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도 ep14
"택건씨 뭐 어디 좋은 데 가는 거야?"
"아뇨, 그냥 뭐 새로운 일을 좀 해보려고요"
"오!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거야? 대단한데 언제 또 우리 몰래 은퇴 준비는 한 거야?"
"와! 부러운데 이제 월급쟁이 생활 벗어나는 거야?"
"무슨 일인데... 좀 우리한테도 좀 알려주면 안 돼?"
“역시 처자식 없는 자유로운 싱글 영혼, 부럽구먼”
"택건씨, 나가서 성공하면 연락해야 돼 알겠지?"
택건은 이미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회사 동료들과도 마지막 송별회 회식자리였다. 이제 한창 회사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할 나이였다. 회사를 떠나 새로운 일을 한다는 택건의 말에 회사 동료들은 그 궁금함을 감추지 못한다. 평소 친하지도 않던 타 부서 동료들도 택건의 퇴사 소식에 관심을 보였다. 그 새로운 일이라는 게 다들 궁금한 모양이었다.
다들 회사생활에 치여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샐러리맨들도 항상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은 품고 있다. 다만 월급이라는 족쇄에 묶여 그 동경을 마음속에만 품고만 있을 뿐이다. 혹여 주변의 지인이나 동료들이 자신과 다른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든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 이목이 집중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신이 마음속으로만 가지고 있던 계획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실현되는지 확인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도 대리만족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정확히는 대리 시뮬레이션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시뮬레이션은 실질적인 시간과 비용 손실을 없이 그 결괏값을 예측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 시뮬레이션이란 없다.
모두가 새로운 미개척지에서 자신과 가족을 생계를 담보로 모험을 할 용기를 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 다른 누군가가 개척하고 확인된 길을 안전하게 따라간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도 이리저리 길 밖에 다른 길을 두리번거리면 안테나를 곧추 세운다. 중년의 직장인들은 언제까지 회사에서 자신을 받아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동료들과 지인들의 새로운 도전이 실패와 좌절로 끝나는 소식에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거봐 ~ 안된다니까, 그래 월급 받아먹고살 수 있을 때가 좋은 거야’
결국 어떻게든 직장에서 더 오래 버티려 자신을 갈아 넣는다. 그러면서 그건 가족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야?”
사표는 수리되었다. 그런데 수호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수호와의 연락이 끊긴 지 일주일이 넘어간다. 기대가 불안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건 모든 택건의 의지와 통제 밖의 일이다. 한국에서의 일상이 하나둘씩 정리되고 가고 있는 상황에서 믿고 있던 친구와의 연락두절로 인해 택건은 전에 없던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들고 있었다. 매일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미 호주에 있는 유학원을 통해 현지 학교 입학 수속까지 다 완료된 상태였다. 비행기표도 싸게 구입하려 한 달 전에 예약을 완료한 상태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낙장 불입이다. 선택에 책임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택건이 호주를 가겠다고 결정한 건 한국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감과 주변에서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 수많은 시선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은 다른 모든 직장인들도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택건 또한 그건 매달 받는 월급에 대한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십여 년간 쌓여온 내공으로 버티려면 더 버틸 수도 있는 그런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택건이 퇴사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건 생각하던 현실적인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 이기도 했다. 그 결정은 수호가 연말 한국으로 휴가를 왔을 때 마음속에 굳혀졌다.
"야! 씨발! 월급도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렇게까지 하며 회사를 다니냐? 난 참 이해가 안 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적지 않은 연봉이야. 다른 데 가서는 이 정도도 받기 어려워"
"너처럼 그렇게 눈치 보고 밤낮없이 일해서 그렇게 받을 거면 안 하고 안 받는다. 난 안 그래도 호주에서 월 천은 번다."
"진짜?"
