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도 ep13
[택건! 비가 와서 오늘은 일 안 되겠다. 쉬자]
*데마찌다. 아침부터 비가 요란스럽게 내린다. 택건은 창문을 열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내리는 비가 고맙게 느껴진다. 온몸이 근육통으로 힘들 때 단비가 내려 휴식을 선사한다. 외장 목수일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휴일을 가져다준다. 누군가에겐 일당이 날아간 허망한 하루이지만 누군가에겐 고마운 휴식의 하루이다. 택건은 써니에게 확인 메시지를 보낸다. 창문을 열어둔 채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떨어지는 빗소리를 감상한다. 뒤뜰 잔디밭에서 풀 냄새가 올라온다. 빗소리가 마치 자장가가 되어 다시 달콤한 잠 속으로 다시 빠져든다.
"띠링띠링"
문자메시지의 알림 소리에 잠이 깼다. 택건은 머리맡에 핸드폰을 집어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택건 씨, 잘 지내죠? 저 윤아예요. 호주 오고 아직 한번 보지도 못했네요. 한국에서 올 때 가져온 아이 옷이랑 장난감 가인 씨 통해서 잘 받았어요. 참 연락처도 가인 씨한테 물어봐서 이제야 알았네요. 한 번 같이 봐야 할 텐데 수호 씨가 없어서... 그 이가 사고 이후로 몸도 그렇고 마음도 다잡지 못하고 그러네요. 택건 씨가 좀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혹시 수호 씨 연락되면 좀 알려주실래요? 미안해요 이런 모습 보여드려서…]
"아놔! 이 자쉭! 또 집 나간 거야? 휴~ "
평온한 마음은 문자 한 통으로 깨져버렸다. 택건은 수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했던 대로 핸드폰이 꺼져있었다. 택건은 다시 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인아 너 어디야?"
"예, 형님 오늘 심리 치료받으러 왔어요"
"심리치료?"
"네”
“너 정신병 있냐?”
“하하하, 아뇨 호주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오는 정신적 충격이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의무적으로 받게 하더라고요"
"그래? 그렇구나. 참 좋은 나라네. 국민들 정신적 피해도 걱정해 주고 하하, 참! 수호 연락되냐?"
"아뇨! 또 잠수 타신 거 같은데... 수호 형님도 심리치료받으러 와야 하는데... 몇 주째 안 나타나시네요, 심리 상담사가 저한테 하소연을 하네요. 수호 형 좀 데려오라고 하하하"
“이 녀석은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아놔, 뭐가 이렇게 꼬이는 거지 정말 휴”
이곳에 오기 전에 택건이 계획하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틀어졌다. 이 모든 어긋남의 시작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늘 사표 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나 아마 차랑 전셋집이랑 다 정리하고 다음 달쯤 호주 갈 수 있을 거 같다]
[그래 내가 지낼 곳이랑 일자리랑 필요한 건 다 준비해 놓고 있을게, 걱정하지 마라]
[고맙다 친구야, 역시 너밖에 없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나 만 믿고 와, 여기서 거하게 한 잔 해야지]
택건은 10년 넘도록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이건 직장을 떠나는 것을 넘어 기존의 직장인의 삶의 방식에서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번엔 이직이 아닌 이민이었다. 이직으로는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 길들여진 직장인에서 벗어난다는 두려움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가 더 컸기 때문이다. 그 기대를 끊임없이 주입해 준 것이 바로 수호였다. 해마다 연말이면 한국에 찾아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택건 또한 그런 삶을 맹목적으로 동경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심이 커질수록 현재의 삶에 대한 회의감은 커져만 갔다. 인간은 도래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며 현실에서 멀어진다. 기대감이 충만해질 대로 충만해지니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월급이라는 마약의 약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오랜 세월 울타리 안에서 길들여진 양은 홀로 우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양은 목자(牧者)와 목양견의 인도를 받아 울타리 밖 세상으로 나아가는 법이다. 택건에게는 수호가 바로 목자였던 것이다. 택건에게 수호가 없었다면 이런 큰 결정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호가 있었기에 불혹을 코앞에 둔 나이에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수호와 가인은 그들이 몸담고 있던 건축회사에서 진행하는 대규모 프로젝트 공사 때문에 브리즈번 근처의 작은 소도시에서 막바지 공사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시드니와 10시간이나 떨어진 지역이라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2주에 한 번꼴로 집이 있는 시드니로 돌아오곤 했다.
"형님 빨리 가입시더"
"야! 오늘 일도 늦게 마쳤는데 낼 아침 일찍 내려가자"
"안 됩미더 오늘 가야 합니다"
"아놔! 그 가시네가 그렇게 보고 싶냐? 큭큭큭"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하하하"
가인은 들킨 속마음이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 대며 부인하지만 수호는 그런 그를 이해는 하지만 더 이상 공감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기혼자가 미혼자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 사랑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미혼자는 기혼자가 보기에 어린애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다. 사실 따지고 보니 사랑할 땐 자신도 어린아이 같았던 것 같다.
"연애할 때에나 그렇게 보고 싶지, 결혼해 봐라 자주 안 보는 게 서로를 위하는 길이다 큭큭"
"결혼을 아직 안 해봐서 그것까진 잘 모르겠네요 하하하"
"그럼 내가 운전할게, 해가 지면 캥거루도 나오고 위험하다."
"됐심미더. 제가 알아서 조심해서 할게요"
"음… 불안한데… 너 진짜 운전 천천히 해야 된다. 알겠제?"
