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도 ep28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던 시기에 윤아는 운명처럼 수호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사랑과 우정 사이의 애매한 감정이 아닌 이상적인 사랑과 함께 인생의 동반자를 만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운명의 만남은 또다시 생이별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비운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안 가면 안 돼요? 여기 한국에서 살면 안 돼요?"
"미안... 그러기엔…"
"제가 이미 한국에서 자리 잡고 있으니 수호 씨는 일단 몸만 오면 될 거 같은데… 수호 씨도 천천히 여기서 다른 일을 찾아보면 되잖아요. ”
“난 한국이랑 맞지 않아”
“… 그런 게 어딨 어요? 다 맞춰가며 사는 거죠”
“싫어 난 그렇게는 못살아. 한국은 정말 아닌 거 같아”
윤아는 자신이 운영하는 필라테스 학원으로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호에게 호주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지만 수호 또한 호주에서 닦아놓은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올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남자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자리와 수입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수호 또한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여자한테 의지하며 산다는 것은 여태껏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남자의 권위는 돈과 능력에서 온다는 것을 그는 과거 역사를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역사를 전공했기에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여전히 남자가 여자를 이끌고 부양해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여자들은 그저 눈앞의 사랑이라는 감정에 취해 그렇게 말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현실에 눈을 뜨면 그때 말과 태도가 바뀌는 여자의 습성을 너무 많이 겪어봤다. 사랑도 현실의 물질세계의 밑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 정말 갈 거예요?"
"응 미안해"
“그럼 나 기다릴게요”
"응, 가서도 자주 연락할게"
둘은 헤어지는 그날 아침까지 헤어짐의 아쉬움과 한동안 다시 보지 못할 거라는 그리움으로 함께 밤을 지새우며 뜨거운 정사를 나눴다. 드디어 작별의 아침이 밝았다. 둘은 드넓은 활주로 위 수많은 비행기들이 내다 보이는 공항 로비의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와 샌드위치를 나눠먹으며 밤새 나눈 정사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마지막 아침을 함께 했다. 그리고 출국장 게이트에서 눈물과 포옹으로 작별했다.
수호는 호주로 돌아온 뒤 거의 매일 윤아와 화상통화를 하며 그녀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을 표현했다. 윤아도 그런 그의 노력과 정성이 그녀가 현실적인 냉정함을 되찾는 걸 더디게 만들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임신 5주 차이시네요"
느닷없이 찾아든 메스꺼움과 구토 그리고 어지러움증, 윤아가 몸에 뭔가 이상한 변화를 눈치챘을 땐 이미 뱃속에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며칠 동안 일도 쉬고 다른 사람들과 연락을 두절한 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수호 씨~~ 나 임신했어요”
“어? 뭐라고? 설… 설마? 나 안에다 안 했잖아?”
“네?!... 그게…”
“아… 어쩌지…”
“뭘요?”
“아니.. 지금 우리가 애를 가질 그런 상황은 아니잖아, 아직 결혼도 안 했고…”
“…”
그녀는 그와의 몇 마디 길지 않은 전화 통화에서 뱃속의 아기가 결코 축복 속에 태어날 애가 아님을 확신했다. 그녀는 다음 날, 아이를 지우기로 결심하고 다시 산부인과로 향했다. 그런데 집을 나서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참기 힘든 복통과 메스꺼움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그녀는 근처의 공중 화장실로 뛰어가 변기를 붙잡고 모든 것을 쏟아내었다. 한참을 토하고 또 토하며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 싶을 때까지 쏟아냈다. 그런데도 계속 구토가 올라왔고 맑은 위액까지 역류해서 올라왔다. 결국 산부인과도 가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런 일은 그녀가 산부인과로 향하려 할 때마다 계속되었고 한번 발동이 걸리면 구토는 온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심각한 임신 중독증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몸은 갈수록 야위고 피폐해져 갔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결국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어머니와 언니들이 그녀들이 번갈아 가며 그녀를 보살폈다.
"윤아야~ 애가 죽기 싫어 발버둥 치는가 보다"
그녀의 부모는 수호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어떻겠냐고 설득했다. 윤아는
자신만의 신념이 강한 여자였다. 비록 짧은 통화였지만 수화기에서 들렸던 수호의 주저함과 불편함 섞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좀처럼 잊히질 않았다. 그녀는 아이에게 아빠의 기쁜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생명의 시작은 축복이어야만 한다는 그녀의 이상적인 신념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그 시작을 멈추고 싶었다.
윤아의 어머니는 그녀가 어려서부터 다른 언니들에 치여서 부모한테 의지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조숙하게 자라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여태껏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결정한 사실이라는 걸 알기에 조심스럽게 그녀를 타일렀다.