"회사 떼려 치고 호주 와라, 당장 나 정도 기술자 웨이지는 힘들어도 최소 월 오육백은 벌게 해 줄 수 있다. 그리고 2~3년 열심히만 하면 너도 기술자 돼서 월천도 가능해. 나야 뭐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했으니까 오래 걸렸지만 넌 내가 있잖아. 내가 하라는 데로만 잘하면 기술도 금방 익히고 할 거야. 그리고 내가 지금 포맨(Foreman : 현장 감독)이라 너 정도는 꽂아 넣어줄 힘은 있어. 넌 중국어도 하니까 들어오는데 별 문제없을 거야 영어야 조금씩 익히면 되니까. 어차피 현장에 중국애들이 많아서 영어 잘 못해도 별 문제없을 거야"
사실 수호의 호주행 권유는 이번만이 아니었다. 택건이 처음으로 회사에 입사해 어리바리되던 20대의 끝자락에서 첫 번째 유혹이 있었다. 당시 중소기업에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직을 꿈꾸고 있던 시기였다. 주말 평일 가리지 않고 스펙을 쌓으며 이직을 꿈꾸던 그때 수호는 호주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다. 가끔씩 그와 연락할 때마다 호주 와서 같이 일해보자는 권유를 하곤 했다. 둘은 대학교 때부터 궁합이 잘 맞았기에 그도 택건과 일을 하면 시너지 효과도 생기고 서로 의지하며 도움이 많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20대의 마지막 해 택건은 대기업으로 이직에 성공했고 둘의 재회는 성사되지 못했다.
"정말이야? 정말 그 정도나 벌 수 있어?"
택건이 생각해 봤을 때 월 오육백만 원이면 현재 회사에서 받는 것보다도 많은 금액이다. 크게 차이가 나진 않더라도 일단 야근이 없으니 시간당으로 따져 봤을 때는 훨씬 많이 버는 것이다. 상사와 고객들 눈치와 주변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지긋지긋한 미세먼지로부터도 탈출할 수도 있다. 더 늦췄다가는 이제는 영영 갈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 같은 것이 밀려왔다.
"뭐 당장 결정할 순 없겠지만 잘 생각해 봐, 뭐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걸 시작하는 게 쉽진 않겠지, 하지만 막상 가보면 별거 아냐, 인간은 다 적응하게 돼있어. 나도 뭐 처음엔 안 그랬겠냐? 거기도 다 사람 사는 데고 심지어 시드니는 영어 못해도 사는데 지장 없을 정도야"
"수호야, 그런데 넌 거기서 계속 살 거야?"
"그래야지 사실 이번에 한국 들어온 것도 와이프 하고 애랑 데리고 같이 호주 들어가려고"
사실 수호와 윤아는 결혼 이후 오랜 시간을 떨어져 생활했다. 그들은 연애부터가 장거리로 시작되었다. 아마 둘은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는 반비례할 수 있을 거라는 드라마틱한 사랑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수호 씨 맞죠? 내일 시간 좀 있어요?"
“누구세요?”
“윤아예요”
나이트클럽에서 첫 만남 이후 윤아는 자신에게 애걸복걸하며 들이대던 성일이 아닌 수호에게 관심을 보였다. 윤아는 대담하게도 수호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윤아는 성일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주는 조건으로 그에게서 수호의 연락처를 받아내었다. 성일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지만 윤아의 연락처를 따는 것이 급선무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number you dialed is not in service]
하지만 윤아가 아닌 다른 여성의 목소리 들렸다. 하지만 윤아는 수호와 통화할 수 있었다.
윤아는 자신이 관심이 가지 않으면 아무리 자신을 좋아하고 관심을 가져주는 남자라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여자였다. 윤아의 남자에 대한 관심은 관심이라기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그녀는 호감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남자에게 더 끌렸다. 수호는 그런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택건이 그랬던 것처럼.
“윤아씨가 웬일이에요?”
“웬일은요”
“그쪽한테 볼일이 좀 있어서죠”
“무슨 볼일이…”
“건 뭐 만나서 얘기할까요?”
“만나서요?”
“싫어요?”
“언제요?”
“지금요”
“지금요?!”
“싫어요?”
“아… 니 싫다기보다 갑작스러워서 그렇죠”
“뭐 다른 할 일 있어요?”