"알겠심다, 빨리 가시죠"
가인은 시드니로 돌아가 여자친구를 만날 생각에 현장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수호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이다. 수호는 찝찝한 기분으로 옆좌석에 앉았다. 가인은 고속도로에 차를 올리고 속도를 올렸다. 수호는 평소 가인의 거친 운전 습관 때문에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조수석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갔겠지만 그날 낮에 지프록(석고) 보드 작업자들이 부족해 하루 종이 무거운 파이어첵(Firecheck, 방화용 석고보드)을 하루종일 나르는 통에 너무 피곤했던 모양이다.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 가인은 여자친구를 볼 생각에 가속 페달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안돼~~~ 키이이익~~~ 쾅! 우르르르"
"으아아아악!"
수호가 엄청난 충격에 눈을 떴을 땐 눈앞에 유리조각들이 떠다니고 있었고 바깥세상이 빙빙 돌고 있었다. 자신은 정지된 상태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상이 몇 번을 돌았을까? 정신이 혼미해졌다.
"헉.. 혀... 형니이이임.. 저어 엉신 차리.."
가인이 끊어질 듯한 얕은 숨을 내뱉으며 힘겹게 실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피로 범벅된 수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호는 호흡이 멈춘 듯 가슴팍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가인은 간신히 숨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들이마시는 공기가 어딘가로 새어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목덜미 깊숙이 무언가가 들어와 있음을 느꼈다. 피로 물든 검붉은 안전벨트가 목을 반쯤 파고들어 가 박혀있었다. 그 틈으로 몸속의 붉은 액체와 함께 들이쉬는 공기가 새어나가고 있었다. 그도 정신이 조금씩 혼미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짙게 드리웠다.
“여… 기가? 어… 디… 지?”
“Are you alright?” (괜찮아요?)
가인이 정신을 차렸을 땐 그는 병실에 누워있었다. 이틀간을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온몸 곳곳이 붕대로 감겨있다. 목은 움직일 수 없게 딱딱한 보호대로 감싸져 있다. 간호사가 그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고 의사를 불러왔다.
"How do you feel? Can you remember what happened? if you say yes, just blink your eyes" (기분이 어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요? 예스면 눈을 깜빡여봐요)
“Doctor! Look! He just blinked his eyes, he might remember what happened.”( 의사 선생님, 보세요 그가 눈을 깜빡였어요.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나 봐요)
가인은 눈을 깜빡였지만 그건 사실 의사가 말을 하며 얼굴로 튄 침방울 때문이었지 그의 말을 알아듣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물론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기억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머리가 어지러워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가인이 눈알을 돌려 주변을 훑어봤다. 가인의 맞은편 병상에는 수호가 의식 없이 인공호흡기를 낀 채 누워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아주 심각해 보였다.
"가인아! 괜찮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송이 아빠는요? 어딨 어요?"
그때였다. 윤아와 그들이 다니고 있던 교회의 안 목사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멀리 브리즈번까지 날아왔다. 윤아의 다급한 물음에 소리 내어 답을 하기 힘든 가인은 옆으로 눈알을 돌렸다. 윤아는 가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간다. 그리고 몸의 절반 이상이 붕대로 감겨 의식 없이 병상에 누워있는 수호의 모습을 확인했다. 할 말 잃은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가리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왜? 도대체 왜… 이러고 있어요? 흑흑”
윤아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겨우 이제 세 식구가 다시 모여 남들처럼 한 가족이 한 지붕 밑에 사는 삶을 사는가 싶었는데 또다시 함께 할 수 없다는 예감에 소름 돋는 슬픔이 밀려들었다. 윤아는 이 상황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다들 너희가 죽은 줄 알았다고 하더라. 다행히 그 밤 길에 뒤에서 따라오던 차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바로 신고를 해서 구조되지 않았으면 아마 거기서 목숨을 잃었을 거라고 그러더라"
안목사는 여기에 오기 전 전화상으로 들었던 사고내용을 얘기했다. 사고의 원인은 과속이었다. 수호가 잠든 사이 가인은 빨리 시드니로 돌아가서 여자 친구를 보고픈 마음에 엑셀레이터를 끝까지 밟고 160km가 넘는 속도로 내달렸다.
그때 하필 고속도로 위에서 육덕진 두 마리의 캥거루 커플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캥거루의 모습이 헤드라이트에 불빛에 드러났을 때는 이미 늦었다. 가인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어떻게든 충돌을 피해보려 핸들을 꺾었다. 하지만 속도를 제어하지 못한 자동차는 관성의 법칙에 따라 회전했다. 추진력은 회전력으로 전환되었을 뿐이었다. 그 속도만큼 빠르게 회전했다. 차체가 마치 팽이처럼 돌았고 결국 차는 도로 밖으로 튕겨나갔다. 어둠이 짙게 깔린 들판 위에서 몇 바퀴나 더 구르고 나서야 운동에너지를 모두 소진했다.
그동안 그 운동에너지는 충격에 의한 열과 소리와 변형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차 안 묶인 둘은 꼼짝없이 그 엄청난 충격을 온몸으로 버텨내야 했다. 그 에너지가 차를 크게 변형시켜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둘의 몸에도 적잖은 변형 가져다주었다. 물리적으로 보면 변형이지만 인간은 생물학적인 존재이니 손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둘 중 수호의 손상 정도가 더 심했다. 그들이 탔던 차는 연식이 오래된 캠리(Camry)였는데 하필 운전석에만 에어백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에어백이 터지지 않은 조수석에 탔던 수호에게 가해지는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비롯해 온몸 곳곳이 붕대로 감겨있었다. 붕대에 피가 스며들어 그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여보~ 나랑 송이는 어쩌라고... 흑흑”
윤아는 넋을 놓고 병상 위의 수호의 모습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병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안 목사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미… 미.. 안 해요 형… 수님"
그때 가인이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그 사고는 둘 뿐만 아니라 택건을 비롯한 다른 모든 이들에게 다가올 인생의 변곡점이 될 거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