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추웠다. 겨울에서 이젠 봄으로 들어가고 싶다."
- 한 강 -
그녀가 9년에 걸친 시간 쓴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하고 난 후 기자 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그녀의 표정은 겨울을 연상케 한다. 그녀가 쓴 이야기들은 춥고 어두운 인간의 그림자를 말한다. 그녀가 오랜 시간 써왔던 이야기 속에서 그녀 또한 그 이야기 속 인물들과 함께 그 차가운 시공간을 함께 했을 것이다. 그것이 현실 세계의 자신의 모습에도 드러나 보이는 듯하다.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드려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재능이지만 또한 그 능력을 가진 대가로 그 어둠을 오랜 시간 관조하며 머물러야 하는 소명을 견뎌야 한다. 그 시간은 현실에서 느끼는 어둠과 추위만큼이나 두렵고 차갑다. 그건 상상을 현실처럼 느낄 수 있는 재능을 가진 탓이다.
그 상상의 축적은 현실의 표정에도 투영된다.
Han Kang
“글을 쓸 때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한다. 걷지도 먹지도 못한다. 글쓰기 외의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고 한 단어씩 써간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 한강 –
나는 매일 이른 아침 집 근처의 카페에 가장 먼저 입장한다. 전날 밤 가지런히 정리된 테이블과 깔끔하게 청소된 매장 안은 마치 태초의 시작과도 같다. 그럼 나는 아담이 된다. 나는 정돈된 테이블 중 하나를 내가 항상 앉는 자리 가까이로 움직인다. 질서 정연하던 매장에 최초의 무질서가 시작된다. 이건 엔트로피의 증가이다. 그리고 나는 노트북을 펼치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순백의 화면에 더러움을 하나씩 찍어내려간다. 이것 또한 어지러움으로 향해가는 것이다. 사물도 이야기도 모두 정돈(가지런함)과 순수(깨끗함)에서 혼돈(어지러움)과 불결(더러움)로 나아간다.
정돈된 테이블 하지만 매장의 영업이 끝나면 모든 테이블과 자리는 다시 정돈된다. 나의 이야기도 한 가지의 에피소드가 끝이 나면 내일은 또 다른 백지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정돈에서 혼돈으로 순수에서 불결로 변해가지만 다시 그것들을 정돈과 순수로 되돌리며 어제와 다른 새로운 어지러움과 더러움을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어지러움과 더러움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어지러움 속에 어지러움과 더러움 속에 더러움은 무엇이 어지러움이고 더러움인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우리는 어지러움과 더러움 속에 갇혀 그것이 어지러움인지 더러움인지 모르고 살아간다. 나는 매일 아침 새로운 백지에 더러움을 남기면서 새로운 어지러움을 경험한다.
서두의 한강의 말처럼 그 어지러움과 더러움 속에 머물 때엔 움직이지도 걷지도 먹지도 못한다. 이건 내가 현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분명 나의 신체에서 만들어지는 에너지를 끌어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건. 한 편의 글이 몰아치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 때론 숨 쉬는 것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보이지 않는 다른 곳에서 활동을 하며 현실의 육체에서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편의 글이 뼈대를 완성하고 나면 온몸에 진이 빠지지만 환희를 느낀다. 그리고 소진된 에너지 때문인지 글을 쓰고 나면 밥맛이 좋다. 이건 운동을 하고 난 후 음식을 먹을 때의 느낌과 가장 흡사하다.
그래서 난 한강의 저 말의 의미를 공감할 수 있다.
The Book of Disquiet 아침부터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으로 떠들썩하다.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언제나 그랬듯이 제일 먼저 책상 앞에 앉아 스탠드 등을 켜고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랜덤으로 펼치고 눈앞에 보이는 문장을 묵독했다. 그리고 그 문장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 하나를 핸드폰 갤러리에 있는 사진 중에 가장 그럴싸한 것과 함께 섞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나의 인스타 스토리에 올리고 난 후, 최근에 가입한 독서토론 커뮤니티에 공유하려고 할 때였다. 그때 누군가가 올린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접했다.
첫 번째, 한강의 기적
이건 두 번째 한강의 기적이다. 첫 번째의 한강의 기적으로 한국의 물질문명이 업그레이드되었고 두 번째 한강의 기적은 한국의 정신문명의 업그레이드를 예고하는 듯했다. 어찌 그리 이름도 절묘하게 지었을까? 그녀는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남겼다.
한국은 전쟁으로 패허가 된 나라를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복구와 발전을 이룩했다. 우리는 그것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그 기적은 우리를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물질적 풍요의 변화를 가장 급격하게 겪은 민족이다. 문제는 그 물질적 풍요에 취해 정신이 타락함을 알지 못했다. 그런 겉으로 보이는 물질에 현혹된 시간은 한국을 물질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 권위주의로 물들게 만들었다. 그 과정 속에 많은 것들 것 희생되었다. 그것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희생된 결과가 사회 곳곳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건 과거 이룩한 ‘한강의 기적’처럼 주도적이고 계획적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무시당한 인간의 본성과 감성이 초래한 결과였다. 이건 치유되고 회복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몸에 난 상처는 소독하고 약을 바르면 낫지만 마음에 생긴 병은 약이 없다.