“아니 뭐…”
“그럼 이따 6시에 서면에서 봐요”
“네?!”
“술 한잔 할까 하니까 차는 가지고 나오지 마시고요 그럼 이따 봬요”
수호는 전날 먹은 술에 잠도 덜 깬 상태에서 받은 전화가 혹여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볼을 꼬집어 본다.
“아얏!”
꿈이 아니다. 사실 수호도 나이트에서 만난 윤아에게서 강한 끌림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보다 형인 성일의 구애 전선에서 경쟁자가 될 수는 없었다. 호주에서 계속 그와 사업 파트너로서 같이 지내려면 여자관계가 엮여서는 안 된다는 상식쯤은 그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호는 여자라면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꼬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다만 아쉬운 건 윤아는 여태껏 본 여자와는 다르게 호감뿐만 아니라 강한 호기심까지 불러일으키는 신비한 매력을 풍기는 여자였다.
“뭐 호주 돌아가기 전에 할 일도 없는데 성일형 몰래 한 번쯤 만나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큭큭큭”
윤아는 눈에 띄는 외모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황금비율의 몸매까지 남자를 떠나 수컷이라면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 여성이었다. 거기에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당찬 성격은 남자에게 강한 소유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외모와 애교로 호감을 사는 흔하디 흔한 여자들은 언제나 흔해 빠진 방법으로 남자를 유혹한다. 그런 여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들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비호감으로 변해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윤아는 달랐다. 양파처럼 까도 까도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벌컥벌컥벌컥”
윤아는 선술집의 투명한 창가 자리에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수호는 20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그런데 오자마자 인사나 미안하다는 말도 않고 자리에 앉자마자 물컵에 물을 가득 따르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니 서면 골목이 한둘도 아니고 이런 구석진 곳에 있는데 어떻게 찾아요? 정말 한참을 찾아헤멧네, 설명을 제대로 해주셨어야지. 제가 여기 사는 사람도 아니고 이곳 지리도 잘 모르는데"
"아... 네…죄송해요"
“죄송할 거까진 없지만, 뭐 죄송하다면 술은 그쪽이 사요”
“아… 하하 그럴게요”
윤아는 자신 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보통의 남자들은 그녀 앞에서 항상 예의와 격식을 갖춘 저자세로 자신을 높여주었다.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올라가는 편안한 엘리베이터에 익숙해져 있다가 계단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런데 윤아는 아이처럼 투정 부리듯 짜증을 내는 수호의 모습에 전에 없던 모성본능 같은 감정이 샘솟았다. 수호에게 관심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수호 씨 소주 드시죠?"
"아뇨! 전 소주 못 마셔요. 아니 안 마셔요.”
“남자가 술도 한 잔 못해요?”
“음… 이건 뭐죠?”
수호는 윤아에 물음에 답은 않고 메뉴판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손가락을 짚어서 종업원에게 보여줬다.
“그건 과일소주입니다”
“윤아씨 이건 마실 만한가요?”
“뭐 그건 사와 같은 과일소주인데… 달달해서 전 싫어해요 술 같지도 않고요”
“전 그럼 이거 마실게요. 저기요 순하리 유자맛으로 주세요"
"예?! 유자맛이요?"
"예, 그렇게 쓴 소주를 뭐 하려고 마시는 거예요?"
"예?!"
윤아는 또 한 번 당황한 모습으로 수호를 쳐다봤다. 예측 불가능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보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그녀의 예상 시나리오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수호는 시작부터 시나리오를 다 뜯어고쳐야 할 판국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시나리오 없이 펼쳐지는 버라이어티 한 상황이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창 밖 멀리서 음소거가 된 채 선술집 안의 둘의 모습은 본다면 마치 드라마 속 훈남훈녀의 전형적인 로맨스 스토리가 연상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안의 실제 상황을 드려다 보면 보이는 것과는 다른 반전이 숨어있다.
그래서 남녀 사이는 겉만 보고 알 수 없다.
쇼윈도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지만 진실까지도 투명해져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