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도 ep27
"띠리리리링"
택건은 늦은 밤 핸드폰 소리에 잠이 깼다. 벨이 울리는 핸드폰 화면에는 [수호 와이프 윤아]라는 문구가 떴다. 시간이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삼촌 삼촌! 엄마가 안 일어나요!"
"송... 송이니?
송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택건은 윤아에게 뭔가 우려하던 일이 터진 것 같은 직감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데니얼과 그의 아내는 모두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방문을 두드려도 데니얼의 코 고는 소리만 들릴 뿐 인기척이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현관 신발장 위에 놓인 데니얼의 자동차 키를 들고 집을 뛰쳐나갔다. 집 앞에 세워진 데니얼의 차에 올랐다. 구글맵에 윤아의 집 주소를 입력하고 네비를 따라 차를 내달렸다. 택건은 호주 온 이후 처음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택건은 몇 달간 가인과 함께 출퇴근하며 차량 조수석에 앉아 호주의 도로상황과 교통법규를 눈으로만 지켜봤다. 운전이야 다 비슷하겠지만 호주는 한국과 운행방향이 반대이고 도로 법규도 약간 달라 처음에 운전할 때 주의가 필요했다. 택건은 한동안 운전대를 잡지 않아서 인지 낯선 환경에서 운전을 하려니 긴장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윤아에 대한 걱정으로 그 모든 것들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엄마는 아직 정신이 없어?"
"응 안 일어나! 코하며 잠만 자 어떻게 해 삼촌?"
"아빠는?"
"힝~ 아빠는 전화 안 받아"
택건도 운전을 하면서 스피커 폰으로 수호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그의 전화는 예상했던 대로 꺼져있었다.
"빵빵 빠~~~~ 앙"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앞에서 오는 차와 정면으로 충돌할 뻔했다. 택건은 아직 한국에서 운전하던 습관이 남아있어 호주의 차선 주행 방향이 반대라는 사실을 깜빡하고는 역주행을 하고 있었다.
"휴~~ 큰일 날 뻔했네"
택건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차선을 바꿔 달렸다. 다행히 늦은 밤이라 차가 많이 없어 금방 수호의 집에 도착했다. 아파트 일층 로비 입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있는 송이의 모습이 보였다. 택건는 일단 도로 위에 비상등을 켜놓은 채 차를 세워놓고 송이를 둘러업고 아파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윤아씨~ 정신 차려요!"
윤아는 평온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택건은 윤아를 양쪽 팔을 잡고 흔들어 보지만 정말로 반응이 없었다. 침대 옆 테이블에는 그녀가 먹은 걸로 보이는 알약 여러 개가 뚜껑이 열린 약통 옆에 흩어져 있었다. 약통을 자세히 보니 수면제였다. 택건은 그녀의 볼을 살짝 때렸다.
“으으음…”
그제야 윤아는 얕은 신음 소리를 내뱉는다.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의식이 남아있다. 택건은 윤아를 등에 업고 뛰기 시작한다.
“으아아 앙~”
송이가 뒤따라 뛰어오다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다. 택건은 다시 뒤돌아 가 한 손으로 송이의 손이 잡은 채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녀와 송이를 차에 태우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Please help! she had sleeping pill too much!" (도와주세요, 그녀가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어요)
택건의 외침에 달려온 병원 응급실의 의료진은 윤아의 상태를 확인하고 바로 위세척을 실시했다. 택건과 송이는 응급실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엄만 왜 잠만 자는 거야?"
"응?! 미인은 잠꾸러기래, 엄마는 미인이라 잠을 많이 자는 가봐"
"그럼 엄마는 잠자는 숲 속에 공주야?"
"응… 그래”
"나도 잠자는 숲 속에 공주 할래!"
“송이는 꽃송이 공주 아니었나? 하하”
“싫어 싫어~ 이제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할래”
“그래 시간이 너무 늦었네. 공주님도 자야겠다 그렇지?. 여기 여기 삼촌 무릎 위에 누워”
"알았어. 엄마 일어나면 나도 깨워줘. 알았찌? 이제 엄마 말 잘 들을 거야, 근데 엄마 언제 일어나?"
“송이가 자고 일어나면 엄마도 깨어날 거야.”
시간이 새벽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택건과 송이는 응급실 앞에 의자에 앉아있었다. 송이는 택건의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고 눈을 감았다. 택건은 입고 있던 바람막이 외투를 송이의 몸에 덮어주었다. 그때였다.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모습이 나타났다. 모자를 눌러쓰고 수염이 시꺼멓게 올라온 모습이 마치 노숙자 같은 행색이었다. 그는 택건과 송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어!? 아빠다! 아빠 왕자님 오셨으니 이제 엄마도 깨어날 거야 그렇지?”
