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대충 살기로 결심했다
최근 유행했던 밈(meme) 중에 ‘대충 살자. OO 하는 XX처럼.’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그저 유머로 소비되는 경우도 있지만, 나처럼 인생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에겐 꽤 유용한 말이다. 솔직히 웬만한 명언보다 와닿은 말이었다.
완벽주의자와 게으름뱅이.
이 두 단어가 누군가에겐 극과 극에 있는 반대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또 누군가에겐 인과관계가 있는 밀접한 단어이기도 하다.
내겐 두 단어가 후자처럼 보인다.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기에 엉뚱하게 게으름뱅이가 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나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줄곧 ‘게으른 사람’으로 분류하곤 했다. 물론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사부작사부작 매일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늘 정해진 일과를 수행하는 것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잘 모르거나, 익숙하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자체를 싫어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역설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막상 ‘시작’ 해 보면 못 할 일도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수월한 일도 많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에 겁을 먹을까?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나는 강박이 있다. 무언가를 시작하면 기어코 끝을 봐야 하고, 이왕 손을 댄 것이라면 완벽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만약 실패를 하거나 내 기준에 미달하는 결과를 받으면 한없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 유별난 사람이었던 것이다.
게임을 하면 무조건 당일에 엔딩을 봐야 하고, 영어 공부를 시작하면 원어민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싶고, 연애를 하면 상대가 반드시 내 취향에 모두 맞아야 하며, 청소를 시작하면 먼지 한 톨도 허용할 수 없다. 취미로 잠깐씩 연습해보는 영상 편집도 시작하면 일단 끝을 봐야 하고, 컬러링 북도 눈이 감기더라도 칠하고 있던 페이지는 완벽하게 끝을 내야 한다.
결정적으로, 이렇게 나 홀로 쓸데없이 진심이었는데 결과가 내가 바라는 대로 나오지 않으면 나는 허탈해지고 공허해진다.
몇 개의 예만 들었는데도 벌써 피곤해진다. 그렇다. 나는 극강의 완벽주의자였고, 이러한 피곤함들이 축적되어 ‘어떤 일을 시작’한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지치고 마는 것이다.
이윽고 나는 일을 미루고 만다. 다음에 컨디션이 좋을 때 제대로 시작해야지.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때는 잘 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일에 내 에너지를 모두 쏟고 나면 다른 것은 할 여력이 없다. 그래서 멍하니 침대에 누워 짧고 가벼운 동영상들이나 보며 유익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성향은 나를 이 나이 먹도록 모든 것에 경험이 적은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었고, 남들이 보기에 재미없는 삶을 사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며칠 전, 나는 갑자기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각성했다. 덮고 있던 이불을 발로 차고 일어나 결심했다. 앞으로 되도록 많은 경험을 해볼 거야. 30대면 나도 아직 청춘인데! 이대로 바보처럼 나이 들기는 싫어.
그래서 나는 대충 살기로 결심했다. 물론 일은 열심히 해야겠지만, 일을 제외한 일들에 대해서 딱 60%만큼만 진심이 되기로 했다.
게임은 여러 날에 걸쳐 엔딩을 봐도 괜찮다. 유명 게임 스트리머들도 그런다.
영어 공부는 원래 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완성해가는 것이다. 당장 쏼라쏼라 못 한다고 초조해할 필요가 하등 없다. 바꿔 말하면 외국인들도 한국어를 배우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연애 상대는 어차피 완벽하게 내 취향인 사람을 만날 확률이 낮다. 마음이 끌린다면 일단 그냥 직진해보는 거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나의 취향이 바뀔 테니까.
청소는 내 힘닿는 곳까지, 그냥 눈에 보이는 곳만 설렁설렁해도 괜찮다. 먼지 한 톨 하나 없는 청소를 위해 미루고 미루는 것이 더 더러우니까.
영상 편집이나 컬러링 북 등은 말 그대로 취미일 뿐이다. 오늘 당장 완벽하게 끝낸다고 한들 큰 의미가 없고, 또 오늘 당장 완벽하게 끝내지 못한다고 한들 내 인생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취미가 일이 되는 순간, 그 취미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사람의 성향이라는 게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노력해봐야지.
약간 늦은 감이 있지만, 내 남은 자투리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졌다.
대충 해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게 되더라도, 도전 자체를 안 하고 헛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야 낫겠지. 나는 지금부터라도 많은 것을 경험하며 살 것이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나 즐길 줄 아는 삶, 정말 멋지다.
그러므로 전 오늘부터 대충 살 겁니다.
완벽주의자로부터 탈피하려 노력할 겁니다.
완벽하기 위해 게으른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바보 같은 짓도 없으니까요.