠 해놓은데 보이지?"
"빠데요?"
"아놔, 빠데가 뭔지도 몰라?"
그때 문은 차에서 샌딩 페이퍼(Sending paper: 사포) 한 롤을 들고 와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 팀버 조각에 감았다. 그는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빠데가 되어 있는 부분을 샌딩 페이퍼로 문지른다. 하얀 가루가 날리며 싸라기눈처럼 흘날리며 떨어졌다. 문은 택건에게 샌딩 페이퍼를 건네며 해보라고 한다. 택건은 의자를 밟고 올라가 천장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야! 인마! 한쪽으로만 문지르면 층이 생기잖아 네가 빠데 다시 할래? 아놔 저 꼴통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네, 저거 맡기고 가도 될는지 모르겠네 휴~"
써니가 택건에게 소리치며 말했다. 문은 옆에 다른 의자를 가지고 와서는 다시 한번 시범을 보여준다. 그는 빠데 부위 주변을 둥글게 원을 그리듯 비비면서 문질렀다.
"원래 벽표면하고 빠데한 표면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게 스무스하게 갈아내야 돼 알겠어? 안 그럼 나중에 페인트 칠하고 나면 다 티 난다."
"문! 빨리 가자 늦었다!"
"예 뽀스!"
"자! 여기 열쇠! 오늘 여기 주방에 빠데 칠한 거 샌딩 다 해놓고 퇴근해 알았지? 아마 오전 중이면 다 끝날 거야 끝나면 사진 찍어서 문자 보내고"
"네 알겠습니다"
둘은 작업용 트럭에 오르자마자 금세 사라졌다. 택건은 처음으로 혼자 일을 하게 되었다. 아무런 간섭 없이 혼자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일을 시작해 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깨와 손목이 아파온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하얀 석고가루로 바닥은 하얗게 설국으로 변해 버렸다. 택건은 저기 바닥에 누워서 ‘오켕끼데스까?’를 외치면 ‘러브레터’의 패러디 버전 ‘빠데레터’가 완성될 거 같다는 상상을 하며 혼자 낄낄거렸다. 택건은 떨어지는 빠데 가루들로 점점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콜록콜록! 아놔! 이거 마스크라도 좀 주고 가야는 거 아냐? 안 줄 거면 미리 말이라도 좀 해주던지, 그럼 내가 마스크라도 챙겨 왔을 텐데... 이거 완전 중노동이네 이걸 사람이 손으로 다 갈아야 하는 거야?"
택건은 쉬지도 않고 샌딩(사포질)을 했지만 점심을 한참 넘긴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샌딩 작업이 대충 끝난 듯 보였다. 택건은 더 이상 팔을 들어 올릴 힘이 없었다.
"아... 이 정도면 됐겠지, 꼬르륵, 배고파 죽겠네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택건은 사진을 찍어서 써니에게 문자를 보내고 스트라스필드 주변의 점심을 먹을 식당을 찾았다. 어느새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번화가 역전답게 수많은 인종과 언어가 뒤섞인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어랏! 호주에 돼지국밥이 있네"
멀리 돼지국밥 집 간판이 보였다. 고향이 부산인 택건에게 돼지국밥은 향수 어린 음식이다. 그는 다른 곳은 보지도 않고 국밥 집으로 향했다.
"여기요! 돼지국밥 하나 주세요"
잠시 뒤 여자 종업원이 밑반찬을 가지고 테이블로 왔다. 그녀는 택건을 보더니 환한 미소와 눈웃음을 짓고 돌아갔다.
'뭐지? 저 아가씨 나한테 관심 있나? 왜 저러지?'
그녀는 식당 안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계속 택건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택건은 그런 여자의 관심이 부담스럽지만 싫지는 않았다. 짝 없는 솔로가 이성으로부터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상대의 비주얼이 비호감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녀가 국밥을 가지고 택건의 테이블로 왔다.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택건은 그녀의 관심에 보답하려 이빨을 보이며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웃어 보인다. 그녀는 갑자기 웃음이 터뜨리며 수줍은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재빨리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음… 많이 부끄러운가 보지? 큭큭'
택건은 일단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돼지 국밥과의 재회에 감격스럽다. 얼마만인가. 그런데 국물 색깔이 고향 부산에서 먹던 그것과는 다르다. 뽀얗고 하얗게 우러난 국물을 생각했지만 눈앞에는 붉은색의 마치 육개장을 연상케 하는 국물이었다. 숟가락을 들어 한 입 넣는다.
“아놔~ 이게 뭐야? 그럼 그렇지, 쩝… 내가 여기서 뭘 바라겠어. "
그 맛이 아니다. 이건 오랜 시간 우려내고 또 우려낸 그런 맛이 아니었다. 각종 화학조미료의 조합임이 분명했다. 택건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허기에 뭘 먹어도 맛이 없을 수 없다. 허기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다. 그는 허걱 지겁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였다.
그 여자 종업원은 계속 택건을 응시하고 있었다. 택건은 그녀의 시선에 게걸스럽게 먹던 자신의 모습을 책망하며 속도를 늦췄다.
'아놔! 참 밥 먹으면서도 여자를 신경 써야 하나?'
짝을 찾지 못한 수컷은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를 암컷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벌이 꽃을 보면 내려앉듯이 기회가 왔을 때 다가서야 하는 법이다. 기회를 놓치면 다른 수컷이 암컷을 차지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 아니겠는가.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여 종업원은 미모가 눈부시진 않아도 상냥한 미소로 일관하는 표정이 없던 호감도 만들어 줄 여성 같아 보였다. 택건은 속으로 그녀의 관심을 만남의 기회로 만들어보려 했다.
"저기 얼마죠?"
"네 20불입니다."
"여기요, 근데 혹시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예?!"
"실례인 줄 알지만, 아까부터 자주 눈이 마주치는 거 같아서요"
"읍.. 아앗... 죄송해요, 사실 그게 아니고…"
"네? 뭐가요?"
그녀는 택건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두드리며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손님한테 해야 할 행동이 아님을 알아서인지 다른 한 손으론 입을 가린 채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택건은 화장실로 향했다.
“헉!”
거울에 비친 택건의 얼굴은 마치 시체, 아니 경극 배우의 얼굴처럼 하얗다. 하얀 얼굴 위에 붉은 점 같은 것들이 곳곳에 묻어있고 입가 또한 붉게 물들어 있다. 하얀 빠데 가루 위에 튄 빨간 국물이 얼굴에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 작품을 만들었다. 마치 조커를 떠올리는 얼굴이다. 이제야 그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택건은 세수를 하고 하얀 빠데 화장을 지워냈다. 그제야 한국에서 먹던 그 뽀얀 돼지 국밥의 국물이 세면대 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세수를 끝낸 뒤, 택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 안을 달리듯이 가로질러 빠져나왔다. 그녀를 보지 않았지만 머릿속에는 손가락질하며 비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저기요~ 잠시만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들은 체 만 체 뒤도 보지 않고 뛰었다.
“야! 인마~ 계산하고 가야지!”
“헉!”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제야 돈을 지불하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20불이요”
“죄송합니다. 여기요”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그녀에게 20불짜리 지폐를 건넸다. 그녀의 하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손은 빨간 국물을 떠올리는 20불짜리 지폐를 낚아채듯 가지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택건은 한숨을 쉬며 하늘은 올려다봤다. 하늘이 너무도 맑고 눈부시다.
이런 땐 비가 내려야 하는데 택건의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하늘이 야속하기만 했다.
*빠데 : 영어로는 Putty라고 하며 표면에 생긴 흠집을 메울 때 쓰는 아교풀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