송이는 달려가 아빠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윤아는?"
"넌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인데 이제 나타나냐?"
"아빠! 엄마는 코~하고 잠만 잤어! 빨리 가서 뽀뽀해줘 그래야 깨어나지"
"미안하다."
수호는 뒤늦게 택건이 남긴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서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고 병원에 나타났다. 그는 여태껏 메시지를 보면서도 무시하고 있었다. 잠시 뒤 응급실에서 위 세척이 끝난 윤아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다행히 위험한 순간은 모면했다. 그녀는 이미 몸에 퍼진 수면제의 약기운 때문인지 평온한 모습으로 잠에 빠져 있다. 송이도 간밤에 소동으로 피곤했는지 엄마의 병상옆에 엎드려 잠에 빠져들었다. 택건은 송이를 안아 들고 옆에 간이침대에 눕히고는 자신의 겉옷을 덮어 주었다.
"윤아, 이번이 처음이 아냐"
"무슨 말이야?"
“호주 오기 전부터 우울증이 있었어, 여기 와서 더 심해지기 시작하더니 잠도 잘 이루지 못하더라고 그래서 밤마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지, 나도 같이 한두 잔씩 마셨는데, 내가 취해서 쓰러져 잘 때까지 윤아는 술을 마셔도 잠을 이루지 못하더라고, 술을 마실수록 더 정신이 또렷해지는 거 같다면서 그래서 결국 수면제까지 먹기 시작했어. 이제는 습관처럼 복용하기 시작했어 약이 없이는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어버렸지"
"정말?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수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 사실 호주에서 살고 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호주에 여행 갔다 온 거 아녔어요?"
수호는 호주로 떠나기 하루 전날 그 사실을 윤아에게 말했다. 수호는 그녀가 혹시나 그 사실을 알고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 도저히 그녀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한 달 동안 연장된 휴가기간 수호는 윤아와의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갔고 둘은 매일 보지 않으면 안달이 날 정도로 서로 감정이 깊이 무르익어 있었다.
"미안해,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차마 말하기가 힘들었어"
"그럼 언제 오는데요?"
"음... 내년 말쯤"
"일 년 뒤예요?"
윤아는 수호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만난 지 한 달 만에 일 년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 못내 가슴 아파했다. 장거리 연애를 자신이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윤아는 여느 여자처럼 운명 같은 사랑을 갈망하는 여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여자이기도 했다. 항상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두 가지를 충족할 수 있는 그런 연인을 꿈꿔왔다. 윤아는 드디어 그런 이상과 현실의 두 조건을 만족하는 인연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수호가 그 인연일 거라 생각했다.
당시 윤아에게는 그녀 곁을 맴도는 한 남성이 있었다.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다. 둘은 정말 허물없는 동성 친구처럼 지냈다. 그 남자는 그녀 곁에서 오랜 시간을 우정을 빙자해 혼자서 그녀와의 짝사랑을 키워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서울 판교에서 당시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 IT 기업에 취직해 승승장구하며 최연소 프로젝트 매니저가 될 정도로 능력 있는 IT 전문가였다. 그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님에도 불구하고 주말마다 윤아가 있는 부산까지 내려와 그녀에게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윤아는 동갑내기인 그 친구의 그런 지극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우정에서 시작한 감정은 좀처럼 또 다른 감정으로 쉽게 바뀌지가 않았다. 그 남자는 윤아가 수호를 만나기 며칠 전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주변에서는 다들 그 남자의 노력과 능력을 봐서 그와의 결혼을 모두가 지지하는 분위기였지만 윤아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당시 윤아 또한 부산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려 <발레 요가>라는 무용과 요가를 접목한 새로운 퓨전 피트니스 학원을 운영 중이었다. 아직 초창기라 수입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열정과 노력으로 조금씩 입 소문이 퍼지며 사업을 조금씩 풀려나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이라는 과제를 풀기 위해 사랑도 우정도 아닌 감정으로 그를 따라 낯선 서울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그녀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온 부모님의 다정한 모습과 많은 자매들 사이에서 자란 가정환경이 그녀로 하여금 결혼을 통해 온전한 가정을 일구는 꿈 또한 절대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그녀도 나이가 들어가고 자신의 사업으로 삶이 점점 바빠짐에 따라 그 꿈을 이루는데 꼭 사랑이라는 것이 필요할까 하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우정도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리고 오랜 시간 자신의 옆을 지켜오던 허물없던 친구의 불편한 고백이 자꾸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이상을 접고 현실의 사랑을 따르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아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렇게 그녀도 다른 대부분의 여자들처럼 이상을 꿈꾸는 감성 충만한 소녀에서 이제는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이성적인 여성으로 점차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