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지?
저게 뭘까.
언뜻 보면 비닐우산 같기도 하고
밥상 덮어놓는 밥상보 같기도 한 저것
정체가 뭐지.
지난주 들른 시댁 시골집.
차에서 내려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화단 한쪽에 정체 모를 뭔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무리 봐도 도통 모르겠어서 가까이 다가가 보는데
“이~ 저거? 하우쓰여 하우쓰.
고 놈이 접때 서리 내릴 때까정두 잘 버텼었는데 말여.
요 며칠 가만 보니께 영 죽겠다 싶드라구. 자꾸 말라가는 게.
그래서 맨들어 줬지 내가~ 카네이션 하우쓰”
어머니 말씀대로 과연 그 속엔 낯익은 카네이션이 수줍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네이션 한 뿌리를 위한 비닐하우스라니.
그것도 세상에 하나뿐인 무려 '맞춤형 비닐하우스'
참고로 이 카네이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올봄 어버이날을 맞아 우리가 사다 드린 것이었다.
플라스틱 화분에 담긴 아담한 카네이션. 다시 볼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그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당 한 편으로 이사 나와 있었고
그 후로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우리를 반겨줬었다.
“요즘에 난 얘 디다 보는 재미로 살어.
한 놈이 피고 시들라치믄 고 옆에서 또 한 놈이 피고.
인제는 죽었나 싶어서 보믄 또 꽃망울 맺혀 있고. 그렇게 기특헐 수가 없다니께“
그때마다 어머니는 이 씩씩한 아이를 마냥 신통방통해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시골에서 포도 농사를 지으신다.
크고 긴 하우스마다 주렁주렁 열린 포도들을 금이야 옥이야 여름 내 키우고 키워서 출가시키는 어머니다.
그런 여장부 같은 어머니가 손바닥만 한 하우스 미니어처를 뚝딱뚝딱 만들고 계신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난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하우스의 자태가 아담한 체구의 어머니를 꼭 닮았다.
삐뚤어진 돌 하나를 제대로 놔주시면서도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시는 어머니 옆에서
문득 ‘본다’는 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 어머니식 표현으론 ‘디다 본다’가 되겠지.
만약 말에도 온도가 있다면 이 ‘디다 본다’라는 말은
‘뜨뜻한 숭늉’ 정도 되지 않을까.
'식어버린 커피' 정도 되는 마음이면 절대 뭔가를 꼬박꼬박 디다볼 수는 없을 테니까.
어차피 아쉽긴 해도 당연한 유효기간을 생각하고 들이는 게 이 '어버이날 카네이션'아니던가.
내년 카네이션이 또 대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쩌면 잠깐 들렀다 갈 예정이었던 손님 같은 그 아이를 위해
마당에 자리 마련해 주고, 흙 덮어주고, 살 구부려가며 지붕 만들어주고
마무리로 앙증맞은 테두리 돌담까지.
이 모든 건 다~ 매일 같이 디다 봤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것도 애정을 듬뿍 담아서.
딱 우리 어머니 같은 친구가 있다.
화분이면 화분, 금붕어면 금붕어, 자라는 거면 그게 뭐든, 심지어 아이들마저도
느긋하게 잘 키워내는 그 친구한테 언젠가 내가 물은 적이 있다.
"꽃집에서 주란대로 1주일에 한 번씩 딱딱 맞춰서 물도 주고
나도 못 맞는 영양제도 때때로 꽂아줬는데, 왜 워째서..
우리 집에만 오면 화분들이 시름시름 앓지?
너네 집 생명들은 이렇게나 잘도 자라는데?"
그때 그 친구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정해진 건 없어. 그냥 자알 보믄 돼. 잘 보면 보이거든.
얘가 지금 흙이 말라서 물을 먹고 싶어 하는지
아니면 물을 너무 마셔서 뿌리가 썩고 있는지"
에이 그런 게 어딨어.
나는 아무리 봐도 나는 모르겠던데.
그때는 몰랐다. 수시로 보고 또 보는 친구와 물 줄 때만 보는 나의 차이를.
나는 진짜 보는 게 아니었음을.
가끔 찾아보는 ‘어반 딕셔너리(Urban Dictionary)’라는 게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단어를 정의 내려보는 사전 서비스인데
거기에 ‘보다 look’을 검색하면 이런 정의가 첫 번째로 나온다.
보다 :
누군가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다
사랑의 동의어
가장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은 정의란다.
‘보다 = 사랑의 동의어’라니.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살다 보면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구?' 싶을 때가 많은데
요럴 때 보면 '이렇게나 닮아 있는 게 또 사람 마음이구나' 싶다.
나라는 사람도 뭔가를 좋아하면 가만히 보기 때문이다.
그것도 찬찬히 느리게.
아빠 무릎 위에서 입꼬리를 씰룩씰룩하면서 귀지를 파고 있는 아이를
나는 본다.
핫팩을 귀에다 대고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종종종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나는 본다.
베란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따라 살짝살짝 움직이는 고무나무 잎을
나는 본다.
그렇게 그 순간을 눈으로 캡처하고 있으면
시간도 가만히 따뜻하게 흐른다.
문 열면 냉동실로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알싸한 요즘이라 그럴까.
그런 따뜻한 순간들이 더없이 귀하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눈 흠뻑 맞은 미니 하우스는
미니 이글루로 변신했겠는데?
얼마 전 스마트폰 사진 전송을 극적으로 마스터하신 어머니께
이글루 사진 한 장 전송 부탁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