햔강의 기적 인간(人間),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물질이 오고 가며 사회가 돌아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도 함께 오고 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우리는 물질에 현혹되어 감정을 무시하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정신이 물질에 종속된 것이다. 이건 결국 인간도 물질로 여기게 된다. 물질을 얻기 위한 수단이 인간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삶에 관심이 없다. 그저 그들이 나의 삶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만 생각할 뿐이다. 전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우린 이런 삶이 정답이라 생각하고 살아왔고 그것을 ‘한강의 기적’이라 불렀다.
두 번째, 한강의 기적
최근 몇 년 사이 코로나19와 저성장 침체의 시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물질문명의 고속화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연일 뉴스와 언론에선 이런 경제 침체를 우려하는 말들로 일색이었다. 가속도에 취해 속도가 느려짐을 견디지 못하는 건, 주변의 부추김과 불안을 조성하는 여론 때문이다. 그래서 연료가 떨어진 차를 채찍질한다.
사람들은 지쳤다. 숨 가쁘게 살아온 현대화의 반세기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염병이 퍼지고 산업이 멈춘 시기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나 또한 코로나19를 거치던 시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사유하고 글을 썼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시간을 버티는 건 두 가지이다.
중독 아니면 몰입이다. 그 시간 어떤 이들은 침체의 시기를 견디지 못해 중독으로 빠져들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몰입의 세계를 경험했을 수 있다. 둘 다 사람과 사람간의 물리적 단절이 가져다준 결과지만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그 시기 많은 책들을 읽고 글을 쓰며 내 삶을 드려다 보고 책 속에 다른 이들의 삶과 생각을 드려다 보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문학 작품을 읽고 내가 직접 소설을 쓰면서 내가 아닌 타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건 기존에 뇌의 작동방식의 커다란 전환기를 의미했다. 항상 자신을 위한 사고에만 익숙해진 뇌가 타인의 관점에서 사고한다는 것은 일상적인 삶에선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타인의 삶을 읽는 것이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그 타인을 삶을 내가 직접 써보는 것이다.
문학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불행(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Anna Karenina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중에서 –
이 문장은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문학은 타인의 수많은 불행(비극)을 드려다 보는 매개체이다. 그럼 왜 ‘우리가 타인의 불행을 드려다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그건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물질과 자본의 증식을 통해서만 느끼던 행복을 그것들 없이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일상과 삶 속에서 항상 우러러보는 타인은 옆집에 사는 이웃이 아닌 부자와 전문가 그리고 유력인사들 아니던가. 항상 그들의 말과 글 그리고 행동을 예의주시하며 따라하기 바쁘다. 자신도 그들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곳을 보고 같은 인간이 되려고 하니 경쟁과 시기 질투만 만연해진다.
하지만 우리가 문학 속에 수많은 타인의 불행을 드려다 보면 오히려 연민을 느끼게 된다. 나와 다른 삶 속에서 나와 비슷한 본질을 느끼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각기 다르지만 그 본질적 내면에 아픔과 상처를 볼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이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해 나가는 과정이다.
채식주의자 “뭐야 이거, 형부가 처제를 따먹고 사람이 거식증에 나무가 되고 완전 외설 쓰레기 소설 아냐?”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난 나의 첫 소감이었다. 이게 10년 전 일이었다. 그때 나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독서 모임이라는 곳에 발을 디뎠다. 아마 좀 지적인 허영심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 때 처음으로 읽었던 소설이다. 책이라고 일 년에 한 권도 읽지 않던 나에게 그녀의 소설은 내가 감상할 수 있는 수준의 작품이 아니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 [마태복음 7:6] –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쇠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사유와 생각을 담은 것은 생각이 없는 자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채식주의자]는 한국 문학 사상 최초의 멘부커 상을 받은 소설이다. 내가 읽고 느낌 소감이 맞다면 이 상은 정신병자나 바보들에게 수여하는 상일 것이다.
나의 좁고 얕은 삶과 생각에만 갇혀 있는 자는 항상 타인의 삶에서 비난거리만 본다. 뛰어난 작가는 너무도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같은 불행(비극)을 찾아가는 직업이다. 그 불행과 거북함을 리얼하고 감성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읽고 생겨날 그 어떤 수많은 감정들이 그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길 희망한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세계 문학사와 한국 문학계에도 아주 역사적인 일이지만 이건 한국인이 품고 있는 불행들이 이제 세계에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며 이건 더 많은 이들이 문학, 즉 타인의 삶을 드려다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건 한국의 두 번째 ‘한강의 기적’이 되지 않을까….
이제 물질이 아닌 정신의 성장이 필요하다.
난 10년 전에 읽었던 [채식주의자]를 다시 읽어보려 한다. 아마 이젠 다른 것이 보이지 않을까?
[한강의 기적] 24년 노벨 문학상 수상 글짓는 목수 (유튜브 계정)
https://youtu.be/CDBU_2cEsN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