윤아가 수호에게 아이를 가졌다는 얘기를 한 이후로 윤아는 한 동안 수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수호는 자신의 연락을 받지 않는 그녀가 변심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수호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윤아에게 점차 실망과 미움이 커져갔다. 그리고 윤아가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연락을 했을 땐 이제 수호가 연락을 받질 않았다.
사실 수호도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둘의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중한 외모와 신비감 있는 캐릭터는 항상 주변에 여자들을 꼬이게 만들었고 당시 교회에서 알게 된 한 호주 국적의 한인 여성으로부터 끈질긴 유혹을 받고 있었다. 수호도 호주에서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비자문제(영주권)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호주국적의 그 여성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뜸해지는 윤아와의 연락으로 자신도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잘… 지냈어요?”
“어… 뭐 그럭저럭”
“수호 씨 연락이 잘 안 되던데요…”
“어 뭐 일 때문에 바쁘다 보니 그렇게 됐네”
“음… 그랬구나…”
“…”
잠시 둘이 대화가 끊기고 적막이 이어졌다.
“수호 씨… 우리 결혼해요. 그리고 아기 낳아요”
"아기, 얼... 얼마나 됐어?"
"이제 4개월 됐어요"
“그렇구나…”
윤아는 전화기로 들려오는 그의 떨리면서 머뭇거리는 듯한 음성이 통화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전화를 한 목적은 한 가지였다. 그의 동의를 구하고 결혼을 하고자 함이었다. 그녀는 임신에 대한 그의 첫 반응에 상처받았지만 상처보다 더 중요한 건 아이였다.
윤아는 이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마음이 굳어진 이상 수호의 마음을 자신과 같이 되도록 설득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이를 지우기엔 이젠 너무 늦어 버렸다. 이제 윤아는 아이를 살리는 길이 자신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게 또 잠시 전화기에서 적막이 흘렀다. 수호도 윤아의 임신사실을 알고 난 후 임신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검색했고 3개월 이상 넘어가면 애를 지우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국 한 번 들어올 수 있어요?”
"음… 회사에 한 번 얘기해 볼게"
"그래 줄 수 있겠어요?"
"그… 그럴게"
수호는 회사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결혼 사유로 또다시 회사로부터 휴가를 받아 한국으로 들어왔다. 둘은 다시 얼굴을 마주하자 옛 감정이 다시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틀리진 않은 모양이다. 헤어진 시간 서로에게 남긴 상처와 소원함은 그렇게 조금씩 치유되고 사라지는 듯 보였다. 그리고 둘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뭐?! 결혼 사회?"
"그래 내가 한국에 친구가 너밖에 더 있냐? 해줄 거지?"
수호는 택건에게 둘의 결혼식 사회를 부탁했다. 그때까지 택건은 윤아의 임신 사실도 몰랐을뿐더러 둘이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택건 또한 수호를 잘 알고 있었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수호도 곁에 여자 없이는 지낼 수 없는 녀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둘은 자연스럽게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느닷없는 수호의 결혼 소식에 택건은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택건은 얼떨결에 그의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되었다.
결혼식은 조졸하게 진행되었다. 특이한 점은 결혼식 당일 신부 측에는 엄청난 하객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룬 반면 신랑 측 쪽에는 가족 친지들을 말고는 사람이 없이 썰렁했다. 수호도 오랜 시간 해외에서 살면서 한국에서 친구들과 지인들과는 모두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수호의 어머니는 이혼을 한 상태였기에 친가 쪽 친척들도 없고 친구라고는 택건 하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호주에서 같이 일하는 직장동료이자 형인 성일 이 그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핑계로 그와 같이 입국했다. 하지만 속셈은 다른 것에 있었다. 그는 윤아의 친구인 사랑을 소개받는 옵션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윤아는 자신이 언젠가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야 할 호주에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녀를 호주로 데려갈 방법을 생각했고 그것이 성일과 사랑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성일도 외로운 타지 생활에 반려자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둘은 윤아와 수호의 결혼식에서 만났고 윤아와 수호는 가족들과는 별도의 피로연을 준비해 성일과 사랑이 만남을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하지만 성일과 사랑은 윤아와 수호 같은 운명적인 인연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수호와 윤아는 결혼식을 치르고 가까운 제주도로 둘만의 밀월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꺼질듯하던 사랑의 불씨는 새 생명의 잉태와 결혼으로 다시 살아났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과의 인연을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만으로 이어가긴 쉽지 않다. 부부의 연을 이어가는 것은 피가 섞인 자녀라는 교집합 이 있기 때문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틀리지 않은 듯 보였다.
생명이 둘의 인연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