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여왕님.
나와 할매는 생일이 같다.
나는 양력, 할매는 음력.
왠지 소울이 통하는 느낌이랄까.
이십 대 시절, 할매는 우리를 참 부러워하셨다.
이 시대에 태어나면 못할 것이 있겠냐며.
물을 길어 오기를 하냐, 손잡이 돌리면 물 나오지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하냐, 버튼 꾹 누르면 세탁기가 알아서 해주지
가마솥에 밥을 짓냐, 밥솥이 다 해주지.
이 편한 세상에 못 할 것이 무엇이여.
전쟁통에 막둥이를 들고
총알 사이를 뚫고 살아남았다는 우리 할매.
(전쟁에서도 살았는데 못할 것이 무엇이요, 할매?)
새로운 맛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할매는 프로미식가다.
피자, 파스타, 스페인 음식 등 다른 나라 음식을 매우 잘 드셔서
친구들이 화들짝 놀래곤 했다.
뷔페가서 한식 먹는 어르신들을 제일 나무라신다.
특히 최애 아이템은 겨울철의 아이스크림이다.
(난 벌써부터 이시려서 아이스크림을 잘 못 먹...)
그런 할매가 작년에 다치신 후
폭삭 늙어버린 느낌이다.
물론 아직 목소리는 웬만한 사람보다 크고 우렁차지만
주름이 늘은 할매의 얼굴을 보면 세월이 참 야속하다.
(내 얼굴의 주름 또한...)
그렇게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드실 분이
일한다고, 육아한다고
멀다고, 힘들다고 잘 찾아뵙지도 못하는 손녀를
참으로 끔찍이도 생각하신다.
항상 생각지도 못한 큰 사랑을 주는 할매.
오늘도 전해받은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오랜만에 한 전화에 너무나 신나게 수다를 떨고는
애 키우느라 힘들면 오지 말고 전화나 하라는 할매.
무뚝뚝한 성격에 전화하라는 말도 안 했던 할매인데
전화나 하라는 그 말에 가슴이 먹먹했다.
전화도 항상 마음뿐이었던 못난 손녀는 너무나 죄송스럽다.
올해는 더 자주 전화드리고, 자주 찾아뵈야지.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나의 여왕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사랑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